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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부처" "히틀러는 천사" 그럼,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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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두환은 부처" "히틀러는 천사" 그럼, 대통령은?

[시골 한의사 고은광순의 처방] '분노'에서 '힐링'으로

'힐링'. 연예인은 물론 대통령 후보로 꼽히는 이들까지 출연을 마다하지 않는 인기 TV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이 프로그램은 지친 사람을 휴식과 치유로 인도하는 콘셉트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삶에 피로를 느낀다는 방증이리라. 그들은 묻는다. '도대체 누가 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이 책 <힐링>(유리창 펴냄)은 말한다. "바로 당신 자신!" 저자는 '호주제 폐지 운동'으로 유명한 여성 운동가이자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서 '솔빛 한의원'을 운영하는 고은광순 씨. 2010년 가을, 그는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55년 넘게 살던 서울을 떠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책은 그로부터 2년 몇 개월간 그가 남긴 삶의 기록이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 <시골 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고은광순 지음, 유리창 펴냄). ⓒ유리창
치매 걸린 노모와의 생활과 그의 죽음을 결코 어둡지 않게 그려낸 전반부와, 진료와 명상과 공동체 만들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시골 생활을 그린 후반부를 관통하는 테마는 '내면의 에너지'와 '감사'다. 그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도 감사한 일"이며 진흙탕에 빠진 진보 정치 역시 "감사한 일"이라 말한다. 그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구성원 개개인의 내공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힐링'은 바로 이 두 지점에서 전파되는 힘이다.

전작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인물과사상사 펴냄, 1999년),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인물과사상사 펴냄, 2004년)나 과거 그의 실천을 기억한다면, 얼핏 자기 계발서 같은 조언이 낙차를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더 좋은 세상을 향한 눈은 결코 변하지 않았으며 다만 방법이 달라진 거라고 설명한다.

"그때(7~80년대)는 저항이 급선무였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 화염병 대신 장미꽃을 드는 시위, 폭력이 아닌 노래가 있는 시위가 더 끈질기고 바람직하다."

40년 가까이 다양한 사회 운동에 매진해 온 그가 오늘날 와 닿아 있는 자리다. 지난 16일 그가 사는 갑사 마을의 솔빛 한의원을 찾았다. '데비 프레이어(Devi Prayer)'라는 몽환적인 명상 음악이 흘러나오는 진료실에는 때때로 환자들이 친구를 찾듯이 방문해 왔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 한의사·사회 운동가 고은광순. ⓒ프레시안(최형락)

'분노'에서 '힐링'으로!

프레시안 : 책 제목인 '힐링'이 최근 화두다. 이 책에 담고 싶었던 힐링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은광순 : 1970년대 학생 운동, 1990년대 여성 운동 등 그동안 해 왔던 투쟁도 어떻게 보면 '힐링'이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려는 '사회적 힐링'. 그런데 이제는 개개인의 내공이 높아지지 않으면 안 되고, 전체적인 시스템을 바꾸는 건 그 다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대통령 하나 바뀌면 모든 게 순식간에 바뀌지만, 사람 각자의 내공과 지혜가 높아지면 (시스템이) 그렇게 쉽게 조변석개하지 않는다. 그 내공과 지혜가 사회를 평탄하게 진화시키는 길로 이끌 거라는 생각이다.

프레시안 : 단독으로 쓴 세 번째 단행본인데 제목만 봐도 모종의 변화가 느껴진다. <어느 안티 미스코리아의 반란>과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에서 다분히 편안해진 듯한 <힐링>으로. (웃음)

고은광순 : 과거 나의 화두는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였다. 그 책들은 그걸 어떻게든 고쳐보려는 몸부림이었다면, 이번 책은 우리들 자신의 내면의 에너지를 높이는 진화된 방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 더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사랑이 넘치고 인간적인 세상을 향한 열망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다만 방법이 시스템을 고치는 것에서 구성원의 에너지를 높이는 것으로 바뀐 거라고 할까.

