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형이상학을 품기도 하며 논리학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윤리학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 무엇이건 간에 철학은 세계와 우주를 조우하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인간을 묻는 질문이 없다면, 철학이 만나는 세계란 공허하고 유명무실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자아 내부를 깊숙이 비추는 반성력과 자아가 세상을 보는 비판력에서 생긴다.
인간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 인식을 나는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공허하거나 순수 논리적이거나 인간 없는 형이상학, 즉, '신성화된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삶의 철학이라고 보면 된다. 철학은 신성화된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하지만, 형이상학 없는 철학은 자칫 유사 과학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나의 철학 공부는 신성화된 형이상학 대신에 세속화된 형이상학을 주요한 커리큘럼으로 하고 있다. 신성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이 배제되어서, 색깔이 없으며 차가우며 건조한 형이상학이다. 반면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의 시선 안으로 투영된 형이상학을 뜻한다. 어떤 때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의 구조가 묻어난 존재의 서사시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형이상학 안에는 인간의 실존과 세계의 실재가 뒤섞여 있다. 세속화된 형이상학은 혼돈과 중첩,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이 스며들어 있다. 마치 논리학처럼 질서정연한 신성화된 형이상학 공부는 수학자나 신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혼돈의 세속 형이상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런 나의 공부 커리큘럼에는 김상봉의 책들도 목록으로 있다.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김상봉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
김상봉의 선언 명제는 한국형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의심 없이 통용되는 주주 경영 구조의 허구와 모순을 밝히는 철학적 프로토콜이다. 주식회사는 주인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사회가 진보하기 위하여 재벌 기업의 주식회사는 그것이 크면 클수록 폴리스 민주제 즉 공화제처럼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든 주식회사의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경제사적이며 철학사적인 근거 위에 배선된 분명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가 주식회사의 경영자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런 주장이 뭇사람들에게 큰 당혹감을 줄 수 있지만, 실은 아무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사실 명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김상봉은 그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교조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철저한 역사적 근거와 철학적 논증을 통하여 주주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를 설득시켰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만했다. 정말 그런지 하나하나 책 내용을 따져보겠다.
국가 위에 재벌
국가 권력보다 더 커진 한국의 재벌 기업들은 이미 기업 국가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저자는 기업 국가의 무수한 부패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면 일어나는 전형적인 변형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확산되는 데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을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 경제 제도와 자유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오판들이다.
한국의 재벌 기업 문화는 그들의 이익 구조를 위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26쪽). 재벌 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업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재벌 기업의 이윤 행위는 공적으로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그들만의 개인 이익을 위한 착취 수준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모순을 덮어버리곤 한다. 재벌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마약 같은 믿음을 조작하고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우리 모두 재벌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약의 환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남 부자들이 대한민국의 부를 상승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횡행하고 있다. 빈부격차는 더 많이 벌어지고 있는 당면한 현실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눈감아 버린다. 재벌 기업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면 끝내는 우리들 대중들에게도 혜택에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재벌과 그 공조자인 정부 공무원이 만들어낸 가짜 유토피아일 뿐이다.
나는 이런 희망을 '의존적 희망'이라고 말한다. '주체적 희망' 반대편에 놓인 허망한 믿음의 결과이다. 앞서 말한 기만의 믿음, 즉 부자들에게 돈을 우선적으로 몰아주면 넘쳐나고 난 이후, 끝내는 대중들에게 떡고물이 똑똑(trickle)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전형적인 트릭클다운(trickle-down) 현상의 귀결이다. 트릭클다운 정책은 미국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90년 전후로 시행했던 부자 혜택 정책이다. 한국은 이런 부자 혜택 경제 정책을 미국 이상으로 노골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의 혜택을 돌리고 난 후 그 파이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떡고물조차 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재벌 2세들이 그 남은 떡고물까지 깡그리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재벌 2세, 3세에게 기업을 불법적으로 물려주는 현실을 법관들까지 모른 척하고 있으며 관련 상급 공무원들은 한 발 더 나가 재벌 비위 상하지 않도록 미리 알아서 기고 있다.
자본과 기술면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삼성전자의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자본 독재자 이건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에게도 벌벌 기는 장면을 아마 유럽 기업인들이 보았다면 무슨 영화 찍고 있냐는 신기한 생각으로 물어볼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에 독재자의 폭압성이 더해져서 주주법상으로 아무 직함도 없는 이건희에게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3대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세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푹푹 나오거늘, 소위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재벌 기업의 세습 권력은 북한 정권 이상으로 더더욱 괴이한 모습이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형 독재 권력이려니 하고 쉽게 생각하려 해도, 여전히 가슴이 더 깊게 패이고 만다. 김상봉은 그의 책에서 이런 괴이함을 재미나게 표현했다.
