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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차라리 잘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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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차라리 잘 망했다?!

[김성희의 '뒤적뒤적'] 윤효정의 <대한제국아 망해라>

중고교 시절 국사를 배울 때 궁금했던 것이 있다. 일제의 대한제국 합병 과정이 납득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500년을 이어온 나라가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벌이지 못하고 시나브로 먹혔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답답하고, 어쩌면 분했던 듯싶다. 그래서 개항 이후 한국 역사에 관한 책은 어쩐지 애잔해 피하게 되었다. 소설 <삼국지>를 수차례 읽으면서도 제갈공명이 세상을 떠난 후 촉 나라가 망해가는 대목부터는 자꾸 멈칫거리게 되던 그런 기분이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니 안타깝긴 하지만 나름 그림이 그려졌다. 쇄국 정책이니, 친러파-친일파 등의 내분,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그런 수준의 이해였다. 한데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인물과사상사 펴냄)을 보고 벼락에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준만의 평소 집필 방식에 충실하게 당시 신문 등을 폭넓게 인용한 책에 따르면 '일한 합병'이 발표된 1910년 8월 29일 경성은 평온했다. 아니 당시 경성에 머물던 일본인들의 축하 행진이 있었으니 조용하진 않았겠지만 조선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금산금수 홍병식, 황현 등이 비분강개해서 자결한 것만 부각한 교과서의 역사와는 사뭇 달라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면서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미 대한제국의 주권은 실질적으로 일제에 넘어간 상태였으니 '합병'이란 것이 문서에 도장 찍는 일 정도로 해석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시 제대로 된 언론이 없었으니 백성들의 반응을 축소, 왜곡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혹시 '누가 나라를 다스리든 그 놈이 그 놈'이라든가 '먹고 살기 힘든데 나랏일까지' 그런 심정이 대세였던 것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민심은 왜 대한제국을 떠났을까. 한동안 어지러웠다.

▲ <대한제국아 망해라>(윤효정 지음, 박광희 엮음, 다산초당 펴냄). ⓒ다산초당
윤효정의 <대한제국아 망해라>(박광희 엮음, 다산초당 펴냄)는 그런 의구심을 확인해 준 책이다. 원제는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로 헌종 때부터 대한제국 말기까지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이를 현대어로 옮긴 책제목이 약간은 선정적이 감이 있지만 원저가 역사책이라기보다 야담집에 가까운데다 당시의 민심을 담은 책 내용을 함축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적확한 감이 있다. 책에 실린 에피소드를 읽으면 '백성들이 정말 이런 소리를 했겠구나' 싶어서다.

철종 때 세도가 안동 김 씨 집에 연회가 있을 때면 고기와 술이 산과 바다를 이루었단다. 집안의 나귀와 말에게 장난삼아 약식과 약과를 먹였는데 이를 두고 "혜당댁(김수근) 나귀는 약식을 잘 먹고, 호판댁(김좌근) 큰 말은 하도 물려 약과를 안 먹는다"는 조롱 섞인 말이 나돌았단다.

뜻있는 이가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는 약식이 썩어 나, 가축이 사람의 음식을 먹어도 이를 말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풍년이 든 해의 겨울인데도 아래 백성들은 오히려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조정에 상소를 할 지경이었는데도 그랬다.

뿐인가. 철종의 장인인 김문근은 자신의 생일에 상평통보 스무 말을 지붕 위에서 길바닥에 뿌려 거리의 아이들이 아귀다툼을 벌였고, 대원군의 둘째 형인 흥인군 이최응은 7곳간에 쌓인 꿩고기와 동태가 따뜻한 날씨에 썩어가 악취가 풍기니 이웃에 나눠주자는 청지기의 제안을 듣고도 "너는 먹는 것을 좋아하느냐? 나는 모여 쌓이는 것을 좋아한다"며 거절했다. 권력층이 이 마당인데 무슨 애국이고 애족을 들먹일 여지가 있었을까.

매관매직으로 부자들을 수탈하는 수법인 '마다리' 이야기에 이르면 기가 찬다. 도의 감사가 부자를 불러 벼슬을 하게 되었다며 축하 인사를 건넨다. 이에 감격한 부자가 사례금 액수를 물으면 전 재산에 준하는 돈을 제시하고, 이에 놀란 부자가 고을 수령 벼슬을 마다(그만두다) 할 테니 이를 주선해 달라 애걸복걸하면 사례금을 반액이나 3분의 1로 낮춰 뜯어내는 수법이다. 교지 한 장 허비하지 않고 거액을 상납 받는 '묘수'가 요즘엔 어떻게 변형되었을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나라를 팔아먹은 지도층은 어땠을까.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파의 대명사 격인 송병준은 우시장 거간꾼과 주점을 하는 함경도 출신 천민의 자식이었다. 여덟 살 때 걸어서 상경하여 떠돌다가 어느 기생집 사동으로 있던 중 여기 출입하던 민영환의 눈에 들었고 민비의 장비(張妃) 제거 운동 때 공을 세웠다. 그리고는 우암 송시열 후손의 양자로 들어가 명문가의 후손입네 하고는 대신이 되어 대원군에 아부하다가 민비 일파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해 '노다 헤이치로'로 개명을 하고 일본어를 익혀 친일의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친러파, 친미파의 영수 이하영의 고속 출세기도 만만치 않다. 부산 연산상점의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알렌을 찾아가 취직한 뒤 영어와 서양 의술을 배웠고 귀국하는 알렌을 따라가 몇 년 머문 뒤 돌아와서는 영어가 능통하다는 이유로 스물아홉 나이에 외무아문 주사가 되었다.

민비의 병을 치료하는 공을 세워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고 그 2년 후에는 미국 주재 전권대사 서리에 임명되었으니 5년 만에 이룬 초고속 승진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에도 민비의 은총에 힘입어 한성부윤 등을 지내고 아관파천 후에는 친러 내각에서 외무대신, 법무대신을 두루 거친 그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그의 출세비결은 영어 한 가지"라 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영어 실력은 뛰어나고 볼 일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기 힘들었던 이는 이들만이 아니다. 일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 갖은 패악질을 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과 박영효, 아관파천 후 고종의 명에 의해 끌려가던 길에 일본 병사를 보고는 '우리를 뛰쳐나간 토끼처럼' 후다닥 뛰어 달아나서는 "구원을 청하노라" 외쳤던 내부대신 유길준 등의 행각은 '교과서'와 너무 다르다. 그러니 '백성의 눈으로 쓴 살아있는 망국사'를 보면 대한제국이 제목 그대로 더 일찍 망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이 책은 2010년 출간됐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쏟아지던 무렵 나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리 빛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안다. 일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망국의 원인을 찾는 듯한 내용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은 탓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준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는 둥 몇 줄 말고는 저자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부족하고, 언제 어떻게 쓰였는지에 관한 설명이나 책에 대한 평가가 보이지 않는 등 책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한 번 쯤 읽어둘 만하다. 방법론이나 사관을 찾을 수 없어 역사서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바닥 민심을 읽을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중국, 일본,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의 정체성을 논한 <다른 누군가의 세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를 쓴 패트릭 스미스는 아시아인의 역사의식으로 '향수'를 꼽았다. 일제 침탈을 '나쁜 나라 일본'의 역사와 강압에 의한 침략이라고만 보는 것 역시 일종의 '향수' 아닐까. 왜놈들만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평화로운 가운데 순조로운 발전을 이뤘으리라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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