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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김재연을 보니 스피노자가 떠오른다!

[철학자의 서재] 네그리의 <전복적 스피노자>

아! 민주주의여!

통합진보당은 5월 2일 비례대표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총체적 부실, 부정 선거였으며, 당의 근본적인 쇄신이 불가피하다"고 발표했다. 비당권파는 당선자 사퇴론과 당권파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당권파는 진상 규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당권파는 진상 규명론을 주장하면서 당선자 사퇴론을 거부하고 있으며 비당권파는 당선자 사퇴를 통해서 당의 쇄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피노자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안토니오 네그리가 <전복적 스피노자>(이기웅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해석하는 스피노자의 정치사상, 즉 민주주의는 정부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의 표현으로,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로,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는 절대적이며, 따라서 권능에 대해서 저항적이고, 따라서 힘의 표현이며, 따라서 구성적 행위이고, 따라서 전복적 행동이다."(6쪽)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비례대표 후보 경선의 부정 선거는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정치적 행위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율적 주체의 행위를 통하여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부정 선거에 의하여 자율적 주체는 삭제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권능(potestas)과 힘(potentia)을 구분한다. 권능은 사물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고 힘은 실제 행위로써 사물을 생산하는 힘을 의미한다.

▲ <전복적 스피노자>(안토니오 네그리, 이기웅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이렇게 본다면,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권능은 있지만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힘은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즉, 권능은 있지만 힘을 상실한 상태가 통합진보당의 현실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조건(conditio)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구성(constitutio)이 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자율적 다중의 힘만이 집단적 구성 과정의 산물인 권력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중의 힘에 의해 민주주의는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의 사태는 열림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폐쇄하고 있다. 부정 선거를 통한 당선이라는 결과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자율적 다중의 힘을 억압하고 있다. 권능의 양상인 권력, 즉 부정 선거를 통한 당선이라는 권력을 실체로 간주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율적 다중의 집단적 구성 과정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한숨을 쉬며 불러본다. 아! 민주주의여!

자율적 존재의 자기현시(l'auto-exposition)의 부정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율적 "존재의 자기현시(l'auto-exposition)"가 부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집단의 힘을 통한 구성적 진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만일 두 사람이 힘을 모으는 데 뜻을 합친다면 그들 둘은 각자 서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더 강한 힘을 갖게 되며, 따라서 자연에 대해서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된다. 서로 합치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수록 그들 모두는 함께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된다." (<정치론>, 2:13)

결국 스피노자에게 자연권(jus naturale)은 힘의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일반적 형상으로서 힘(potentia)은 모든 특이자들의 노력(코나투스(conatus))을 자기 자신과 세계를 생산하려는 충동으로 개념화하는 것을 떠받쳐주면서 욕망(cupiditas)으로 표현된다."(37쪽)

이러한 맥락에서 부정 선거는 존재하는 것들의 힘과 코나투스를 억압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생산하려는 욕망 또한 억압하는 것이다. 존재론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 이번 부정 선거이다. 따라서 부정 선거를 통한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은 통치권의 무소불위와 자연권의 초월적 양도라는 부르주아적 환상과 개념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들이다. 스피노자 시각에서 보면 통치권과 권력은 다중의 힘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진정한 권력의 무소불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대중의 합치된 힘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관건은 부정 선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행위라는 것에 의견을 합치하는 이들이 "얼마만큼의 힘이냐에 따라 오직 그만큼의 권리를"(Tantum juris quantum potentiae)(<정치론>, 5장) 확보할 수 있을 때만이 진정한 권력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에게 정치는 다중의 사회적 힘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것이 절대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부정 선거는 '정치'의 상실, 민주주의의 폐지를 의미한다.

