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이 출간된다. 그리고 이듬해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도 출간된다. 뒤이어 2008년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김승욱 옮김, 마음산책 펴냄)가 세상에 나왔다.
▲ <신 없는 사회>(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
이렇게 종교 자유가 인정되는, 아니 정확히는 특정 종교 세력이 우세한 문화권에서 해당 종교에 반하는 주장을 펼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시대정신의 패러다임이 매우 느린 속도로 변하는 중이었는데, 그 변화에 유의미한 속도가 붙었다는 징후로 보는 것. <신 없는 사회>에도 나오지만, 세속주의는 종교주의에 밀려 오랜 세월 인문학으로부터 홀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세속주의 신념을 담은 책들이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은 전세 역전을 신호로 읽힌다.
또 다른 해석은 특정 종교(근본주의 개신교)의 세가 강한 최강국 미국의 위험 수위를 견제하려는 자정 작용의 발로로 지성계가 나섰다는 신호로 보는 것. 사회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나라가 미국이다.
위에 열거한 서너 권 가운데 최근 국내에 번역된 <신 없는 사회>의 질감은 다른 책과는 다르다. 논지야 비슷하지만 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반증하거나, 기성 종교가 범한 방대한 해악을 열거하면서 제도 종교의 독선에 통쾌한 카운터펀치를 날려서 평소 종교 스트레스에 시달린 반종교 성향 독자에게 후련함을 안기지도 않고, 무신론적 신념을 강화하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신 없는 사회>는 종교심이 지극히 낮은 선진국들의 실상을 조사해서 종교심이 강한 나라(대표적으로 미국)의 처지와 대비시켜서, 정상적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무신론적 세계관의 우월함을 드러내지만, 무신론적 신념을 강요하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 이 책은 종교를 다르게 정의하고 수용하는 스칸디나비아 문화권의 건강 지수를 객관적으로 드러낸다. 필 주커먼의 분석 대상은 종교적 전통은 존재하지만, 사실상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두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에 맞춰졌다. 책의 목적은 종교의 세가 약한 공동체가 오히려 제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주고, 비종교적 사람의 세계관이 어떤지 대담 내용을 통해 날 것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다.
신앙인이 역설하는 종교의 필요성은 종교가 공동체의 윤리를 지켜주는 버팀목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 죽음에 대한 불안을 달래고 생전에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단다. 그렇지만 현실적 데이터는 이 그럴듯한 주장과 정반대 결과를 내놓는다. 유엔 인간 개발 보고서나 <이코노미스트>의 '삶의 지수' 조사에 따르면, 기대 수명, 국민 총생산, 경제적 평등, 양성 평등, 보건 의료, 공무원 청렴 지수, 자선 행위 등 모든 지표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받은 지역은 비종교적인 나라(대개는 북유럽)로 돌아갔다. 반면 최강대국 이미지가 강한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경제적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로 조사되었다.
사후의 두려움이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도 사실과 정반대다. 저자가 만난 호스피스 간호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죽음을 앞두고 대다수 비종교인은 초연하게 죽음을 맞지만, 유독 겁에 질리는 쪽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생전 자기가 지은 죄의 대가로 지옥에 가게 될까봐 노심초사 한단다. 이에 반면 저자가 인터뷰한 대다수의 북유럽인의 사후 세계관은 간단히 요약된다. 예순여덟의 덴마크 남성(1938년생)은 암으로 사망한 아내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아래처럼 답했다.
-죽음에 대해 : "암도 자연의 일부니까. 생물학적인 현실이잖소.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 속에 존재하는 사악한 요소인 거지. 그러니까 그래요. 나는 종교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없어요."
-삶의 의미에 대해 : "내 생각에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기간도 충분히 긴 것 같아요." (…) 나는 '그리고 또 뭐? 그 다음에는 뭐가 있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 그냥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 불행한 삶이라 해도 삶은 삶이오. 불행한 삶이라 해도 긍정적인 면이 아주 많으니까."
<신 없는 사회>의 저자는 덴마크와 스웨덴에 종교적 전통은 매우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두 나라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으며 저자가 만난 그곳 사람들 상당수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고 답할 정도다. 그렇지만 국교가 달리 없는 미국보다 건강 지수가 훨씬 높은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종교를 '신학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문화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목차의 제목을 빌면 '문화적 종교'로 신앙을 생각한다. 때문에 누군가가 인격신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면 그건 매우 괴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종교는 대화의 주제도 되지 못할 만큼 극히 세속화된 나라지만 종교가 일종의 전통으로 수용되는 것이다. 매년 비슷한 시기에 제사를 지내는 한국 가정의 전통은 제사를 계기로 가족 회합을 하는 것이지, 먼 조상들을 진심으로 숭배하려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덴마크인과 스웨덴인 가운데 사후 세계, 예수의 처녀 잉태, 천국과 지옥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수가 지극히 낮을 뿐 아니라, 아예 대화의 화제조차 되질 않는다. 저자가 인터뷰한 상당수는 죽은 후 어떻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을 내놨다.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 "절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그걸로 끝이에요. 정말로."
- "내 몸이 분해돼서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가 될 겁니다."
- "벌레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나를 화학물질로 분해할 거예요."
- "썩죠. (웃음) 끝이에요."
이 책이 타깃으로 삼은 독자는 누구일까? 아마 저자가 사는 극성맞은 기독교 국가 미국인일 것 같다. 미국은 대통령 조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하느님에게 기도로 조언과 자문을 구했다고 공식 발표했고, 그 발언으로 대통령의 신뢰도가 높아질 만큼 현대적 신정 국가다.
저자는 그런 미국 독자에게 종교를 대하는 스칸디나비아의 관대한 태도, 즉 문화적 종교를 소개하고 싶었을 게다. 물론 두 나라는 조건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대응법이 같을 순 없다. 스칸디나비아의 비종교인이 종교에 악감정을 품지 않지만, 종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미국의 비종교인은 매우 반종교적 성향을 띠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미국을 지배하는 기독교에 전투적으로 대응하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해법 대신, 기독교가 문화로 받아들여져 유명무실해진 북유럽의 건강한 상태를 보여줘서 느리지만 기대 가능한 변화를 꾀한 것 같다.
그럼, 이 책을 읽는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저자는 한국을 비종교적인 국가로 꼽았는데, 미국이나 아랍권과 비교하면 그리 분류될 만도 하다. 하지만 한국도 대선 후보가 장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을 무릅쓰고 대형 교회에서 그 후보를 지지할 만큼 정교 분리가 위협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또 자기 결정권이 없는 학생에게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미션스쿨의 오랜 관행이 큰 사회적 문제(2004년 고등학생 강의석의 종교 자유 단식 시위)로까지 비화된 나라이기도 하다. 덴마크나 스웨덴 사람처럼 대처하기엔 종교 열성이 과도하며 실제 삶에 종교의 간섭이 지나친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미국처럼 구성원의 자발적 동참으로 하향식 종교주의가 아니라, 아직은 일부 지도자급 신앙인이 주도하는 상향식 종교주의가 지배하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는 틈틈이 자신의 종교심을 공개적으로 내비쳐서 지지율을 보호하지만, 한국은 "서울을 하나님에게 봉헌한다"(2004년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의 발언)거나,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무릎 기도를 하면(2011년 이명박 내외) 바로 비난이 쏟아질 만큼 하부 구조(!)는 건강하니 천만 다행이다.
저자의 의도야 뭐건 <신 없는 사회>의 또 다른 인상은, 책을 읽는 내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비종교 청정 국가들을 꼭 한번 순례하고 싶다 싶은 유혹을 뇌리에 남긴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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