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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아! 네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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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아! 네가 나다!

[어린이책은 희망이다]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어린이날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89호는 어린이 책 특집으로 꾸렸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어린이 책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어린이 책은 무엇입니까? <편집자>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도통 짐작할 수 없다.

삼륜차 한 대면 이삿짐을 쌀 수 있던 살림살이에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이건 마른 땅에 내린 단비 정도가 아니다. 사막에서 길 잃은 나그네에게 퍼붓는 소나기다. 붙잡고 읽었다. 읽고 또 읽고 더 읽었다. 다른 책이 없으니 그것만 읽을 수밖에. 나중에 보니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기억하기로 당시에 흔하지 않던 양장본이었던 듯싶은데.

나이 들어 어린 시절 가난했노라 말하는 것처럼 청승맞은 일이 없다. 그런데 가난했다면 괜찮다. 나는 희망이 없었다. 태생부터 그랬다. 20세의 어미가 낳은 '맏배'이건만 태어나자마자 가능성 없어 윗목에 던져놓았다 한다. 안타까워하며 새 생명 살리려 애태운 것은 어린 어미뿐이었다.

전설처럼 들어온 말에 따르면 고향에서 한의원하는 이모부의 형님이 진짜 우황청심환을 주어 먹였더니 살아났단다. 기적이라고 회상하면 얼마나 좋을까. 되돌아보니, 어린 시절의 삶이 눈부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게 맞을 듯싶다. 하나, 되는 일 없고 그 화풀이로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비 밑에 자라면서 희망이라는 낱말을 인생 사전에 등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집을 덜컥 샀을까, 나의 어미는?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인 듯싶으니 춘천서 살 때다. 애비가 일하던 양화업은 전형적인 기업형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은 장인이 만든 구두보다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찍어낸 것을 더 좋아했다. 형편은 어려워지고 불안이 엄습하던 시절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미는 자식의 무엇을 보고 그런 큰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배운 게 많지 않았으나 똑똑했던 어미는 자식이 공부 잘하기를 바랐다. 국문도 일찍 깨우쳐주고, 선행 학습도 해줬다. 거기까지였나 보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깜냥이. 이제 더 가르쳐야 하는데 더는 선생이 되지 못하는 어미가 큰 스승을 자식에게 안겨주고 싶었을 듯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당시 최대의 히트 상품인 동화 전집이었던 모양이다.

현실이 궁핍하고 외로운 이에게 책만한 도피처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게걸스럽게 읽어대었고 거듭해서 읽어치웠다. 머릿속이 온통 이야기로 가득 차니 할 말이 생겼던 모양이다. 전집을 읽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 독후감 대회에 글을 제출했고, 그게 등수 안에 들었다. 춘천을 대표해서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는 기억의 편린을 재구성했을 뿐이다. 쓰면서도 긴가민가하다. 그럼에도 서울에 올라왔던 일은 생생히 기억한다.) 결과는? 장려상도 받지 못했으니 전국 단위로는 등수 외이었던 듯싶다.

▲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판 <톰 소여의 모험>(마크 트웨인 지음, 계몽사 펴냄). ⓒ계몽사
기억으로는 열 권이었던 싶은데 자료를 찾아보니 쉰 권짜리였다. 그랬을 터다. 열 권짜리 전집이야 있었겠는가. 인터넷에도 이 전집을 보고 자라난 경험을 써놓은 이들이 있다.

그랬을 터다. 회사가 망해버려 모르는 세대도 있겠지만 계몽사는 그야말로 굴지의 출판사였다. 전집 물을 주로 출판했지만 책을 제대로 만들어내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 출판사 책을 읽고 자란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그 출판사 책을 사주는 식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수금원들이다. 춘천서 성남으로 이사 오고, 성남에서도 이사가 잦았는데 수금원들은 잘도 찾아왔다. 이른바 방문 판매 시스템에 탄복했던 것. 지나고 보니 나는 일찌감치 기업 시스템에 관심 많았던 듯싶다. 전공을 이쪽으로 해볼 걸, 하고 후회해봤자 이미 너무 늦은 일.

한동안 전집 물 구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전집으로 하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작품 구성도 상당히 서구 편향적이라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다. 소꿉장난 할 적에 남자가 의사하고 여자가 간호사하는 것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여의사가 많아지면서 아이들의 성역할도 다양해지는 법이다. 어린 날 읽는 책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런데 어린 날의 경험은 이론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전집이었어도 품질이 떨어졌다는 인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어린아이가 흠을 느낄 수 없을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나, 한 영혼을 사로잡아 그 전집이 꾸며낸 상상의 세계에서 유영했던 사람에게는 질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계몽사 소년소년 세계문학전집은 일찌감치 서구 편향성도 이겨내었다. 유명한 동화들이야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국가들 작품도 들어가 있었으니 말이다.

또래들이 '자유 교양 문고'를 추억하며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며 나는 의아했다. 학교에서 책도 나눠주고 독후감도 쓰게 해주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주로 위인전을 받았다. 기억에 남는 인물은 강감찬 장군. 가난한 어미가 사준 전집을 읽으며 독서력을 키운 나는 책읽기의 맛을 일찌감치 깨우쳤고, 그래서 자유 교양 문고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던 듯싶다. 나는 읽을 수만 있다면 행복했다. 남들이 강제라고 느끼던 것을 나는 배려라고 여겼다. 책벌레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태어나는 모양이다.

이 전집은 나의 가보였다. 나이차 많이 나는 동생이 글을 읽을 줄 알게 돼 넘겨줄 때까지는. 이사를 더 자주 다니지 않았다면 그 전집은 여전히 남아 있을 터다. 그러나 잦은 이사 탓에 책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나는 이 전집을 잊을 수 없다. 나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주어서다. 이 전집은 나에게는 콩 나무였고 동아줄이었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듯한 암울한 환경에서 나를 꺼내주었다. 이곳만 보지 말고 다른 곳을 상상하게 해주었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더 큰 대가를 안겨다주기도 한다는 것을 믿게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읽기의 가치 가운데 최고로 치는 것이 희망을 꿈꾸게 하는 거라 여긴다. 도서 평론가가 되어 세상과 소통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도 이 덕목이다.

우리 시대에 희망은 있는가? 비정규직 문제, 대학 등록금 문제, 입시 제도 등을 따져보면 별반 나아진 게 없는 듯하다. 외려 희망은 더 없어 보인다. 그러니 책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절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고 떨쳐 일어나 희망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 말이다. 나만 잘 되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더 나은 삶을 위해 함께 꿈꾸어야 할 희망을 위해서 말이다. 고맙다,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아. 네가 있어 내가 있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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