"인터넷 검열의 반대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 그래서 항상 인터넷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터폴(국제 경찰청), 미국 경찰청, 바티칸을 상대로 디도스(DDos) 공격을 벌인다. 일례로 미국 외교 문건을 공개한 위키리크스의 금융 활동을 차단한 금융 회사 마스터카드, 비자카드에 대해 디도스 공격을 하는 등 공익 목적의 해킹을 지지하는 활동을 표방해왔다.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Play Station Network, PSN, 일본 소니의 온라인 게임 네트워크 : 인용자)나 국제통화기금(IMF), 미 연방수사국(FBI)을 공격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미국 당국이 파일 공유 사이트 '메가 업로드' 등을 폐쇄 조치한 것에 대응하여 미 법무부 등 몇몇 정부 관련 사이트에 대한 디도스 공격으로 즉각 대응했다"
가장 최근에 벌인 일은 유엔 홈페이지 공격이다. 2012년 5월 9일 유엔이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를 알고도 침묵한다는 이유로 유엔 홈페이지를 다운시켰다. 바로 하루 뒤에 반기문 총장은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인도적 대우를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은 공격 성공 직후에 '탱고 다운 유엔'이라는 글귀를 트위터에 올렸다. 매번 그렇게 한다. '탱고 다운'이란 '목표물 사살 완료', '테러리스트 제압 성공' 등을 말하는 군사 암호이다. 해커, 또는 사이버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어노니머스가 유엔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른 셈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가하고 있는 것은 국가 테러이고, 그 국가 테러를 묵인하면서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면 유엔 역시 한 통속이라는 논리. 통쾌한 야유가 아닐 수 없다. 유엔뿐만이 아니다. 공공 기관 중에서 어떤 것은 세계 시민에 대한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비판하는 것이며, 그래서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권을 위해 싸우되, 폭탄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인터넷이라는 매우 효과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선전하고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떠올리게 된다. 이분들이 이 시대에 살아있었다면 컴퓨터를 배워 어노니머스에 동참하지 않았을까. 간디는 인도에만, 킹 목사는 미국에만 국한된 인권 운동을 했지만, 어노니머스는 전 세계에서 비판 대상을 선정하고 비판의 결과 역시 매우 신속하게 전 세계에 확산시키고 있다.
더구나 그들에게서는 비장감 대신에 유머가 넘친다. "탱고 다운", "긴 밤이 될 것이니 팝콘을 준비하라." 그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음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즐기고 있음도 보여준다. 마치 1970~80년대의 화염병 시위가 촛불 집회로 진화한 현상을 연상케 한다.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되 공동체에 이바지할 수도 있다니, 이만한 일도 드물지 않겠는가. 물론 그들의 행위는 해킹이고 불법이다. 하지만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동원할 수밖에 없는 '불법'에 대해 역사는 항상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강한 자의 강요이기 쉬운 법에만 의존했다면 오늘의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다.
▲ '어노니머스' |
어노니머스는 '익명, 이름 없음, 저자 불명' 등의 뜻을 지닌다. 그들의 구호대로 "우리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군단이다." 이름 없음을 이름을 삼는 아이러니는 참으로 절묘하다. 그들은 실정법 위반 행위를 서슴지 않으니 이름을 드러낼 수 없기도 하지만, 좀 더 깊은 의미는 그들의 철학과 관련되는 듯하다. 인터넷 상의 배타적 저작권(카피 라이트)에 대한 반대(카피 레프트)이기도 하고, 한 개인의 능력보다는 집단지성, 여러 사람의 협력 체제를 중시한다는 철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노니머스는 결국 '무명씨'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옛 문학 중에 상당수는 작자 불명, 무명씨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작품이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잘 드러내는 현상이다.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당연히 저작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요즘의 카피 레프트 운동을 연상케 하거니와, 요즘 말로 '문화 상품'에 해당하는 것들은 전근대 시기에는 거의 모두가 만민 공유의 것이었다. 모두가 함께 만들고 함께 향유하는 것이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자본주의적 근대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크로마뇽인의 동굴 벽화에서부터 몇 만 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했다.
