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양동면 계정리의 뒷산에서는 근일에 이상한 흰 흙이 난다는데 그 마을 가난한 농민들은 이것을 퍼다가 조(粟)와 섞어서 떡을 만들어 밥 대신에 먹고 사는 사람이 오백여명이나 된다 한다. 이 말을 들은 양평 경찰에서는 그 흙을 도청 위생과에 보내어 그 성분을 시험해보는 중이라는데 이것을 먹고사는 사람의 말을 듣건대 상식(常食)으로 하여도 아무 별 탈이 없으며 맛이 좋고 조만 먹는 것보다 더 오래 노동에 견딜 수 있다더라. (<중외일보> 1927년 6월 8일자)
'흙 파먹고 사느냐'는 표현은 단지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셈이다. 우리말에는 이렇게 언중의 슬픈 역사들이 녹아있다. 식민지 시기는 그런 상황이었다. 흙을 먹고 연명하다가 더 버틸 수 없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토막(土幕)집, 움막집에서 '마치 구더기처럼' 우글거리면서 살아가야 했다.
그런 조선인들에게 총독부는 웃음을 요구했다. 더 이상 식민지 조선의 가난과 절망 불안 항의 등 우울하고 어두운 현실을 그리지 말아라, 명랑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해라, 또 그렇게 살아가라. 명랑하라, 명랑하라. 1930년대 불온한 조선을 '소독'하기 위해 총독부는 '명랑'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한 보기로 1930년 채동원의 '아리랑'이 금지되는데 곡조가 너무 애상적이고 회상적이라는 것이 이유로 되어있다. 이런 이유라면 '풍속 괴란'이 되어야 할 텐데 '치안 방해'로 구분되어 있어 의아하다. 이 노래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과 유관한 듯하다. 독재 권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바, 사람들이 군집하는 합법적 장소인 극장에서 '불온'한 노래를 불렀다는 의미에서 '치안 방해'로 구분했을 터이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명랑까지 강요하다니.
하지만 조선사람도 조선사람 나름이었다. 식민지 상황에서도 근대화는 이뤄졌으니 극소수지만 큰 돈 벌 기회를 잡은 계층도 있었다. 그들에게 식민통치는 더없는 기회였고, 경성은 식민지라기보다는 그저 매혹적인 도시였다. 그런 소수의 조선인들에게는 도시 생활, 명랑한 삶이란 총독부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 감각에 걸맞은 일이었다. 예컨대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묘사된 '윤 직원' 집안은 그런 계층이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 뒤 '런치'를 맛보고, 중일전쟁 뉴스 영화를 구경 가는 생활.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은 실업자였다. 아내의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도 어디에 써야 할 줄을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국외자, 자발적 소외자였다. 그런 인물이 결말에서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현재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날개야 돋아라, 한번만 날아보자' 외친다. 양극화가 시작되던 조선의 상황, 즉 대다수의 절망 속에 영위되던 극소수의 도시적 명랑한 삶에 대한 비판의식이 아이러니로 표현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런 절망감일랑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이 명랑의 요구였다. 검열 권력은 이제는 단순하게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문화 정책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하고 그 길로 나아가라 강요하는 데 이른 셈이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의 사회적 에너지가 강력하게 남아있던 1920년대에는 그 에너지를 검열을 통해 적절히 관리하는 데 주력했다면, 1930년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만세운동의 에너지는 점차 소진되었고 특히 만주 침공을 계기로 조선내의 식민 권력에 대한 비판 여론은 급격하게 누그러졌다. 더욱이 1937년 중일전쟁 이후는 제국이 승승장구함에 따라 조선에 '명랑'을 강요하는 일 또한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검열은 선전과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그들의 규제 역시 금지에서 권장으로 이행한다.