프레시안 : 그 변화에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

고은광순 : 어느 순간에 확 오는 사건적 계기는 없었다. 10년, 20년 전의 인연,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출생의 시점부터 시작해 여러 인연들이 모여 전환점을 만들게 되더라. 흐르는 물처럼 필연적인 것 같다. 그걸 명료하게 알게 된 계기는 명상을 통해 지금의 한 스승을 만나면서부터다.

프레시안 : 스승? 어떤 사람인가.

ⓒ프레시안(최형락)
고은광순 :
2008년 지인의 권유로 이곳 갑사 동네의 명상 캠프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분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분과는 그보다 11년 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회창과 김대중 두 후보가 맞붙었던 1997년 대선 때다. 당시 나는 바른정치실천시민연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를 가지고 네거티브 선전에 한창이었다. 어떻게든 김대중을 당선시켜야 했으니까 (웃음) 치사하지만 그런 방법을 썼다.

하루는 서명 운동을 끝내고 뒤풀이를 갔는데, 누가 지인을 데려와서는 우리에게 소개했다. 교사 출신이고 산에서 3년 지냈으며 도통하신 분이라고. 내가 '뭘 깨달으셨나' 물었더니 '세상 만물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답하더라. 그래서 '그럼 전두환도 부처인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더라. 그때부터 난 귀를 딱 막고 더 이상 그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언제 돌아갔는지조차 기억이 없다.

그땐 화가 났다. '그 따위가 '도'라구?' 싶었는데…. 나중에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혁명>(백영미 옮김, 판미동 펴냄)이라는 책을 읽고 심취하면서 알게 된 경주의 한 커뮤니티에서 "히틀러도 천사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10년 만에 그 분 생각이 났다. 천사라야 악역을 맡고, 누군가 악역을 해야 대중의 의식이 높아지기 때문에 히틀러는 보통 천사가 아니라 대 천사라는 얘기다.

'전두환도 부처라고 한 사람도 그런 뜻이었나?'란 생각이 들었고, 딱 그즈음 '갑사 동네에서 명상을 하니 한 번 와 봐라'라는 권유 이메일을 받았다. 가서 보니 11년 전 그 사람이 있었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프레시안 : 지금도 바로 옆 자리에 <의식 혁명>을 두고 있는데 이 책에서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은광순 : 데이비드 호킨스라는 정신과 의사가 썼다. 지인이 추천해 준 건데 처음 읽을 때부터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 주변에도 가장 강하게 권하는 책이다. 저자는 사람의 의식에도 점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분노나 슬픔, 좌절은 200 이하, 용기나 희망, 포용은 200 이상이다. 200 이하는 진흙탕, 200 이상은 꽃밭이다. 한의원의 약 봉투 뒷면에 이 책의 에센스를 표로 만들어 넣어 놨다.

이 의식 점수는 사람의 일생에서 거의 변하지 않는데 오로지 명상과 수행, 이타적 기도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지금은 '저 사람은 태어나길 150(점)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럼 문제는 그 사람의 의식 점수가 오르도록, 다시 말해 그 안에 있는 새끼 부처가 깨어나도록 돕는 것이 된다.

물론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내 표정이, 내 에너지가 바뀌면 바로 저 사람이 달라진다.

한의원에서 고민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며 늘 느끼는 거지만 많은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을 '남편이 잘못해서, 시어머니가 잘못해서, 상사가 잘못해서'라며 타인에게 돌린다. 상대를 원망하고 그러면 내가 아프고, 다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악순환이다. 부부 사이만 해도 '저 사람은 왜 치약을 가운데서부터 짜지?' 같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크고 작은 요구와 좌절 때문에 불행에 빠지지 않나.

거기서 자기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내공이 높아지면 상대를 바꾸려고 하지 않게 된다. 부처나 예수가 누구 때문에 짜증내는 거 봤나. 나는 신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에서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누구나 부처처럼, 예수처럼 될 수 있다고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달라지는 것이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내가 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두 다 자기가 가장 힘들다고 하는데.

