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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소설가, <프레시안>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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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소설가, <프레시안>을 알았더라면?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이기영과 조명희 그리고 대안 언론

<웃음의 대학>의 미타니처럼 검열 자체를 소재로 삼았던 작품은 물론 한국에도 있다. 미타니가 식민지 시기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대라면, 한국에서는 직접 체험한 사람이 식민지 시기에 발표했다. 장편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이기영과 단편 소설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 그들이 남긴 검열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들은 절절하고 애통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문학 전공자들 중에도 그런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먼저 이기영의 단편 소설 '돈'. 소설가의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렸지만 병원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 끝내 아이는 그의 품 안에서 죽었지만 슬픔도 잠시, 장례비를 구해야 했다. 시신을 옆에 둔 채 밥상에 앉아 밤새 소설을 쓴다. 애비가 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글쓰기였으니까. 새벽에 탈고해서 친구 편에 원고료를 받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저녁 무렵에야 돌아온 친구는 어깨가 처져 있다. "자네 소설에 원고료를 주려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네." "아니 왜?" "검열에 통과될 가능성이 없다는 게야."

식민지 시기 출판을 위해서는 모든 원고는 먼저 검열을 통과해야 했으니,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노릇이었다. 상품화되지 못할 재료(원고)에 비용을 지불할 자본은 없다. 근대로 이행하면서 모든 예술가는 시장에 의존하여 생존하게 되었지만, 그 시장은 결코 따스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식민지에서는 권력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면서 유통되는 시장이었다. 작중 소설가는 결국 친구가 어렵게 구해온 돈으로 조촐한 장례를 치른다. 국가와 시장이 모두 외면할 때 그가 기댈 구석이라고는 그저 '(상호)부조'라는 공동체적 제도뿐이었던 것이다.

▲ 소설가 조명희(1894~1938년).
조명희의 단편 소설 '땅속으로'도 비슷하다. 주인공이면서 작중 화자인 소설가는, 부모가 맺어 주는 대로 일찍 결혼하여 정이 없는 조강지처와 아들을 시골에 남겨 두고 서울에서 혼자 살아간다. 노부모는 이 꼴을 보다 못해 어느 날 처자식을 서울로 올려 보낸다. 갑자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소설가는 시집 원고를 넘기고 선인세(先印稅) 20원을 받아 수저와 그릇과 장작 등 살림 밑천을 장만한다. 얼마 뒤 잔금을 받기 위해 들른 출판사에서 소설가는 뜻밖의 말을 듣는다. 원고는 불온하다고 압수되었고 곧 작가를 소환하게 되리라는 것. "그렇지 않아도 말썽이 될 만한 것은 다 빼었는데 무슨 이유로?" "글쎄 아마 미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먼저 받아간 돈은 돌려주셔야…" 소설가는 황급히 내뺀다.

검열 이전에 미리 말썽이 생길 것은 모두 빼는 자기 검열을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명희라고 검열 제도를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고, 더구나 돈이 급한 상황이었으므로 더욱 검열 통과 가능성에 유의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통과. 그 이유는 '미워서', 즉 그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루쉰이 이름을 200여 개나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비슷한 블랙리스트 제도였다. 조명희는 절망한다. 그리고 연해주로 망명한다. 더 이상 조선에서는 문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 소설가 이기영(1895~1984년).
이기영과 조명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검열이란 단지 권력에 의한 강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들을 더 강력하게 옭매었던 것은 오히려 자본의 힘이었다. 발표 지면과 원고료라는 두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문인들도 먹어야 사는 것이니, 원고료는 쥐 꼬리만한 것이긴 하지만 생계에 적지 않게 보탬이 되었다. 아들의 장례비를 벌기 위해서, 처자를 연명시키기 위해서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는 소설을 쓰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원고료와 발표 기회를 제공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당근과 채찍이었다. 이에 비해 총독부의 무기는 주로 '검열 불통과'라는 채찍일 뿐이었다.

