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예정으로 추진되어 오던 미소공위 재개는 날씨 문제로 소련 대표단의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하루 늦춰져 21일에 이뤄졌다. 22일(목) 시작된 본회의의 이틀간 결정 내용이 월요일인 26일에 제9호 성명으로 발표되었다. 전 해의 제1차 회담에서는 무기 정회를 발표한 제8호 성명까지 여덟 차례 성명이 나왔었다. 제9호 성명은 그 뒤를 이은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 공동 성명 第9號
미소공동위원회는 서기 1947년 5월 21일 조선 서울에서 재개되었다. 공동위원회의 미국 대표는 아래와 같다.
수석대표 A. E. 브라운 소장, 대표 존 웨커링 준장, 동 L. J. 링컨 대령, 동 A. C. 번스 박사, 동 C. N. 조이너.
소련 대표는 아래와 같다.
수석대표 T. F. 쉬티코프 대장, 위원 M. C. 레베데프 대장, 동 G. F. 툰킨, 동 G. M. 발라사노프, 동 T. I. 코르쿠렌코 대령.
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는 1947년 5월 21일 덕수궁에서 개최되어 동위원회의 정식 개회를 보게 되었다. 남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은 이를 환영하여 개회사를 하였다. 소련 측 수석대표 쉬티코프 중장과 미국 측 수석대표 A. E. 브라운 소장도 각각 인사의 말을 하였다. 남조선 미군 사령부 관계자 군정청 조선인 각 부처장 및 조-미 신문기자들이 이에 참석하였다.
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는 1947년 5월 22일에 개최되어 소련 측 수석대표의 제의로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 사회 하로 진행되었다. 제1차 회의는 동 위원회의 의사 진행 방법 서기국 및 분과위원회 설치 등에 관하여 토의되었다.
공동위원회는 미-소 양측에서 각각 5명씩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될 것이 결의되었다. 동 위원회의 위원 중 사고가 있을 때에는 대리를 임명하게 될 것이고 동 회의의 의장은 매주 교체될 것이다. 동 위원회의 회의는 양측 대표의 상호 합의로써 공개 회의를 여는 이외에는 전부 비공개키로 되었다.
공위 협의는 제1단계에 있어서 모스크바 협정 제2항에 의하여 조선 임시 정부 수립 준비안에 국한될 것이다. 즉 이 안은 다음과 같다.
1) 임시 정부의 형태 구성 及 조직.
2) 정부 운영의 기초가 될 임시헌장의 기초.
3) 임시 정부의 정강의 기초
이상 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3분과위원회를 여좌히 설치함.
제1분과위원회 위원장 미측 번스 공사 위원장 소련 툰킨.
차 위원회는 민주주의정당 및 사회 단체와의 협의에 관한 제 문제를 분장함.
제2분과위원회 위원장 미측 웨커링 준장 위원장 소측 레베데프 소장.
차 위원회는 임시 정부의 형태 구성 임시 헌장 및 정강 문제를 분장함.
제3분과위원회 위원장 미측 조이너 위원장 소측 발라사놉흐.
차 위원회는 임시 정부 인사 임명의 방법 급 임시 정부에 권한을 이양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를 분장함.
공동위원회는 동 위원회의 진행에 관하여 신문을 통하여 일반에 발표할 최선 방법을 토의한 결과 일반 대중 及 특히 조선인들은 임시 정부 수립에 협조하는 데 있어서 공위의 진행을 최대한으로 숙지할 권리가 있으므로 공위는 매주 1회 이상 의안 해결에 따라 상세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각 분과위원회는 1947년 5월 26일부터 기 업무에 착수할 것이다.
공동위원회는 조선인들이 공위에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다수의 서한과 감사문을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부터 접수하였다.
소 측 대표 J. F. 쉬티코프 대장 미 측 대표 알버트. E. 브라운 소장.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5월 27일자)
밑줄 친 내용이 주목된다. 모스크바 협정의 제2항 임시 정부 수립 문제만을 지금 단계에서는 다룬다는 것이다. 걸림돌로 계속 작용해 온 신탁 통치 문제를 다음 단계로 미뤄놓음으로써 당장의 진행을 순조롭게 하려는 뜻으로 읽힌다.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이승만-한국민주당 세력의 태도는 그 동안 굳어질 만큼 굳어져 있었다. 이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는 앞으로 계속 주시할 일인데, 이들의 태도가 미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5월 22일자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나타나 있다.