고은광순 : 지혜가 열려야 한다. 감사 명상, 축복 명상, 남을 위한 명상을 통해서다. 한의원 옆에 치유 효과가 높다고 유명한 맥반석 찜질방이 있는데, 손님들이 모두 가까이에서 불을 쬐고 싶어 해 주말마다 자리다툼이 일어난다. 자기 앞으로 다른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싫어한다. 열선이 차단된다나 뭐라나.

다툼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고 주인이 울상이기에 오지랖 넓은 내가 현수막을 하나 주문해 붙였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치유되라고 명상하면 나도 빨리 낫는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명상한다는 건 현실 도피나 고립적 자기 폐쇄, 좋은 게 좋다며 모든 것에 눈감는 태도 아니냐는 질문"(237쪽)을 받을 법도 하다. 또 이 책은 '감사하라' '축복하라'고 강조하는데, 사회를 바꾸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분노와 저항 아닌가.

고은광순 : 우리는 '사형' 하면 전기의자를 떠올리지만,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는 사형수에게 병아리를 키우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답답한 방에서도 자기 먹을 밥을 남겨 병아리를 돌본다고 한다. 또 화염병 든 시위가 아니라 장미꽃을 든 시위를 떠올려 보라. 모두 방법이 다른 것일 뿐 문제에 눈 감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명상은 껍데기 '나'에 가려져 있던 참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자기 안의 무한한 사랑과 자유와 평화의 속성을 발견하고 키운다. 인간의 격이 달라지면 문제를 보는 관점, 문제를 푸는 해결책이 달라진다. 격이 달라진 개인이 모인 사회와 국가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조용하지만 힘 있고 아름다운 혁명 아닌가?

ⓒ프레시안(최형락)

진보 마초들이 있는 한

프레시안 : 명상보다는 '호주제 폐지 운동'으로 고은광순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더 많을 것 같다. 지금의 고은광순이 있기까지의 역사를 들어보고 싶다. 1970년대엔 학생 운동을 했는데, 그때의 경험과 1990년대 이후 여성 운동의 궤적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고은광순 : 여성으로서의 자각이나 여성 운동에 대한 생각이 그때 싹튼 건 아니다. 다만 박정희 독재에 대한 분노로 학생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면서 두 번 제적, 두 번 구속을 당하고 나니 여권을 안 내줘 유학도 갈 수 없었다. 여기서 칼을 갈아야지 싶었다. 졸업장보다 힘 센 면허를 따겠노라고. 한의과대학을 선택한 것도 감옥에서 허리가 안 좋아져 옆으로 돌아눕지 못하게 된 게 계기였다. 그런데 한의대에 가서도 혼자 대자보 쓰고 싸웠다. (웃음) 결국 장학금도 끊기고….

졸업하고 또 약사법 분쟁으로 싸웠다. 선봉에 서서 머리 밀고 그랬었지. 그러다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될 시점에, 한의사들 교류 용도로 접속하던 PC 통신에서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말도 못할 여성 비하를 목격했다. '한국 남자들은 왜 여성에게 무례할까. 한국 여자들은 왜 남성에게 밟혀도 좋다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한의사로 살며 마주친 현실도 한몫했다. 성 감별 후 낙태 얘기다. 당시 한의사 2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스무 번이나 (여아이기 때문에) 낙태한 사람도 있었고, 딸 넷을 낳고는 언제 쫓겨날지 몰라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출생 성비를 역으로 계산하니 1년에 3~4만 명 정도가 여아라는 이유로 낙태되고 있었다.

남자 4명 중 1명이 결혼을 못 한다는 2010년 결혼 적령기 성비, 많게는 70퍼센트까지 신부를 '수입'해 온다는 지금 한국 농촌의 현실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됐다. 감별 후 낙태를 다른 말로 하면 '골라서 죽이기'다.