물론 총독부는 바보가 아니다. 1920년대 말부터는 '당근'을 마련한다. 문인, 연극인, 화가 등 문화인들의 단체를 만들게 하고 그 단체를 통해 당근을 배분했다. 각종 경연 대회를 주관하여 총독부 고관들의 이름으로 상을 주었는데, 물론 상금과 문화적 권위(소위 상징자본)가 주어졌다. 일본어 번역료를 지원해주기도 했고 징병이나 징용까지 유예해주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비슷했다. 예컨대 미술에서라면 식민지시기의 '선전(鮮展, 조선 미술전람회)'이 해방 이후 '국전(國展,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속되고 있다(도대체 '올해 최고의 미술 작품'에 왜 대통령과 장관의 이름으로 상을 주는가. 그 관료들은 그 미술 작품을 보기나 했을까. 아니 더 근본적으로 '최고의 미술'이라는 식으로 예술을 등급화하는 일 자체가 코미디 아닐까). 식민지 시기에 뿌리를 두면서 오늘에 이어지는 각종 문화인 단체들의 기원은 이렇듯 '불순'하다.

자본이 문학에 개입하는 현상은 작품이 구술되기보다 인쇄되기 시작한 근대 문학의 보편적 특성이다. 이는 문학의 유통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중에는 '담론 장(場)'이라는 문학적 광장의 확대 등 긍정성도 있지만, 자본과 권력에 의한 검열의 효율화라는 부정적 효과도 불러왔다. 인쇄하는 데는 돈이 들게 마련이고 이제 문학은 자본에 의존해서만 유통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인쇄물들의 운명은 그러하다. 담론의 유통에 돈이 들게 되었다는 점, 자본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는 점은 근대 담론 유통 체계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이며 문제점이다. 신문이란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말은 '신문쟁이들' 사이에서 오랜 경구였다. 즉, 기사와 광고는 같은 지면에 실리지만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경구는 식민지 시기 민간 신문에 넘쳐나던 일본 상품 광고를 합리화하기 위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사에서는 민족주의를 상찬하지만 막상 광고는 일본 상품으로 가득 차 있는 모순을 이렇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광고는 광고고 기사는 기사다, 돈이 있어야 신문도 발간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일본 광고는 받지만, 기사 논조에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던 것인가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또한 같은 지면에 인쇄해놓고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옹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전근대 시기 담론의 유통이나 근대 초기의 신문(<한성순보><한성주보> 등)에는 '아랫도리'가 아예 없었음과 좋은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근대로의 이행이란 무조건 발전이고 역사의 순리이기만 한 것은 아님을 입증하는 또 다른 사례이다.

최근 들어 미디어 시장의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담론 유통장에 자본이 개입하는 일의 부작용은 더욱 두드러진다. 예컨대 요즘 신문들은 '윗도리(기사)'와 '아랫도리(광고)'의 구분조차 불명확해졌다. 광고는 '윗도리' 속으로 돌출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사인지 광고인지 구별이 어려운 것들도 늘어나고 있다. 신문사의 논조에 맞지 않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나면 며칠 뒤에 유관 광고가 전면 광고로 실리게 마련이다. 기획 기사 중 많은 경우는 '기획 광고'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요즘 신문들은 '윗도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려고 기를 쓰며, 반대로 '빤쓰'를 머리 위에 얹은 채 대로를 횡행하기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편집국과 광고국의 구분도 모호해졌다. 광고국의 영업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편집국이 광고 수주를 지원하고 나서는 것이다. 요즘 언론사 편집국장들은 광고를 위해 열심히 뛴다고 한다. 모 유력 일간지의 편집국장은 2박3일 동안 편집국에는 얼굴도 내밀지 못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광고를 수주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왜 편집국장이 나서야 광고 수주가 잘 되나? 물론 기사와 광고를 맞바꾸기 위해서이다. 얼마어치 광고를 주면 어떠어떠한 기사를 실어주겠다는 협상을 하는 파트너로는 광고국보다는 편집국이 적합하다. 돈과 맞바꿔진 기사라? 이게 광고인가 기사인가. 길거리에서 7만 원 현금을 내밀며 신문 구독을 권유하는 풍경들은, 편집국에서도 비슷한 형국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서 자본은, 인쇄 비용 때문에 자신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던 인쇄물들의 자유와 정신을 억압한다. 아니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신문만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텔레비전에는 시청률이라는 저승사자가 있다. 매일 보고되는 시청률이 좀 떨어지면, 갑자기 여주인공이 목욕탕에 들어가거나 시어머니는 막장 발언을 해대야 한다. 시청률 때문에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면 프로그램은 중도하차하기 십상이니까. 그뿐인가. 간접 광고가 있다. 주인공은 갑자기 '철수' 표 셔츠를 입은 채 '네 별' 표 신차를 몰고 드라이브 나서야 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맑은물' 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야 한다. 우리는 그때마다 지갑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 순간 우리들은 정보의 수용자에서 상품 소비자로 존재의 전이를 강요받으니까(이러느니 차라리 시청료 제대로 내고 공영 방송에서 광고를 없애는 게 낫지 않겠는가).

