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6월 8일
며칠 전(6월 4일) 일기에서 1946~47년 연말~연초에 걸친 여운형의 평양 방문 이야기를 했다. 1946년 2월 이래 다섯 번째 이북 방문인데, 그의 주된 방문 목적은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과 여운형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여운형의 방북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박병엽(1922~1998년)의 증언이 1990년대 초에 나타났다. 북한에서 노동당 간부로 일하다가 1980년대 초부터 남한에 와 살던 박병엽이 제공한 방대한 증언은 1992~93년 나온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전2권, 중앙일보사 펴냄)의 주축을 이뤘는데 그 때는 '서용규'라는 가명으로 등장했다. 그가 작고한 후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에서 그의 증언을 채록하던 정창현과 유영구가 "박병엽 증언록"이란 이름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선인 펴냄)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선인 펴냄)을 엮어 냈다.
박병엽의 증언은 여운형의 방북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회고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넓이와 깊이를 가진 것이다. 정창현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의 "책을 펴내며"에 이렇게 적었다.
박병엽, 그는 남북 관계사에서 참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아직도 공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할 정도다.
그는 필자에게 지난 북한 현대사와 남북관계사 속에서 발생한 사건,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남겼다. 그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웬만한 조선로동당 문헌은 줄줄이 외고 있었다. 그 많은 당 대회, 당 전원회의, 당 정치위원회 회의 등에서 이뤄진 보고와 토론 내용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곡절 많았던 북한의 정치사 속에서 계속된 사상 투쟁과 검열 과정을 견뎌낸 결과라고 생각된다.
1990년대 초 그의 증언이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됐을 때 한 현대사 연구자는 그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증언이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사실과 상세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그의 경력과 증언이 과장됐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부분적으로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증언에는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과 문헌을 읽어 알게 된 부분이 간혹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1980년대 초반 서울에 왔을 때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던 통일부 전직 고위 간부로부터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이 책에 수록된 증언 내용은 대체로 1990년부터 1993년까지의 박병엽 선생과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에게 이때가 한국 사회에 나온 후 가장 정확하게, 활발히 증언을 하던 시기다. 그 후 북한 현대사 연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연구자가 접근하기 어려웠던 북한 내부 자료나 소련, 중국 등 해외 자료도 많이 공개됐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봐도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증언이 가진 정확성과 가치는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다. 물론 세세한 날짜나 일부 사실의 오류는 있다. 중요한 것은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이다. 특히 최근에 공개된 국내외 자료들은 그의 증언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 줬다고 본다. 이제 그의 증언의 활용과 검증은 온전히 북한 연구자들의 몫이다.
박병엽의 증언 내용이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에 맞는다고 보는 정창현의 관점에 공감한다. 관련 자료가 계속 발굴 중인 시기의 전체적 '그림'을 1990년대 초 시점에서 상상만으로 그만큼 그럴싸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운형과 이북 지도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상황을 세밀히 살펴볼수록 더욱더 수긍이 간다. 그는 여운형이 시종일관 자기 주견을 갖고 이북 지도부와 협력 관계를 모색한 것으로 본다.
여운형은 이남 내의 좌우 합작과 나란히 좌익 내의 남북 합작을 추구했다. 이북에서 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이북 좌익이 이남 좌익의 건전한 발전에 협조할 것을 그는 요청했다. 1946년 8월 이후 이남의 3당 합당이 박헌영 일파의 패권주의로 인해 난기류에 빠져들었을 때 그는 이북 지도부가 박헌영 일파를 견제해주기 바랐다. 그런데 북로당은 박헌영의 남로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남로당과 사로당 양쪽 준비위원장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양측의 대립이 완화되기 바라던 여운형은 북로당 지도부의 비협조에 절망감을 느끼고 1946년 12월 4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선언을 했던 여운형이 몇 주일 후 평양을 방문하고, 다녀와서는 근민당 창당에 나섰다. 이것은 남북 합작과 좌우 합작에서 종래 추구하던 것과 다른 새로운 자기 역할을 설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남 좌익 전체의 지도자가 아니라 비주류 좌익 지도자의 역할이다. 이남 좌익의 주류로 남로당을 인정하고 남로당 탈락자들의 이탈을 막는 좌익 예비대로 근민당을 만들어 범 좌익의 울타리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의 이 결정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대승적인 것이었다. 1946~47년 연말연초의 방문 때 김두봉과 김일성은 그의 살신성인 자세를 극구 찬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이남 좌익의 공식적 지도자는 박헌영이고 이북 좌익의 지도자 역할은 자기네가 맡고 있지만, 조선 좌익의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여 선생 당신이라고 치켜세웠을 것 같다. 박헌영 일파의 횡포에 당하기만 하도록 버려둔 여운형이 모욕과 고통을 무릅쓰고 뒷전에서 새 역할을 맡는 데 응낙하는 장면은 분명히 감동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다.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 하나에 이 감동적인 분위기가 비쳐 보인다. 박병엽의 증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여운형은 김일성의 사택에 머물면서 서울로 귀환하기 2~3일 전에 김정숙에게 "자식 일부를 이북에 맡기려고 하니 맡아 교육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여운형은 그 자신에게 가해지던 테러 위협과 자식의 장래를 고려해 그러한 결심을 한 것 같다. 서울에서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된 반면에 평양에서는 제반 개혁 조치가 실시되었고, 특히 새로운 교육 체계가 자리를 잡아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이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지금은 방학 중이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아이들을 평양으로 올려 보내겠으니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돌봐 달라"고 김정숙에게 말했다고 한다. 김정숙은 여운형의 부탁을 듣고도 선뜻 답변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운형 같은 거물 정치인이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자기에게 보낼 터이니 맡아달라고 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정숙은 여운형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고 몽양은 평양을 떠나기 전에 확답을 달라고 하였다. 여운형이 간절한 청을 알게 된 김일성이 몽양에게 "맡겨 달라. 마침 북조선에서 학생들을 선발해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내고 있으니 그 편에 딸려 모스크바로 보내 제대로 공부시키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여운형은 "아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새 조국 건설에 기여하는 재목으로 키워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1947년 3월에 이북에서 사람이 내려가 여운형의 두 딸과 아들을 평양으로 데리고 왔고 그해 7월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다. 여운형의 자녀들은 4~5개월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에 김일성의 사택에서 김정숙의 보살핌을 받았다.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 182~183쪽)
이이들의 신변 위협을 걱정해서 취한 조치로 보는 박병엽의 관점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 자신의 증언 중 이런 대목에 나는 주목한다.