물론 문화 말고도 많은 것들이 공유 재산이었다. 당장에 떠올릴 수 있는 게 서구에서 봉건 시대의 공유지, 즉 엔클로저 운동에 의해 박멸당한 땅들이다. 그 땅을 잃어버림으로써 민중들은 농토에서 내몰리고 그곳을 차지한 자본가들은 그 땅에 양을 키웠으니 '양이 사람을 먹는'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조선 시대까지 산림천택(山林川澤)에 대한 사적 소유를 금지했으니 그곳은 만민공유의 것이었다. 농사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산 속의 풀은 퇴비가 되었고 나무는 땔감을 대주었으며,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강과 연못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대한 사유화를 허용한다면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다. 동학 농민 전쟁의 계기만 보더라도 확인된다. 만석보에서 고율의 물세를 받아 챙겼던 고부 군수 조병갑, 그는 물을 사유화했던 것이며 반발은 극렬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말로 하자면 토지 공개념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금세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아메바'적 사유를 지닌 분들이 많지만, 공유 재산은 물질적인 것이건 지적인 것이건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자본주의 근대가 전일화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인류가 간직해온 귀중한 전통이었다. 사적 소유는 공적 소유와 조화될 때에만 순기능을 극대화한다. 어노니머스들이 신봉하는 카피 레프트 정신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소중하다.
단순히 사회적 기능의 측면에서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특허권이란 "발명, 발견에 의한 신제품 또는 신제법을 일정 기간 독점적으로 제작하거나, 사용,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발명이란 도대체 얼마만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바퀴와 불과 철을 이용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기계는 과연 몇 종류나 될 것인가. 그런데 그 기계의 특허권자들은 바퀴와 불과 철의 발명자에 대해 이용료를 준 적이 있는가.
물론 그것들은 특허권의 개념이 없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있다 해도 이미 기한이 소멸된 지 오래이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특허권자들이 한 것은, 불과 바퀴와 철의 발명에 비한다면 약간의 사소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변형을 거쳤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히 자기 것이라 이름붙이는 일은 정당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바퀴·불·철이라는 인류 공유의 유산을 공동 상속한 사람들이니, 이것들을 사용한 특허권에 대해서도 일정한 비율의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충분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바퀴, 불, 철에 대한 특허권이 광범위하게 보장되었다면 인류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훨씬 더딘 것이 되었으리라.
기술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에 빚지지 않은 문학이 있던가. 전통에서 배우지 않은 작곡가 화가가 가능하던가. 문화 예술은 얼마만큼 자기 것인지는 아무도 재단할 수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지적 재산권이란, 특허란 이렇듯 허망한 것이다. 물론 특허권 보호의 순기능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특허권자에게 독점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윤리적 타당성도 없으며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 역기능하는 바가 크다.
카피 레프트 운동은 이런 점에서 도덕적 근거와 사회적 효용성을 동시에 확보한다. 물론 아무래도 자본주의 근대에서는 소수의 운동에 불과하지만, 그 사례들은 풍부하고 아름답다. 무료 컴퓨터 운영 체제(OS)인 리눅스가 카피 레프트 운동의 기원 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그 정신을 보여준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근대적 필름 카메라를 발명한 루이 다게르, 엑스선을 발견한 뢴트겐은 특허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뢴트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엑스선을 특허로 내라고? 그것은 원래 있었고 나는 그저 발견했을 뿐인데 내 것으로 삼으라는 말인가. 엑스선은 온 인류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톨스토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권을 러시아 인민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자신의 문학은 러시아어에 빚진 것이며, 러시아어는 러시아 국민 모두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엑스선은 훨씬 싼값에 인류의 건강을 보살필 수 있었고 톨스토이의 문학은 러시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되었다.
이쯤해서 이문열이 평역(評譯)한 <삼국지>가 생각난다. <삼국지>는 물론 나관중의 창작이고 이문열이 한 일이라고는 거기에 약간의 살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문열은 배타적 사용권을 보장받았고 막대한 인세를 받고 있다. 물론 이문열이 특별히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한국의 출판 시장의 법칙에 따랐을 뿐이지만, 톨스토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선택임에는 분명하다(고전을 가공해서 저작권을 획득한 경우는 저작권료의 상당 비율을 대중에게 되돌리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번역할 때 원작료를 지불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톨스토이나 뢴트겐이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과학자나 문화인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 창의와 발견에 대한 보상이 미흡하다면 지체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으니, 카피 레프트가 만능도 아닌 듯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특허권과 저작권의 과다한 보장을 적절히 제어하고 공공적 기능을 높이는 것이다. 예컨대 공적 기관(국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아프다. 우리의 국가는 아직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하다)에서 특허권과 저작권의 일부를 선별적으로 매입해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지금도 교과서나 우익 단체의 인쇄물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인쇄물에서 하는 일을 왜 사이버 공간에서는 하지 못하는가. 무상 교육은 왜 학교에서만 이뤄져야 하는가. 평생 교육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수용자가 스스로 교육 과정을 구성해서, 저작권을 공동으로 구매한 인터넷 콘텐츠를 통해서 무료로 또는 값싸게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공공 서비스가 시급하다.
