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대결의 기분으로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던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 어린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막 받아들인 사상을 '해체'하는 저서라니, 논파해야 할 대상으로 다가오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은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이었다. 특히 이 책의 제1장('헤게모니 : 개념의 계보학')과 제2장('헤게모니 : 새로운 정치 논리의 힘겨운 출현')이 그러했다.
이 장에서 저자들은 지난 100여 년간 마르크스주의 정치 실천이 부딪혔던 궁지를 솔직히 드러내면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고민거리들을 예리하게 짚고 있었다. 카를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조르주 소렐, 블라드미르 레닌, 안토니오 그람시 등의 위압적인 이름들이 이들의 신랄하고 시원스러운 이론-실천사 서술 속에서 자신들의 성취와 한계 그대로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해방감은 내게는 여전히 저항해야 할 무엇이었다. 1장, 2장의 논리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라클라우, 무페의 저 악명 높은 결론,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이어지는 것을 사정없이 공격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 책의 제3장('사회적인 것의 실정성을 넘어서 : 적대와 헤게모니')은 이런 막연한 혐의를 확신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장은 독자의 접근을 가로막는 난이도라는 점에서 <자본> 1권의 첫 몇 장에 버금간다. 1990년대 초반 당시로서는 너무도 낯설었던 자크 라캉,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의 논의를 바탕에 깔고 이들로부터 연유한 새로운 개념어들을 남발했기 때문에 범용한 독자의 적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그런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날카로운 문제 제기와 편향된 결론―이것이 그 당시 나의 판결이었다. 그리고 이후, 라클라우, 무페가 그람시 사상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곡해'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람시 사상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나의 주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람시의 유산을 라클라우, 무페 식 편향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을 과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첫 조우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라클라우, 무페의 이 문제작이 새 우리말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라클라우에게 직접 배운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의 이승원이 원저의 제목을 그대로 살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새 번역본을 낸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한 번 독서를 시도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시대의 변화와 나의 경험들이 지난 번 만남의 결론에 어떤 변화를 낳을지 나 스스로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지나친 철학적 언술 이면의 실천적 관심
▲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사실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해 대부분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조가 1930년대 파시즘의 승리를 정점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기획의 실패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라클라우, 무페의 경우는 그 반성의 각도가 프랑크푸르트학파류와는 사뭇 다르다. 훨씬 더 실천 지향적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 수고>에서 새 출발의 자양분을 찾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도 인용되어 있듯이, 아돌프 슈텀달의 <유럽 노동 운동의 비극>(황광우 옮김, 풀빛 펴냄, 1983년)이나 아르투어 로젠베르크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유럽 정치사>(박호성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1990년)의 문제의식을 이어받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두 고전적 저작은 모두 1930년대 유럽 좌파의 실패를 정치 전략 측면에서 성찰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주목받는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사실 이들의 문제의식, 특히 슈텀달의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3장은 역시 어려웠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자크 랑시에르가 대중적으로 읽힐 정도로 현대 철학에 바탕을 둔 논의가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제3장은 쉽지 않았다.
접합, 담론, 계기, 요소, 등가, 차이, 결절점, 적대, 모순, 인민적 주체 위치, 민주주의적 주체 위치 등등 라클라우, 무페만의 새로운 개념들이 범람한다. 논의 전개도 너무 사변적이고, 개념마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식의 친절함도 없다.
이 장은 이 책의 경이로운 성과이기도 하고 결정적 단점이기도 하다. 3장의 정치 이론은 아르헨티나 좌파 활동가로서 영국에서 알튀세 학파의 세례를 받은 담론 이론가 라클라우와, 벨기에 출신으로 그람시가 아직 영어권의 주목을 받지 못할 때부터 이탈리아어 그람시 연구 문헌을 모두 섭렵했으며 데리다의 해체 이론에 초기부터 주목했던 무페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결코 나올 수 없었던 희귀한 결과물이다. 이 정도의 혼종이 아니라면 도저히 등장할 수 없었을 복합적이고 독창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뼈대가 되는 이 제3장의 논의 방식 때문에 이 책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현학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포스트맑스주의?>를 통해 소개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출간 직후 영국 좌파 내 논쟁을 봐도, 논점이 너무 철학 쪽으로 흘러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 역시 1990년대 초의 독서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게 '담론', '등가' '접합' 따위의 알쏭달쏭한 신조어들이다.