절대적 민주주의를 위하여

정치를 상실한 현실에서 우리들이 복원해야 할 것은 여전히 민주주의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의 16~20장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로서의 '절대 권력'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였다. 즉 "민주주의는 온갖 형태의 미신(superstitio)과 모든 실제적인 종교의 신비주의적인 역할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고 모든 개인이 자신의 힘의 표현으로 갖고 있는, 그리고 결코 양도될 수 없는 자연권의 발전이며, 민주주의는 두려움의 제거뿐만 아니라 더욱 높은 형태의 자유의 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53쪽)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완성하지 못한 절대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그렇다면, 절대적 민주주의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민주주의에 대해 속성(attribute) 역할을 하는 '전적으로 절대적'(omnio absolutum)이란 개념은 힘의 일반적 지평으로서, 그것의 발전 및 현재성이다. 즉, 자신을 구성하는 힘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더 열리는 현실이다. 여기서 "'절대'와 '힘'은 서로에게 동어반복적인 술어이다."(72쪽) 힘은 집단적 실존과 그 운동의 토대이다. "따라서 절대는 고유한 본질로서의 힘이며, 힘의 실현 결과로서 실존이 된다."(72쪽) 나아가 절대성의 개념이 힘의 개념에 귀결된다는 것은 "힘이라는 용어와 자유라는 용어는 중첩"된다는 것이다(73쪽).

결국 힘의 표현만큼 그만큼 자유를 확장할 수 있다. 나아가 힘은 지속적 운동이므로 스스로를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열어놓는다. 스피노자에게 이 과정은 완결되지 않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비종결적인 관계로 파악되고 "의지와 현실 사이의 순환은 닫히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87쪽)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나온 여러 제안들, 욕구들의 다수성의 계속적인 충돌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번 통합진보당의 사태를 비관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정치는 상이한 욕구들의 끊임없는 충돌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열려 있는 운동으로 이해함으로써 비관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양한 욕구들의 충돌이 충돌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율적 주체의 힘을 확장함으로써 자유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유를 향한 주체들의 "도의심"(pietas)이 바로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다.

윤리적 주체가 당면한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성

민주주의는 주체들의 구성적 힘이며 구성적 힘은 자유를 향하고 있다. 그런데 "도의심"(pietas)이 바로 절대적인 민주주의라는 것은 주체가 윤리적인 의미를 확보해야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 하면, 주체는 민주주의를 위해 "도의심"(pietas)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도의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이성의 인도 아래 생활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이다.(스피노자의 <에티카> 4장, 정리 37 주석 1) 나아가 도의심은 이성에 따라 도덕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도록 인간적으로 행해지는 관대한 행동", 즉 "존중심"(l'honnêteté)(98쪽)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선을 행하려는 도의심을 기반으로 하는 존중심에서 가능한 것이다. 즉 민주주의라는 보편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개별적인 것을 사랑하면서 오직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는 힘을 지니지 못하며, 오히려 전적으로 무력해진다."(98쪽) 개별적인 권력의 획득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대목이다. 개별적인 것을 사랑하는 이들은 도의심과 존중심 속에서 집단적 힘의 존재론적 기획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보존과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자유의 확장이 가능한 것이다. 이 또한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간절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스피노자에게 존재는 "고갈되지 않는 잠재성"이다(175쪽). 바로 주체가 자유를 향해 집단적 힘을 확장하는 잠재성으로서 존재할 때, 민주주의를 위해 열려있는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통합진보당에게 필요한 것은 "혁신의 기쁨, 욕망의 확산, 전복으로서의 삶"일 것이다(176쪽).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치사상은 "모든 형태의 소외에 맞서는 집단적 자유를 위한 주장"이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모든 기생적 잔존을 발라내는 날카로운 메스이다."(177쪽)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반대-권력(le Contre-pouvoir)에 맞서는 힘"일 것이다(177쪽).

통합진보당에게 현재성은 카이로스(Kairos)적인 시간성이다. 즉, 특이하고 삭제 불가능한 시간적 현재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시간성이다. 즉 이번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시간성은 개별적 사랑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라는 보편성을 사랑하는 윤리적 주체가 직면하고 있는 그러한 시간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주체는 바로 이 시간성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시간은 결코 삭제될 수 없는 시간성이다.

주체들이 갖는 "자유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쇠사슬로 얽어매는 모든 다른 형태의 권력 조직화", 그 위선을 폭로하고 "관료적인 경직성"과 "이데올로기적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치이다(180쪽). 이러한 정치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정치의 길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실존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의 가능성을 믿고, 현재의 사태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점에 절망하지 않고 위기를 절대적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로 받아들 때, 위기는 민주주의를 향한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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