1908년 '신문지 규칙'에서는 "일한(日韓) 양 황실의 존엄 모욕, 치안 방해나 풍속 괴란, 형사피고인 혹은 범죄인(주로 항일 운동가를 뜻한다-인용자)을 비호하는 사항은 신문에 게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1937년에는 "황실 기사는 지면의 상단에 게재하고 오탈자가 없도록 해라, 정중하게 취급하고 크게 보도하고 가능한대로 사진을 함께 실어라, 총독 총감 등의 발표 사항은 빠짐없이 보도해라" ('언문신문 지면개선 요항(要項)') 하는 식의 서술이 크게 늘어난다. "말라, 말라, 말라"는 이제 "하라, 하라, 하라"로 바뀌는 것이다. 이에 부응하여 한국 신문의 보도 자세가 변해갔던 것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그 이후 동아 조선일보 등에서 '일군(日軍)'이라는 단어 대신에 '아군(我軍)' '황군(皇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승전보'를 대서특필했다. 신문사 주최의 야유회와 연주회 광고는 늘어나는 반면에 흙 파먹고 연명해야 했던 사람들의 기사는 외면되었다. 지면은 '명랑'해진 것이다.
대중가요의 영역에서 '명랑'은 '국민가요' 또는 '가정가요'라는 이름으로 강제되었다. 가요정화운동과 국민 개창(皆唱) 운동을 벌였으니, 명랑하고 건전한 노래만 골라서 모든 국민이 매일 애창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황국신민임을 자각하고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나 후방 보급자로 나서되, 국민가요를 명랑하게 부르면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일제 청산은커녕 일제 승계를 한 셈이니, '명랑'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좀 쑥스러웠는지 이름만은 '건전'으로 바꿔치기 했다(국민에 의해 '금지어'가 되면 용어를 바꿔치기하는 단골수법이다).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상에서 '잘 살아보세'를 발표하고 널리 보급했다. 박정희가 직접 작사했다는 '새마을 노래'나 '나의 조국' 같은 노래도 마찬가지,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애국가에 이어 이 노래들이 꼭 방송되었다.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대통령 찬가'는 박정희의 '나의 조국'과 나란히 1976년 애국가요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목월과 김성태 콤비는 이미 이승만에게도 '우리 대통령'을 바친 바 있으니, 이 둘은 '청와대 전속 작사·작곡가'로서 '용비어천가'를 만드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셈이다.
▲ 가수 김민기의 앨범 재킷. ⓒ프레시안 |
권력은 골치 아팠다. 금지곡 목록은 실제로는 권장가요 목록처럼 되어 버렸으며, '건전가요'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별 인기를 얻지 못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억지 춘향'도 못한다는데, '억지 노래'가 제대로 되겠는가. 쿠데타에 독재로 일관해온 권력의 극단적 '불건전' 속에서 국민들에게만 건전하라, 건전하라 요구하는 것이 어찌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장발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서서 저항의 표식이 되어 버렸고, 믿거라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금지곡을 부르곤 했다. 심지어는 광우병 정국 때 '가카'까지도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서 '아침이슬'을 들었다고 하니, 그답게 뜬금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 시절 금지곡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건전가요'에 자생력이 없으니 권력은 '끼워 팔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대는 모든 음반을 낼 때, 맨 앞이나 맨 뒤의 노래는 '건전가요'(또는 군가)를 한 곡씩 끼워 넣도록 했다. 음반의 통일성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지만 물론 그들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권력자에게 예술, 특히 대중예술 정도는 발가락에 때만도 못한 존재였으니 언제나 마음껏 짓밟아도 좋은 대상일 뿐이었다.
신문에도 중요한 시기 중요한 지면마다 건전기사 순화기사 새마을 기사를 끼워 넣어야 했다. 영화관에서도 '끼워 팔기'는 있었으니 본 영화 시작 직전에 상영된 대한 뉴스였다. 식민지 시기 총독부의 역점 사업 중 하나였던 '뉴스 영화'의 부활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1994년까지 유구하게 지속된 이 정권 홍보물은 민주화와 함께 폐지되었다.
일제 시기부터 독재 시기까지 유구한 전통을 지닌 대한 뉴스는 얼마 전에 '대한 늬우스'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바꿔 부활되었다. 역시 이명박 정권의 작품이다. 4대강 사업을 코미디 형식으로 홍보한다나 뭐라나. 굳이 코미디 형식을 빌리지 않아도 4대강 사업은 이미 블랙 코미디인데, 무엇하러 또 웃겨주겠다는 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막장 아이디어를 '가카'께서 친히 제안했다고도 한다. 정말 가지가지가 아닐 수 없다.