[워싱턴 22일 UP발 조선] 조선 독립 운동의 실질적 진전은 소련과의 합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와 그의 일파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1년 동안 휴회한 후 토의를 재개하려는 이때에 이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거의 소련에 역용될 것이 확실한 소리를 외치고 있다. 이 박사의 불평 언사에는 약간의 수긍할 만한 점도 있다. 조선 문제는 주로 조선인이 안하고 외부인이 결정하고 있다.
그는 조선의 즉시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조선이 자활하기까지에는 신탁 통치 하에 현재 조선을 분할하고 있는 부자연한 미-소 간 장벽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개 년을 요할 것이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5월 23일)
이승만이 미국 체류 동안 열심히 한 언론 활동 덕분에 그의 의도가 미국 언론계에는 분명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5월 23일의 국무성 발표를 보면 국무성 관리들이 이승만을 얼마나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워싱턴 23일 UP발 조선] 국무성은 남조선 정부 조직에 관하여 이승만이나 기타 누구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는 것을 단호 부정하였다. 그리고 국무성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임시적 신탁 통치에 관한 모스크 바결정을 준수할 것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남조선 미군 주둔군 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에 대하여서는 미국의 최고 정책을 충분히 알리고 있다 하며 하지 중장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이상의 강경한 국무성의 반향은 이승만이 라디오 보도에서 조선 내의 미국 점령 지역에 정부를 수립하는 데 관하여 국무성과 비밀 협정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는 데 뒤이어 나온 것이다. 국무성 당국에서는 UP기자에게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상의 국무성 성명은 또한 마셜 국무장관이 22일에 하지 장군으로부터 이 박사의 서울에 있어서의 최근의 활동을 설명하고 그들이 공동위원회의 업무를 방해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다는 통지를 받은 결과로 발한 것이다.
동시에 하지 중장은 마셜 장관에게 이 박사가 국무성에 대하여 소련 측과 모스크바 결정에서 신탁 통치 조항을 삭제하도록 교섭하라고 요청한 이 박사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박사는 하지 장군에게 그의 서한에 동의하여서 이를 전달하도록 요청하였으나 하지 중장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하등의 주석도 붙이지 않고 전달하는 동시에 이 박사의 활동에 대한 그의 평가를 첨부하였다.
한편, 국무성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국은 누구와도 조선에 관한 비밀 협정을 하지 않았다. 국무성은 하지 중장에 대하여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정책이었으며 현재에도 그러한 것이므로 우리는 공동위원회를 통하여 통일된 조선의 민주주의적 임시 정부를 창립 발전시킬 것을 희망한다는 것을 통고하였다."
한편, NBC 방송국이 이 박사가 조선 정부 수립에 관하여 국무성과의 사이에 조선에 있는 당국이 모르는 협정을 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당지에서는 하지 중장에 대한 논란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국무성이 이를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관리는 하지 중장에게 미국의 정책이 무엇인가를 말할 필요도 없다고 언명하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이승만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당지 일부 관변 측에서는 과거 수일간의 이 박사의 행동은 조선의 독립을 수년간 퇴보시키는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만약 미소공동위원회가 금번에 조선에 관한 정돈 상태를 타개치 못한다면 정세는 장기간 궁경에 함몰하여 소련은 북조선에 주저앉고 미국도 남조선에서 그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당국자들은 여차한 사태가 소칭하는 바 별개 독립한 남조선 정부의 수반이 되려는 이 박사의 목적을 조장하는 도리라고는 보고 있지 않다. 당국은 임시 정부 하에 조선을 통일시킨 후 독립에 앞서서 제한된 기간에 신탁 통치를 행할 것을 규정한 모스크바 결정을 단호히 준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5월 24일)
"별개 독립한 남조선 정부의 수반이 되려는" 이승만의 의도를 국무성 관리들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이승만은 거짓말을 마구 지어내 왔다. 미국에 가서는 조선 인민이 자기 노선을 지지한다고 했고, 조선에 와서는 미국 정부가 이런 의도를 갖고 있다고 자기 입맛대로 소설을 썼다. 미 국무성이 이승만의 발언을 부인하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워싱턴 22일발 AP합동] 30일 내지 60일 내에 남조선 임시 독립 정부는 수립될 것이다. 그리고 미 문관고등판무관이 군정장관에 대치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무성 대변인은 이승만 씨 언명은 단지 장차에 대한 이 씨 개인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3월 23일, 1947년 4월 15일)