하지만 이런 포스트모던 철학의 과잉 때문에 라클라우, 무페의 강렬한 실천적 지향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집필 의도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도서 목록에 이론서 한 권을 추가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저자들의 관심은 당대의 급박한 정세와 직결된 것이었다. 아쉽게도 이런 점이 이 책의 국내 소개 과정에서는 충분히 조명 받지 못했다.
1980년대 영국의 정치적 맥락
라클라우와 무페의 책이 영국에서 처음 나온 게 1985년이었다. 이때 영국 사회는 어떠했던가?
2년 전 1983년 총선에서, 결코 재집권하기 힘들 것이라던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노동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뒀다. 2기 대처 정부는 곧바로 전투적인 탄광노조와 일전을 벌였고, 이 싸움에서 영국의 노동 세력은 대패했다. 이후 영국에서 시장 지상주의로의 전환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좌파로서는 패배의 원인에 대한 분석 그리고 대처주의를 제압할 새 전략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치열한 토론이 시작됐다. 이 토론의 주요 무대 중 하나가 <마르크시즘 투데이(Marxism Today)>라는 저널이었다. 당시 영국 공산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유로코뮤니스트 분파가 창간한 잡지였다.
1983년 총선 전까지만 해도 영국 공산당은 사회주의적 구조 개혁 비전을 제시하며 토니 벤 하원의원이 이끌던 노동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총선 패배 후 당 내 일부, 특히 <마르크시즘 투데이> 편집을 주도하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등이 기존 입장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홉스봄은 차기 총선에서 보수당의 재집권을 막으려면 노동당이 벤 좌파의 좌경 노선을 버리고 중도 좌·우파 세력(당시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이라는 '제3세력들'로 대변되던)과 최대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한 마디로, 반대처(우리 맥락에서는 '반 이명박'이나 '반 새누리당'을 연상해볼 수 있겠다) 최대 연합 노선이었다.
홉스봄은 이러한 노선을 그람시의 사상을 원용해 정식화했다. 이때의 그람시는 반파시즘 인민 전선을 옹호하는 논리의 제공자로서의 그람시, 즉 이탈리아 공산당의 공식 이론가들이 해석한 그람시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강력한 지지자이고 그래서 영국 공산당 내에서 유로코뮤니스트 분파의 원로 역할을 하던 홉스봄에게는 그람시의 이러한 해석과 적용이 모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홉스봄의 문제 제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홉스봄의 반대처 최대 연합 노선은 1983년 총선 패배 이후 노동당에 들어선 닐 키녹 집행부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본래 당 내 좌파로 분류되던 키녹의 주도 아래 노동당은 이때부터 당 노선과 정책의 전면 재검토에 착수했고, 그 10년간의 여정의 최종 결론이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 즉 '제3의 길'이었다.
물론 홉스봄 자신은 블레어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반대처 최대 연합 노선이 노동당의 극단적 우경화의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람시의 대항 헤게모니 전략을 자본가 대 노동자의 대립 구도에서 노동자 세력이 그 중간 지대를 최대 포섭, 규합하려는 노력(즉, '인민 전선' 전략)으로 이해하는 이론적 입장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다른 논자들도 기존 노동당 좌파의 관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부상에 맞설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홉스봄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처주의의 분석이나 대안 전략의 방향에서는 의견들이 엇갈렸다. 홉스봄과 함께 <마르크시즘 투데이> 편집의 양대 기둥이었던 문화 이론가 스튜어트 홀만 해도 그랬다. 그 역시 대처주의를 분석하면서 그람시의 이론을 동원했지만, 홉스봄처럼 기계적으로 현대판 '인민 전선'을 처방하지는 않았다. 그가 보기에 현실은 훨씬 더 복잡했다.