"북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국가 위에 재벌 기업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225쪽)
경영자가 이사회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한국 주식회사의 기현상이다. 이사회 위에 경영진이 있고, 경영진 위에 절대권력 회장님이 있다. 그런 재벌 기업의 규모는 국가 예산을 넘어설 정도로 방대해졌지만 그 지배 방식은 동네 식당을 운영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세습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재벌이라는 조직 자체가 독재의 잔존이라는 점을 김상봉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재벌이 없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여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벌 떨거지들, 맹목적 재벌 자본 추종자들이 우러러 받들어 모시는 미국에도 재벌 개념은 없다. 최근 무섭게 융기하는 친일 세력들이 좋아하는 일본에서조차도 재벌 조직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 세습 한국형 재벌은 재벌 기업식 주주 자본이 현대 자본주의의 주류라고 서민을 속이고 있다. 미국 기업 사회 자본가들은 이미 미국 사회에서 발생한 독재적 주식회사의 전횡과 몰락을 많이 보아왔다. 2001년 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엔론 사태가 경영자 지배의 극단이라면 포드의 경우는 소유주 지배의 극단이다. 그리고 주주 자본주의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언제나 동요할 수밖에 없다."(204쪽)
책에 쓰인 대로 이재용은 1994년 아버지 이건희로부터 61억 원을 물려받았다. 증여세를 납부하고 나니 44억 원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매스컴은 소박한 상속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재용의 돈 44억 원이 불과 15년 만에 2조2000억 원이 되었다. 더군다나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계열사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불법적 행위가 일어났지만,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그에 대한 법정 판결은 결국 그 부자에게 면죄부를 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가 쓴 다른 한 구절을 보자.
"예를 들자면, 정몽구 회장은 2006년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린 협의로 구속 기소당해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두 달 가량 감옥 체험을 해야 했다. 미국이라면 정 회장은 어쩌면 아직도 감옥에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100만 원을 훔쳤다는 죄로 감옥에서 썩는 사람들은 많아도 1000억 원을 훔쳤다고 징역을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도 여전히 회장으로 건재하고 있다." (256쪽)
노동자 경영권
그래서 김상봉은 재벌 기업의 지배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뜻의 실속은 그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참여하는 구성원이 주주나 경영자에 제한되었지만 그런 제한이 바로 주식회사법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김상봉은 이제라도 노동자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증명한다. 노동자가 경영자도 될 수 있고 그런 노동자는 마치 기업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인 셈이다. 이런 방식이 바로 김상봉이 전개하는 폴리스로서의 기업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떨며 자본의 생리를 조금도 모르고 까부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원시 공동체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냐고 핀잔을 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국가 간 치열한 경쟁력의 전쟁터와 같은 곳인데 웬 꿈같은 로맨스에 빠져 있냐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재벌 기업을 하는 사람들, 많은 경제학자들, 정부 관료들이 바로 그런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이라는 지식인조차 기업 공화제 구조를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일축하면서 그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가세한다.
저자 김상봉이 그런 비난을 모르는 채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노동자 경영권으로 압축된 그의 주장이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상세히 쓰고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생겨났다는 기업의 본능적 생리에 대하여 김상봉이 모르는 바도 아니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본의 생리를 무시했다면 그는 기존의 낡은 유토피아 경제학자와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탄생은 그들이 투자한 모든 자산보다 훨씬 더 많은 잉여 가치를 얻어내는 데 있다는 점을 저자는 절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 절실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우리들의 행복한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의지와 설계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었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경제 사상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일본의 가까운 실증적 사례들을 통하여 김상봉은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이 가능한 이유를 소상하게 보여 준다.
헤겔에서 좀바르트에 이어가면서 철학사와 경제사를 결합하여 소유 개념을 설명하는 그의 분석력이 돋보인다. 소유에 대한 헤겔의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주식회사에 대한 법적인 보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소유권이란 쉽게 말해서 (1) 나만 가질 수 있고 (2) 내 마음대로 늘리거나 (3)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주식회사의 주주는 자기가 소유한 주주의 한도 안에서만 주주의 배당과 손실을 받을 뿐, 회사의 경영에 대하여 책임질 필요가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말이다.
김상봉은 다양한 현실 사례를 들어 주식 기업의 소유가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 2008년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시가 총액 1위 기업 엑손모빌을 사례로 들어 주식회사가 소유 혹은 지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161쪽).
"주주의 몫은 배당금이며, 노동자의 몫은 임금이고, 채권자의 몫은 원금과 이자이며, 소비자나 계약자의 몫은 계약에 따라 지불한 금액에 상응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이다. 하지만 경영권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식회사에서 누가 경영을 맡느냐 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제로서 원칙적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문제이다. 아니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누구에게 속하느냐 하는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주식회사의 고유한 특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83쪽)
노동자 경영권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별 문제 없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 지식인조차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주식회사에 주인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노동자가 그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겠느냐는 자조적 의심 때문에 그렇다.
