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 상승으로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 영구 동토대까지 녹아버렸고, 도시는 물에 잠겼다. 아득한 과거의 문명은 흐릿하고 냄새나는 물속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바다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생겨난 것은, 습지였다. 토사로 틀어 막힌 고인 물에서는 거대한 석호가 생겨났다. 축축하고 더운 기후에 적응한 양서류와 파충류가 늘어났다. 인간도 다른 포유류도 서서히 밀려나며 과거의 생물들이 다시 지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트라이아스기가 '돌아온' 것이다.
케런즈는 그린란드에 있는 도시 버드 본부에서 태어났다. 유엔 군부대와 동행하며 생물학 시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년은 괜찮았다.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석호를 천천히 지나며 돌연변이 동식물들을 연구하고 군의관 노릇도 해 왔다. 최근에는 괜찮은 호텔 방에 숙소를 차리고 조용히 살고 있다. 그렇지만 변덕스러운 기후, 높은 기온, 계속해서 변하는 환경을 기록하고 조사한다고 무슨 수가 나는 것은 아니다.
▲ <물에 잠긴 세계>(제임스 발라드 지음,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펴냄). ⓒ문학수첩 |
자연은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시간을 거슬러 퇴화하는 것은 아니다. 40~50도까지 올라가는 뜨거운 날씨, 썩어가는 토사와 수많은 벌레들, 어디를 가나 있는 이구아나와 거대 도마뱀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높은 습도, 상승하는 기온, 영양 부족으로 힘을 잃어가면서도 물 위에 삐죽이 솟은 호텔 스위트룸의 침대 위에서 아득한 과거에 침잠하거나 파란 매니큐어와 초록색 마스카라를 덧바르고 드레스를 입는, 아니, 애초에 그런 식으로밖에 미칠 수 없는, 호모 사피엔스.
이렇게 천천히 수만 년 전의 무의식으로 침잠하고 있던 이들 앞에 스트랭맨이라는 하얀 사람이 나타난다. 어떻게 했는지 부하와 노예들 뿐 아니라, 악어까지 부릴 줄 안다. 케런즈, 바드킨, 비어트리스가 아득한 과거를 향해 미쳤다면, 스트링맨은 22세기에 걸맞게 미쳤다. 더러운 물속에 잠긴 도시를 약탈하려는 욕망을 가진 냉담하고 교활한 폭력배.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간이지만, 속물적인 본성마저 가려 버리는 석호의 물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스트링맨의 출현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물에 잠긴 세계>(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펴냄)는 1962년에 발표한 발라드의 '지구 종말' 삼부작 첫째 권으로, 간단히 말하면 세계가 물에 잠겨 멸망하는 이야기이다. 1964년에 나온 <불타 버린 세계>(이나경 옮김, 문학수첩 펴냄)는 세계가 말라붙어 멸망하는 이야기이고, 1966년에 나온 <크리스탈 월드>(김진경 옮김, 시공사 펴냄)는 세계가 결정화하며 멸망하는 이야기이다.
마치 인물들 사이에 대단한 갈등이나 사건이 있는 양 말했지만(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 소설(들)에서 인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멸망 그 자체이다. 발라드의 인물들은 인류의 멸망이라는 집합적 경험을 우연히 하게 된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온전한 '끝' 앞에 선 인간의 광기와, 그 광기가 수만 년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감각을 동시에 담아낸 이 시리즈는 과학 소설(SF)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시공간을 확장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그토록 쉽게 한가운데에 놓는 '호모 사피엔스'에게로 수렴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SF인 것이다.
<크리스탈 월드>가 소개된 이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발라드의 지구 종말 시리즈가 마침내 한국에 소개된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미국 작가 필립 딕 전집(폴라북스)이 나오고 있는 요즈음, 비슷한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광기와 시공간 왜곡, 팽창의 문제를 다루었던 발라드의 소설도 번역된 것 또한 실로 반갑고 재미있는 우연이다.
그럼에도, 아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말하노니, 이토록 중요한 과학 소설에 "공상 과학 소설"이라는 표현을 쓴 책날개의 소개와 이 각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과학 소설에 어울린다고는 백 보 양보해도 차마 말할 수 없는 키치한 표지는, 아쉽다. 정말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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