라클라우와 무페도 바로 이런 흐름에 속해 있었다. 이들도 이 무렵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주요 논객들이었고, 크게 보아 영국 공산당의 유로코뮤니스트 흐름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홉스봄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좌파 혁신 논쟁에 적극 개입했다. 이들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이러한 개입을 이론적으로 총괄 정리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인민 전선' 같은 상투적인 계급 동맹 틀로(그 우경 버전이든 좌경 버전이든) 과연 새로운 좌파 정치를 사고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주목한 현재 진행 중인 정치 실험이 있었다. 1981년 지방 선거로 등장한 노동당 좌파 주도의 런던 시정부(GLC)가 그것이었다.
젊은 시장(정확히 말하면 런던 시의회 내 여당인 노동당 수장) 켄 리빙스턴이 이끌던 1981~1986년의 런던 시정부는 노동당 내 벤 좌파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단절적 혁신 지점도 있었다. 특히 지지 기반의 측면에서 그랬다.
켄 리빙스턴의 런던 시정부는 노동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던 노동조합 외에도 당시 막 '신사회 운동'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여성 운동, 환경 운동, 유색인종 운동, 성 소수자 운동 등의 지지를 받았다. 런던 시정부는 이들 운동의 참여자들을 시정에 직접 참여시켜 한편으로는 열렬한 지지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뜨거운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당시 사례에 대해서는, 서영표의 <런던 코뮌 : 지방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파 정치의 재구성>(이매진 펴냄)을 참고할 수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다름 아니라 이 런던 시정부 사례에서 새로운 좌파 정치의 단초를 보았다. 새로운 좌파 정치는 홉스봄의 주장처럼 단순히 기성 중간 지대로 스펙트럼을 넓히고 중심축을 옮기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전통 좌파와 노동조합 바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민주적 운동들과 함께 영국 사회의 정치 지형 자체를 새로 짜야만 하는 것이었다. 노동 운동 역시도 그 일부인(그 정해진 중심이 아니라) 광범한 민주적 운동들을 기반으로 대항 헤게모니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런던 시정부와 같은 시도들이 보편화, 본격화된 형태로서 새로운 좌파 정치를 구상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자면 단순히 계급 동맹 이론 정도로 이해되고 있던 그람시 사상의 좀 더 근본적인 재해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헤게모니'를 제목의 맨 앞에 내세운 거대한 이론적 기획이 시작된 것이었다.
역사 이론으로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러한 실천적 관심은 제3장의 난해함을 뚫고 만나는 제4장('헤게모니와 급진 민주주의')에서 다시 전면에 부상한다. 이 장에서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뜻밖에도 거대한 역사적 서사다. 이 서사에 마주한 뒤에야 우리는 3장의 번잡한 논의들이 모두 4장의 역사 재구성 작업을 위한 사전 정지(整地)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클라우, 무페가 3장에서 제시한 '헤게모니 구성체 이론'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 구성체 이론'과는 달리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관계들이 미(未)결정적이고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만 잠정적으로 고정된다는 헤게모니 구성체 개념은 오직 인류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과정이 시작된 '이후'의 현실에서만 작동한다. 그 과정이란 프랑스 대혁명을 출발점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다.
민주주의 혁명이 시작되고 확산되면서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간들의 주체 위치가 근본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군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구현되던 사회는 '군주 대 인민'이라는 격렬한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거친 뒤(자코뱅적 혁명 단계) 다양한 정체성들로 분열되고 또한 정체성들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도 않은, 중심도 없고 고정되지도 않은 "끝없는 질문 과정"(318쪽) 같은 것으로 바뀐다.