호주제 폐지 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로선 뒤늦게 뛰어들게 된 운동이었다. 결국 이 견고한 시스템을 엎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 결국 폐지에 성공했지만 별 일이 다 있었다. 한창 폐지를 놓고 갑론을박할 때 한 대학 교수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식에게 성을 물려주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인간에 여자가 포함되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못 하더라. 인간 속에 여자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우리의 의식 수준이었고, 사실 이건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프레시안 : 요즘은 '내 제사 거부 운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고은광순 : 호주제가 잘못된 그릇이라면 제사는 그 그릇에 담긴 아주 나쁜 물이다. 이문열은 제사상에 올릴 떡시루에 김이 안 올라 목을 맨 며느리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섬뜩한 미학에 동의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조상 제사는 우리의 오래된 전통도 아니며, 대중에게 일반화된 것은 양반의 세도가 무력해진 일제 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이 허세 가득한 남성 중심의 집안 행사는 제사를 지낼 아들을 낳기 위해 치러지는 낙태를 비롯하여 여자를 2등 인간으로 억압하는 문화적 기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망자를 비석에 가리고 기리는 것보다 살아 있을 때 좋은 추억을 쌓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명절엔 모여서 서로 근황을 나누는 '1분 스피치'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취지 속에서 2009년 말부터 인터넷 카페로 운동을 시작했다.

프레시안 : 반응은 어떤가.

고은광순 : 제사 금지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자발적으로 거부 의지를 느낀 사람들이 '스스로 거부하겠다' 선언을 하자는 거다. 그런데도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한 신문의 남성 기자 사이에선 "호주제 폐지까진 봐줄 수 있지만 제사 거부까진 못 봐 주겠다" 이런 반응이 오가기도 했단다. 자기를 진보로 자처하는 남자들조차 가부장 문화에 젖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여성뿐 아니라 인종, 계층, 국적에 대한 차별에 민감하겠나. 한국 사회에 성뿐 아니라 지역과 학력, 출신 차별이 현저한 이유는 가부장 문화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여담이지만 <힐링>에서 2010년 리영희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신년 엽서를 사진으로 공개한 건 그 가부장제에 둔한 자칭 '진보' 남성들을 위해서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쓰셨다. "나도 여러 해 전에 나의 제사는 하지 말라고 했어요." '진보' 외치는 그 사람들 리영희 선생님이라면 껌뻑 죽지 않나. (웃음)

프레시안 : 이 책에서 '모성'과 '돌봄' 등이 여성적 가치라고 썼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야말로 생물학적 여성에 본질적인 특권을 부여해,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강조해 오히려 여성 운동의 왜소화를 가져온다고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고은광순이 생각하는 '페미니즘', '여성주의'는 무엇이고, 그 목적은 또 무엇인가?

고은광순 : 나는 여성적 가치가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 여성적 가치가 가장 크게 발현되는 게 모성이다. 그건 어머니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외의 다른 생명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 약탈, 패권주의 같은 남성성은 세상을 불안하게만 한다. 남성도 자기 외의 생명체를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모성을 가지는 게 내가 강조하는 여성 운동의 목표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샘플

프레시안 : 이 책 전반부를 차지하는 어머니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죽음에 이르는 동안 곁에서 함께 한 과정이 세세히 적혀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고은광순 :
<온라인 이프>에서 연재하는 동안 어머니에 관한 부분만 따로 편집해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난 비통한 사모곡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난 늘 치매가 참 감사한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옛날에 자신의 어머니가 자식 걱정을 하면 구박을 했던 우리 어머니도 말년엔 자식 여섯에 대한 걱정으로 날을 샜다. 그런데 치매에 걸리면 그런 걱정이 없고, 당연히 우울증도 안 생긴다. 치매도 월경, 폐경, 몽정, 오르가즘처럼 인간의 생로병사를 구성하는 '이유 있는' 일 중 하나 아닌가?

직업 때문에 노인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이 있어야 다른 생명이 발을 딛고 태어나올 수 있다. 죽음을 슬프고 애통하기만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안타깝다. 65억 인구 누구나 겪는 이 당연함을 받아들이면 살아 있는 순간이야말로 귀하고 감사하다는 걸 알게 된다.