"미 국무성 대변인, 이승만이 언명한 대조선 6억 불 차관 확약설 부인"
[워싱턴 10일발 AP합동] 미 국무성이 조선 부흥책을 강구중인 것만은 사실이다. 금액 및 기타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부흥책이 결정된다 하더라도 6억 불이나 고려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 국무성 당국은 수일 전에 "조선을 위한 3년간의 부흥책이 고려될 것이며 미 국회는 이를 승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으며 한편 장개석과 회담차 방금 중국에 체재중인 이승만은 상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다. "미국의 대조선 차관은 조선 정부가 정식으로 인정되면 허용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11일)
NBC 보도가 어떤 내용인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국무성 발표를 보면 미국 정부와 이승만 사이에 남조선 단독 독립의 '밀약'이 있다고 한 모양이다. 이승만이 지지자를 모으고 위신을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텐데, 국무성에서는 펄쩍 뛸 얘기다. 대외 관계의 밀약을 미국 정부가 맺었다면 담당이 국무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미 국무성에서 발끈하고 나오니 이승만도 해명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조선 정부 수립에 관하여 이 박사와 미 국무성 간에 비밀 합의를 보았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라는 통신 보도에 대하여 이 박사는 24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선에 과도 정부를 수립한다는 문제에 대하여 미 국무성과 나 사이에 비밀 양해가 있다는 것을 금번 국무성에서 부인한 것은 나와 동감이며 이런 언론을 내가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공석에나 사석에서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과도입법원에서 선거 법안을 통과하는 대로 총선거를 진행하기로 한 보도는 내가 대략 6주일 전 워싱턴에 있을 때에 각 신문에 전파되었나니 지금에 내가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말할 까닭도 없다. 이 계획을 우리가 진행하겠다는 것은 내가 귀국한 이후로 중복 성명하여 온 것인데 각국 신문이나 조선 신문에 비밀이란 의사를 비친 곳이 없었나니 이것만으로 보아도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설명될 것이다.
이 계획을 국무성 대변인이 협조하기로 한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요 하지 중장이 워싱턴에 있을 때에 이 계획을 지지한다고 설명한 것을 또한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국무성이나 서울 군정에서나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이 문제에 비밀이 있다는 것은 나도 그분들과 같은 거절하는 바이다.
다만 내 말을 전파하려는 모든 친구들에게 간절히 요구할 것은 무슨 말이든지 공정과 사실만을 주장하고 음모 선전은 말아야 할 것이다. 차등 선전은 공변된 일이 아니므로 피차에 효력이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7년 5월 25일자)
NBC는 '남조선 정부 수립'의 '밀약'을 얘기했다고 한다. '밀약'이라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약속을 말하는 것이니, 미군정에서 공개적으로 추진 중이던 '과도 정부'가 아닌 '분단 정부'를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남조선 정부요? 미군정에서 입법의원을 통해 추진하고 있는 거잖아요?"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승만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던 임병직의 발언이 진상에 가까운 것을 보여준다. 아마 이 밀약설을 NBC에 흘린 것이 임병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기자들의 확인 요청이 그에게 쏟아졌기 때문에 아래 발언을 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워싱턴 24일 UP발 조선] 재미한인위원회위원장 임병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조선 우익 지도자 이승만 박사가 결국은 조선 전토를 통치하게 될 남조선 정부 수립에 관하여 국무성과 비밀 협정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한 NBC 방송을 믿고 싶지 않다. 이 박사는 조선 독립 정부의 급속한 수립을 희망하고 있으며 모스크바 결정에 적용된 민주주의를 명확히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5일)
"결국은 조선 전토를 통치하게 될 남조선 정부"라고 임병직은 말했다. 이것은 미군정이 추진하고 있던 과도 정부와 전혀 다른 것이다. 이승만은 분단 건국으로 남조선을 장악한 후 미국의 힘에 기대 북쪽까지 흡수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략이 결국 대한민국 건국으로 실현되기에 이르지만,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무성의 이승만에 대한 반박과 비난이 강하게 나왔을 때 이승만은 딴전을 피웠다. 그런데 미국에 있던 임병직은 잡아떼는 요령을 미처 시달 받지 못하고 있는 채로 기자들의 질문에 부딪친 모양이다. 그래서 전략 내용을 발설하고 NBC 방송 보도를 "믿고 싶지 않다"는 정도의 어정쩡한 부정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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