일단 이렇게 구체제의 고삐가 풀리고 나면 자유-평등의 논리가 모든 사회관계들로 끊임없이 확대-심화된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원리가 사회적 상상의 새로운 모체가 된다"(268쪽). 이제 모든 다양한 불평등 관계들이 '극복되어야 할 억압'으로 규정되고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그 변화가 추진된다. 이러한 격동은 이제까지 당연시되던 모든 사회관계들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보기에는 노동 운동도 이러한 민주주의 혁명의 확대-심화 과정의 한 계기다. 현대의 신사회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갈 필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까지 노동 운동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주의는 자코뱅적 혁명 단계의 '군주 대 인민' 구도를 대체하는 '자본가 대 노동자' 구도를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다른 사회관계들의 변화를 배치하려 했다. 그래서 민주주의 혁명의 확대 과정을 노동 계급이 중심이 되는 또 다른 자코뱅적 혁명으로 치환시켜 상상하게 만들었다. 저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 노동 운동이 민주적 투쟁들의 중심 역할을 하던 상황을 부당하게 특권화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노동 운동의 바로 그 기여로 민주주의 혁명이 더 확대되면 될수록 이런 해방관은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자본가 대 노동자'의 적대가 이미 모든 사회관계들의 중심에 있다는 시각은 현실의 다양한 투쟁들을 상상 속의 노동자 투쟁에 종속시키고 만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과의 괴리로부터 비롯된 반복적인 정치적 퇴행, 즉 경제주의, 노동자주의, 국가주의 같은 치명적 오류들의 원천이 된다.
라클라우, 무페는 계급투쟁을 근대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해방 정치 '일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바라보던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오히려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 계기에 대한 잘못된 일반화라고 비판하는 셈이다. 계급투쟁의 이론은 이제 다양한 민주적 투쟁들의 이론으로 '일반'화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새롭게 '일반'화된 시각을 통해서만 노동 운동도 다양한 민주적 투쟁들 속의 '한' 계기로서 자신을 제대로 자리 매김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라클라우, 무페는 자기들 나름대로 마르크스주의의 특정한 '일반화'를 추구한 것이다. 이들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곧 라클라우, 무페 방식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일반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 이런 식의 '일반화' 작업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 등의 최근 작업도 그들 나름대로의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 시도다. 라클라우,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1990년대 초의 표피적 비난을 넘어, 이런 작업들과 같은 선상에서 재평가 받아야 한다.
이런 재평가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 동안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지나치고 넘어갔던 구절들도 새롭게 눈에 들어오게 된다. 가령, 우리는 다음의 구절들을 통해 라클라우, 무페의 급진 민주주의 기획이 사회주의적 과제를 정치적 목표에서 지워 버리는 '제3의 길'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급진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기획은 사회주의적인 차원을 함의하는데, 수많은 종속 관계들의 뿌리가 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반드시 종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급진 민주주의 기획의 여러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305쪽)
"'시민권'이라는 제한적이고 전통적인 영역을 넘어, 민주주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적 권리들이 고전적인 '정치'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과 관련해, 이는 종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투쟁의 지형이다. 경제는 '사적' 영역이자 자연권의 장소이며, 이에 따라 민주주의의 범주를 적용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단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에 맞서 사회주의 이론은 시민으로서뿐만 아니라 생산자로서 사회적 행위자의 평등과 참여의 권리를 옹호하다." (315쪽)
"급진 민주주의 기획은, 앞서 지적했듯이, 반드시 사회주의적 차원―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기획은 이런 폐지로부터 여타의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제거된다는 관념은 기각한다. 그 결과 상이한 담론들과 투쟁들의 탈중심화와 자율성, 적대의 증대와 적대가 확증되고 전개될 수 있는 다원적인 공간의 구성 등은, 고전적 사회주의가 가지는 전혀 다른 이상들―물론 확대되고 재정식화되어야 하는―이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의 필수 조건이다." (326쪽)
이 모든 주장이 다 내가 주저 없이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신자유주의의 한 세대가 휩쓸고 지나간 뒤 남아 있는 현실 좌파 정치의 대부분은 '제3의 길'류의 잔해이거나 이들이 냉담하게 폐기해버린 과거 유산의 파편들뿐인 지금, 난 오랫동안 거리감을 느껴왔던 두 저자가 사실은 가장 가까운 동지들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드는 의문
하지만 동의의 정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결코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다시 읽기를 통해 이 책의 주장의 큰 줄기에 공감하면 할수록 새로운 의문이 솟아나고 또 다른 입장 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첫째는 자본주의 문제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베른슈타인류의 '진보' 개념을 배격함에도 불구하고 근대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단절점 하나를 제시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민주주의 혁명'이 그것이다. 민주주의 혁명의 출발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분명 결정적인 차이가 있고, 그 이후 시대는 민주주의 혁명의 부단한 확대-심화를 그 특성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 근대사에 이런 단절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가 아닌 둘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누락된 하나는 다른 아닌 '자본주의(-제국주의) 혁명'이다. 자본주의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과 거의 동시에, 서로 복잡하게 얽히며 전개됐다. 그래서 홉스봄과 같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중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이중 혁명의 한 축인 자본주의 혁명 역시 근대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며 이후 시대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으로 등장한 헤게모니 구성체가 또 다른 혁명, 즉 자본주의 혁명을 통해 어떻게 '특정한' 방향으로 굴절되는지, 지속적으로 어떤 가능성을 부여받으며 어떤 제약 아래 놓이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어쩌면 '민주주의 혁명 이후 시대'의 사회가 보이는 미결정성은 '자본주의 혁명 이후 시대'의 사회적 배치로 인해 끊임없이 '특정' 방향으로 결정되도록 하는 압박을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본주의 헤게모니 구성체는 '미-결정적'이지만 동시에 '특정' 방향으로 항상 '거의-결정적'이다.