프레시안 : 이 책 후반부엔 지금 충청북도 옥천에 만들고 있다는 공동체 이야기가 나온다. 공동체라는 대안을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고은광순 : 사랑 가득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위정자를 향해 '이렇게 해 달라' 하고 요구하는 방식도 있지만, 그런 좋은 세상을 우리가 직접 일구는 방식도 있다. 먼저 나를 부추긴 건 <녹색평론>에 꾸준히 실리던 외국의 공동체 관련 글이었다. 거기엔 박정희의 '새마을 노래'에 나오는 부자 조국, 빌딩, 콘크리트댐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상호 존중, 따스한 배려, 나눔이 있었다.

2008년 설에 20년 넘게 차려온 차례상을 팽개치고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를 방문했다. 국적도 성(姓)도 없는 자유로운 공동체가 부럽고 놀라웠지만 이 땅에서 가능할까 싶어 낙담했다. 그러다 그해 여름에 갑사 동네의 명상 모임에 참여하면서, 앞서 말한 스승의 과제 역시 공동체를 만드는 일임을 알았고 함께 할 사람들도 만나게 됐다.

이 공동체 속에선 위계서열, 가부장 문화를 다 없애고 싶다. 세상에 있는 허례허식을 다 바꾸고 싶다. 신부가 호텔 천장에서 꽃바구니 타고 내려오는 결혼식은 아마 못 볼 것이다. (웃음) 우리는 '10만 원 짜리 결혼식'을 해 보려고 한다. 국수 값만 있으면 허식은 없고 감동만 있는, 축복은 그 어느 곳보다 넘치는 결혼식을 할 수 있을 거다.

프레시안 : 이미 한국에는 많은 '공동체'가 있다. 하지만 오래 가는 경우는 드물며, 그게 과연 새로운 세상인지 그들만의 닫혀 있는 세상인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고은광순 : 공동체는 폐쇄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작업이라 본다. 작은 사회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너희도 이렇게 해봐, 행복해질 거야'라는 샘플을 만드는 의미라고 할까. 양악 수술이나 명품 백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이런 좋은 에너지는 전파되게 마련이다.

프레시안 : 1997년 대선 때엔 정치와 밀접한 시민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는데, 요즘 정치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고은광순 :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서는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들 내부의 치부를 모조리 까발리게 된 거니까. 넓게 보면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감사를 느낀다. 대중의 의식을 높여준 셈이니까. 다시는 저런 대통령을 뽑지 않도록 느끼게 한 악역이니까, 그 안에도 천사가 있는 거다. (웃음) 새누리당이 가진 자 1퍼센트이지만 어쨌든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과 비교해 '호남 정당'에 갇혀 있는 민주통합당도 진정한 정책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내가 서울 서초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할 때 그 근방의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대개 선거 때마다 한나라당을 찍었다. 많은 이들이 하위 10퍼센트에 속하면서도 상위 1퍼센트를 위한 정당을 같은 편으로 여긴다. 이런 허위의식은 의식 수준이 낮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기에 앞서도 강조한 대로, 개개인의 내공을 높이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고 보는 거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정말로 인터뷰 내내 '감사'를 강조하는 것 같다. (웃음) 마지막으로 짓궂은 질문. 진짜로 화나 짜증이 날 때가 없는가?

고은광순 : '별로' 없다. 질투, 분노, 배신, 험담 같은 인간 드라마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자기가 태산이 되면 된다. 마지막으로 하쿠인 선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18세기 일본에 존경받는 하쿠인 선사가 있었다. 옆 동네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추궁하는 부모에게 처녀는 애아버지가 하쿠인 선사라고 말했다. 쫓아와 욕을 퍼붓는 부모에게 하쿠인 선사는 한 마디 했다. "그런가?" 아기가 태어나자 처녀의 부모는 하쿠인 선사에게 던져놓고 갔고, 하쿠인 선사는 아무 말 없이 사랑으로 키웠다.

1년 뒤 처녀는 애아버지가 푸줏간 젊은이라고 이실직고했고, 부모는 하쿠인 선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아이를 데려갔다. 이때도 하쿠인 선사는 "그런가?" 한 마디뿐이었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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