▲ 2009년 극장에서 부활했던 '대한 늬우스'. |
하지만 수용자들은 '텅 빈 가죽주머니'가 아니다. '건전'을 강요하는 권력에 나름대로 대응했다. 음반 맨 앞의 건전가요는 뛰어넘었고, 마지막 곡의 전주곡만 시작되면 꺼버렸다. 영화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대한 뉴스가 끝날 때까지 휴게실에 앉아 있다가 뉴스 끝나는 시그널이 울리면 우르르 들어가는 관객들이 많았다. '땡전 뉴스'가 나오던 전두환 정권 때는 9시 5분쯤에야 텔레비전을 켜기도 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즉 '노가바'이다. 널리 알려진 노래의 가사를 수용자들의 세계관에 걸맞도록 바꿔서 부르는 노가바는 70~8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예컨대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의 가사는 "유신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언제나 긴급조치 좋아했지(중략) 그 어느 날 궁정동에서 총 맞았지 / 세상에서 제일 믿던 재규에게"로 바꾸어 불렀다. 광주 학살 직후에는 군가 '멸공의 횃불'을 바꿔버렸다. 마지막 대목만 보자면, "전우여 내 조국은 내가 지킨다.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에서 "전우여 내 민족은 내가 죽인다, 멸민(滅民)의 깃발 아래 대검을 간다"로.
'건전가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기를 모았던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도 노가바의 대상이 되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에 이어서 '돈 있으면'이라는 후렴을 넣어 부르는 것. 기막힌 재치요 풍자이다. 강제된 것도 아니고 '명랑'도 '건전'도 아닌 공격적 웃음, 즉 풍자였다. 이런 노가바 134곡을 모아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는 '노래는 멀리멀리'(2007)를 펴낸 바 있다.
노가바는 자기표현의 욕구는 강력하지만 아직 그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형식을 만들어내지 못한 계층이, 낡은 형식을 비틀어 거기에 자기표현을 담는 방식으로 일종의 패러디이다. 양반의 평시조를 활용해서 엇시조 사설시조 등의 평민문학으로 나아가던 조선 말의 장르 변화도 이 같은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패러디는 점차 독립된 나름의 형식을 갖추는 쪽으로 나아가게 마련인데, 70~80년대 노가바 역시 노찾사 등으로 대표되는 민중가요로, 즉 말하고자 하는 뜻과 걸맞은 나름의 독립된 형식을 만들어나갔다.
요즘 고등학생들에게도 노가바는 대유행이라고 한다. 작곡을 할 능력까지는 없지만 노래를 좋아하고 또 항변할 거리가 많은 학생들로서는 당연한 문화현상이리라. 그 중에 참 우울한 노가바가 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왜 태어났니'라고 바꿔 부른다는 것이다. "얼굴도 못생긴 게", "인구도 많은데", 또는 "공부하러 났니" 등 다양한 패러디가 존재한다. 물론 재미와 농담을 곁들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섬뜩하기도 하다. 유신 독재 시기에도 삶과 탄생 자체를 부정하는 노가바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강요받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식민지 시기부터 독재 시기까지 대한민국의 최근세사는 암울했다. 암울한 세상을 암울하다 말하는 발언은 검열하고, '명랑'과 '건전'은 끼워 팔기를 했다. 영화 <웃음의 대학>을 통해 검열 권력이 웃음을 박멸하고자 했음을 보았거니와(☞관련 연재글 바로 가기 : "웃지 마! X바!"), '명랑한 웃음'은 장려하고 강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눈물도 마찬가지였다. 흙을 파먹고 살아야하는 처절한 현실과 피눈물은 삭제했지만, 총후미담, 군국미담의 눈물은 상찬하고 장려했다(☞바로 가기 : 육탄십용사, '날조'로 탄생한 신화!). 비판이 거세된 웃음, 공격성이 없는 웃음, 명령에 따라 웃는 웃음은 권력이 '보시기에 참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 요구에 굴종하지 않았다. 몰래 숨어서 부르고, 노가바를 만들어내고, 강제된 '명랑'과 '건전'을 뛰어넘어 버리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눈물과 웃음이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이고, 아무리 무소불위한 권력이라 하더라도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왜곡되고 억압당했던 눈물과 웃음은, 어떤 계기를 만나면 분노와 항거로 이어져 권력을 타도하는 에너지로 기능한다. 그래서 맹자는 이렇게 말했나보다.
"권력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도 같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어 엎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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