김상봉은 이에 대하여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고 있다. 노동자는 기업으로부터 받는 임금이 그들의 최후 생활 보장에 대한 경제적 권리이기 때문에 기업에 대하여 진정으로 책임감을 갖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이다. 이러한 김상봉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경영자는 원칙적으로 경영을 잘하여 수익을 많이 남기라는 주주들 대표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므로 전적인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주주의 권한을 넘어선 재벌은 공적 책임보다는 그들만의 사적 잉여금을 챙겨가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노동자의 책임은 소중하며,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위적이다.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실질적인 사례도 많다. 독일이나 일본에서 노동자 경영권의 관행과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관습적 사유를 깨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 어찌 감히 노동자 경영권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2) 기업의 창업자가 있는데, 어찌 감히 그들의 재산을 간섭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순응되어진 두려움에 우리는 휩싸여 있다. 그런 두려움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지식 학습보다 더 우선하며 더 중요하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여기서 철학이 요청된다. 이 책은 겉보기에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현실 경제 주장을 담은 책 같지만, 실은 자본 권력 즉 돈의 힘에 순치된 우리의 자화상을 내부로부터 깨부수려는 철학적 선언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처럼 말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것도 후대로 지나고 보니 혁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 뿐이다. 남들 다 천체가 돈다고 할 때 지구가 돈다고 했으니 당대에 코페르니쿠스는 정말 비난과 조롱을 받았었겠지.
남들 다 하는 대로 나도 쫓아가는 것이 뭐가 문젤까? 한때 유행했던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누구에 의해 프로그램되어진 세상 속에서 가짜의 세계, 허구의 세계, 조작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짜 세계에서 안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지 의심을 품고 되묻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박사 학위에 교수라는 최고의 철학 전공 지식인이라도 그 조작된 세계에 안주하거나 조작에 가담했다면 그는 철학과 동떨어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 자본 권력의 허구에 항거했을 때 김진숙으로부터 우리는 가장 철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심을 하지 않고 주어진 틀에 안주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순치되었다. 조금만 참으면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빠져 가짜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고 마는 허구의 믿음들이 넘쳐난다. 그런 믿음들은 일종의 '의존적 믿음'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의존적 믿음'이 아니라 '주체적 믿음'이 요청된다. 그런 '주체적 믿음'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바로 철학이다.
대학 법인은 공적 법인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 이사장들은 대학의 사적 주인을 당당하게 자처하고 있다. 또 대학 재벌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노동자와 국민을 무시한 채 국민의 세금으로 세워진 고속철도나 국제공항도 그들 마음대로 주인을 기업에게 넘긴다고 한다. 4대강을 그네들 개인 관광지처럼 결정해서 억지 주인 행세하며 자연으로부터 빼앗고 우리 모두의 것으로부터 빼앗아 토건 정부답게 그들 마음대로 파헤치고 있다. 보수 신문의 비호 아래 제주도 강정 마을을 빼앗아 해군 기지를 세워서 미군에게 안주인을 넘겨주고 있다. 그네들끼리 마음대로 주인을 만들거나 바꿔치기에 능숙해졌다. 오래 전부터 주식회사가 법적으로 주인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벌이 주인을 자처하고 또한 재벌을 주인으로 모셔온 그들의 관행에 우리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시각을 조금만 넓혀 유럽이나 일본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하는 미국을 바라본다면 한국의 세습적 주주 자본이 얼마나 변태적인지를 느낄 수 있다.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여 자본의 역사 및 한반도 제국주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다면 현행 기업 권력이 왜 국가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나아가 왜 국가가 나서서 재벌을 옹호해 주는지를 알 수 있다.
불법의 관행에 침묵으로 동참한다면 우리 역시 누구에게선가 프로그램된 게임 캐릭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을 그네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주식회사 형태 말고 사적 기업으로 운영하라고 해라, 그러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세워 명예 권력을 쥐고 돈을 벌고 싶다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개인 기업형 학원을 차리라고 해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법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공중 이익을 침식하고 그네들 이익을 지수 함수적으로 늘려가고 있는 현실을 관행이라고 옹호하는 비호 세력에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고 김상봉은 제동을 걸었다.
그런 관습이 가짜라는 것을 그의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 김상봉의 책에 나온 대로 우리는 그들이 가짜 주인이요 진짜 주인은 우리 모두라는 항변을 해야 한다. 이러한 항변이 바로 철학함의 출발이다. 여기서 김상봉의 철학이 고귀한 박제된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을 섭동하며 극복하는 실천적 형이상학임을 알게 되었다.
실천적 형이상학이란 조작된 의존적 희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주체적 희망을 되찾는 삶의 매뉴얼이다. 그런 매뉴얼을 읽을 수 있다면, 김상봉의 노동자 경영권 주장이 낭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관통하는 실천적 지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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