▲ 최근 한 도넛 회사 간접 광고로 논란을 일으켰던 드라마 <더 킹 투하츠>의 한 장면. ⓒ문화방송


광고와 본방송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만 하면 되나. 프랑스의 한 방송인은 그렇지 않다고, 본방송이란 광고와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광고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한다. "광고 메시지가 인식되려면 시청자의 뇌가 비어있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시청자의 뇌를 비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광고 전후로 즐거움과 편안함을 줘야 한다. 우리가 코카콜라 사에 파는 것은 인간의 뇌가 비어있는 시간이다."(<검열에 관한 검은 책>(에마뉘엘 피에라 지음, 권지현 옮김, 알마 펴냄)) 이쯤 되면 무엇이 '본방송'인지, 정보의 대량 전달 체제가 자본에 지배된다는 점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구텐베르크 이후 라디오, 텔레비전 등으로 정보의 대량 보급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갔다. 그러나 기술의 개발과 이용에는 항상 돈이 든다. 그 돈을 누가 대고 누가 수익을 창출하는가, 돈을 대는 자본은 이윤을 위해 정보를 어떻게 검열하는가 등의 문제는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대중들은 늘 돈이 없으며, 자본은 돈을 늘릴 생각뿐이다. 그 사이에서 공동체를 위한 조정에 나서야할 국가 권력은 많은 경우 자본에 일방적으로 복무할 뿐이다. 특히 한국의 권력자는 영혼도 철학도 없는 자들이 많았으니 더욱 사정은 좋지 않다.

그러니 돈이 들지 않는(또는 적게 드는) 다양한 대안 언론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언론이나 팟캐스트,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1인 방송국 등이다. 인쇄 매체와 라디오·텔레비전이라는 기술에서 자본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던 문학과 언론은, 이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따라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구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앞으로 100년 동안 담론의 마당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언론과 문학이 그렇듯이, 식민 후기의 작가들 역시 권력과 자본에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이기영과 조명희는 검열 권력에게 완패한 모양새이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을 남겼다. 최소한의 저항에는 성공한 셈이 아닐까. 우리가 읽어주고 이기영과 조명희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그렇지 않을까. 검열관은 잊혔지만 소설은 남았다. 검열관의 목표는 결국 달성되지 못했다. '혀'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악전고투로 진전해왔다.


이기영과 조명희가 다시 살아와서, 인쇄 매체에의 일방적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언론 환경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반가워했을까.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가능한, 정보의 대량 유통 체제란 얼마나 그분들이 꿈꾸던 것이었을까. 돈을 적게 들이면서 '어린 백성이 제 뜻을 널리 펼' 수 있는 대중적 소통 기술이 있는 상황이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두 분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실 터이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100년 전의 천재들에게는 가장 절실하게 원하던 것이었다. 그 당연한 것을 가치 있게 향유해야 할 까닭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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