주장의 요체는 이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처럼 기존의 사회 구성체 개념을 기각하더라도, 민주주의 혁명을 밑바탕에서 굴절/제약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존재는 헤게모니 구성체론(혹은 다른 어떤 방식의 대안적 이론이라도)에 민주주의 혁명과 같은 위상으로 (재)도입되어야 한다. 이런 (재)도입 없이는 왜 민주주의 혁명의 확대-심화 과정이 유독 자본-임노동 관계의 벽 앞에서 수백 년 동안 정체된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민주주의 혁명 이후'와 '자본주의 혁명 이후'의 이중 사슬로 근대사를 이해할 때에만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람시가 "토대와 상부 구조의 특정한 결합"이라 정식화한 '역사적 블록' 개념은 각 사회가 세계 자본주의와 연계하며 국민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특하게 형성한 '구체적 보편성'을 통해 그 사회를 파악하려는 시도였다(<그람시와 민족 국가>(리처드 벨라미 지음, 윤민재 옮김, 사회문화연구소 펴냄, 1996년)).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서 '민주주의 혁명 이후'의 측면만 부각한 라클라우-무페식 신그람시주의에서는 정작 그람시 사상의 종국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이 시도가 시야에서 사라져 있다. 그람시 사상의 '경제주의적 잔재'라는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역사적 블록'이라는 아이까지 버리게 된 셈이다.
둘째는 라클라우, 무페의 정치 전략 논의가 계속 방법론 수준을 맴돈다는 점이다. 이들의 논의는 기존 정치 전략의 맹점을 타파하는 데는 아주 시원스럽다. 하지만 시원함은 단지 거기까지다. 대안의 방향이 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30여 년 전 저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헤게모니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면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를 승인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바탕으로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해야 한다는 방법론은 제시하지만, 그 방법론이 지금 어떤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라클라우, 무페보다는 지젝에게 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둘 사이의 논쟁에 대해서는 라클라우, 지젝 등이 쓴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박대진 옮김, 도서출판b)을 참고하자.).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면 결국 사회관계의 여러 측면들 중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잡아 새로운 보편성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감행해야만 한다.
지젝 같은 이는 오늘날 그 '하나'가 다시금 계급투쟁,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 대 코뮌(노동-사회-생명-자연의 코뮌)의 투쟁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라클라우-무페식의 일반화 작업 '이전'으로 돌아가는 복고주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라클라우와 무페가 방법론으로만 제시하는 대항 헤게모니 투쟁에 '비로소' 돌입하려는 것이다. 바로 탈자본 투쟁을 중심으로 대항 헤게모니의 구축을 '감히' 시도하려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2000년에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제2판 서문'에서 "계급투쟁으로 돌아가라"는 목소리에 맞서 "헤게모니 투쟁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이 지침에 전적으로 찬동해야만 한다. "그렇소, 헤게모니 투쟁으로 돌아가야 하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 "오늘날 헤게모니 투쟁은 바로 계급투쟁이오."
물론 이게 라클라우-무페 이전의 그 '계급투쟁'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계급투쟁이 함축했던 것처럼, 자본에 맞선 어떤 삶들의 투쟁, 분명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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