여운형은 네 번째 방문 기간에 김일성의 처 김정숙의 안내로 만경대혁명학원 건설 현장과 만경대 인근에 있는 조촌의 임시 혁명유자녀학원의 교육현장을 둘러보았다. 이 학원의 초창기에는 항일빨치산 여대원 출신들이 학생들을 돌보았는데 김정숙은 이 학원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만주 등지에서 부모를 잃은 빨치산 자녀들을 이곳에 데려다 교육시키고 있었다. 이 학원은 간부들의 자제라고 해서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직계 가족 중에 항일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숨진 사람의 아이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당시에 북조선로동당의 중앙당학교가 개교되었는데 여운형은 이곳도 방문하였다. 건설 공사에 착수한 김일성종합대학 건설 현장도 둘러보았다. 여운형의 김일성종합대학 건설 현장의 방문에는 주영하 또는 임해가 수행했던 것으로 안다. 임해는 북로당의 대남관계 책임자로서 항일빨치산 시기에 최용건 부대에 소속되어 지하공작사업을 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북에서 혁명열사 유족 지원 사업을 이미 벌이고 있는 것이나 민족대학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여운형에게는 미군정 치하의 이남과 대비되어 매우 바람직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식들을 김일성 부부에게 맡기겠다는 것은 구체적 이득이나 안전을 위한 것이기에 앞서 민족주의적 정책 방향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나타내는 제스처로서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평양의 지도자들과 자신 사이의 인간적 신뢰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여운형이 자녀들을 평양에 보내고 몇 달 후 암살당하는 장면을 보며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상국 오자서(伍子胥)의 생각이 난다.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제나라와 대결하고 싶어 했는데 오자서는 이에 반대했다. 그래서 부차는 오자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무리한 사명을 주어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 때 오자서는 동행했던 아들을 오나라 대부 포(鮑)씨에게 맡겨두고 돌아왔다.
오자서의 반대자들은 아들을 제나라에 남겨둔 것이 불충한 마음 때문이라고 공격했고, 부차는 제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했다. 오자서는 극한적인 방법으로 이에 반대하다가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다. 왕의 횡포로 아비와 형이 죽임을 당할 때 복수를 다짐하고 망명해서 오나라에 온 것이었다. 당시 오나라는 문명 수준이 낮은 신흥 국가였는데 오자서가 합려(闔閭)가 왕에 오르고 국력을 키우는 것을 도와주어 강대국이던 초나라를 무찌르게 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복수도 행한 것이었다.
오나라는 초나라를 무찌름으로써 강대국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얼마 후 합려가 월나라와의 싸움 중 죽었다. 월나라는 오나라 배후에서 일어난, 문명 수준이 더 낮은 나라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가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를 격파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월나라 왕 구천(句踐)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오자서는 이에 반대했지만, 부차는 월나라를 없애기보다 복속시킴으로써 오나라의 세력을 더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차가 월나라를 격파할 때까지 편안한 잠자리를 삼갔다 해서 '와신(臥薪)'이라 하는데 구천도 항복 후 겉으로는 복속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복수를 기약하며 맛난 음식을 삼가는 '상담(嘗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차는 구천이 뭘 먹고 사는지 신경 쓰지 않고 오나라의 위세를 키울 생각으로 중원의 강국 제나라를 넘보고 있었다. 오자서는 월나라의 후환을 지적하며 섣부른 중원 진출에 반대한 것이었다.
결국 오자서가 죽은 후 부차는 중원으로 출정했고, 구천이 그 틈을 타 오나라의 본거지를 유린했다. 황급히 돌아온 부차가 싸움에 지고 자결하면서 오나라가 사라져버렸다.
오자서가 아들을 제나라에 두고 온 일은 <사기>에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뿐,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 '인질'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고대의 인질에는 '상주 외교관'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오자서는 신흥강국인 오나라가 군사력만으로 위세를 키우기보다 선진문명 접수에 치중해서 문명강국으로 자라나기 바랐고, 문명 선진국인 제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바라는 뜻에서 아들을 제나라에 두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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