지적 재산권이 과잉 보장되면, 대중들의 정보 이용에 큰 장애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 저작권 보호 기간이 길어지고, 예외 인정 범위가 축소되는 현재의 경향은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계급에 따라서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격차가 생기게 되면 그 자체로도 문제이거니와, 빈부의 세습에 기여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크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검열이며, 훨씬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검열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검열이란 물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사전에 차단하는 일에 국한된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가 텅 비어있다면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게 된다. '늑대 소년'이 그저 먹고 싸는 일 말고는 발화하고픈 욕구를 느끼지 못하듯이 말이다. "니르고자 ᄒᆞᆯ ᄇᆞㅣ"를 만드는 일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검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형성하고 촉발하는 것은 인류가 이미 쌓아놓은 문화와 사상이다. 그 문화와 사상에 접근하는 권리를 지배층에게만 허용하면서 대다수에게는 원천 차단하였던 것이 중세까지의 지식 독점에 의한 계급 독재 체제였다면, 보통 교육 제도는 그 장벽을 허물어버린 근대의 쾌거이다. 지적 재산권의 과잉 보장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계급에 따라 차별화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머리를 빈곤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지재권 보장의 일정한 제한, 또는 어노니머스들이 주장하는 인터넷의 자유 이용 보장이 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적 재산권이 검열로 이어질 가능성은 최근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어노니머스는 미국 정부가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자료 공유 사이트 '메가 업로드'를 폐쇄하자 미국 저작권청과 연방수사국 등의 사이트들을 공격해서 마비시켜 버렸다. 온라인 저작권 도용 방지(SOPA) 법안이 미국 의회에 상정되어 논란이 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법안은 저작권 침해 사례, 또는 침해 추정 사례가 단 하나만 발견되더라도 그 사이트 전체를 폐쇄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유튜브에 올라있는 무수한 정보 중에서 하나만 발견되어도 유튜브를 폐쇄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러나 법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이미 특정 사이트를 폐쇄했으니, 법안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까지 일었다.
페쇄 대상이 될 수 있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새로운 대중적 의사 소통 장치이며, 대항 언론의 기능을 하고 있다. 거대 자본이나 권력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대중들이 스스로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담론장이다. 그 담론장이 이제 저작권 침해를 빌미로 언제든 폐쇄될 수 있다는 법안이었다. 불특정 다수가 무수히 많은 게시물을 올리는 인터넷의 특성 상 업체가 저작권 위배를 일일이 점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렇다면 권력은 언제든 '괘씸죄'에 해당하는 매체를 폐쇄할 권리를 얻게 된다. 저작권 보호를 빌미로, 합법을 가장한 불법 검열이 자행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더구나 SOPA는 국경을 넘어서 적용될 수 있다. 특히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이 그렇다. '네이버'나 '다음'에 저작권 침해 사례가 발견될 경우, 미국은 그 폐쇄를 요구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노니머스의 디도스 공격은 미국의 '디지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성격이 강력하다고 하겠다.
위키피디아는 SOPA에 항의하여 화면을 블랙 아웃했으며, 구글 등 검색 및 포탈 게임업체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네티즌을 중심으로 여론이 악화되었고 백악관 역시 인터넷 검열 가능성 등을 들어 법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방면의 압력에 못 이겨 법안은 철회되었지만, 완전히 폐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터넷에서는 저작권의 침해가 일정 부분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피해의식이 할리우드나 음반 제작사 등 문화 자본에 상존하는 한 SOPA의 부활 가능성은 상존한다. 저작권, 특히 인터넷 저작권을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가 절실하다. 한국에서는 주한미군 지위 협정(SOFA)뿐만 아니라 SOPA까지 문제가 되어 버렸으니, 이래저래 우리의 '소파'는 '안락 의자'가 아니라 '불안의자'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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