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관계자에 '압구정 가슴녀' 정체 물었더니…"(<조선일보>) "'압구정 가슴녀' 클릭했더니 깜짝…"(<경향신문>) "검색어 오르내린 '압구정 가슴녀' 알고 보니"(<중앙일보>)" "실시간 검색어 '압구정 가슴녀'의 진실은?"(<동아일보>) "검색 1위 '압구정 가슴女' 네티즌 분노…왜?"(<매일경제>)
'압구정 가슴녀',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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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레시안 books'에는 일본의 지식인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펴냄)의 서평이 실렸다. 그 서평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전하면서, 여성이 '열광'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녀'의 유행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를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 '압구정 가슴녀'와 '분당선 대변녀', 공통점은…)
이런 서평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편집자인 기자가 붙인 제목이 바로 "'압구정 가슴녀'와 '분당선 대변녀', 공통점은…"이었다. 주말 내내 인터넷 공간을 달군 '압구정 가슴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고 많은 '○○녀' 중에 왜 '압구정 가슴녀'였냐고? 이 대목에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하다.
우선 '여성 혐오'를 상징하는 이미 인터넷 공간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던 '분당선 대변녀'에 대구가 되는 말이 필요했다. 머릿속에 연예 기획사의 마케팅 수단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수많은 '압구정 ○○녀'가 생각났다. 또 압구정역만 가면 보이는 얼굴, 가슴 성형 광고야말로 '여성 혐오'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뼈를 깎고 살을 붙이는 고통을 감내하는 한국 여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현실에 없었던 '압구정 가슴녀'가 탄생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이 서평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노출이 되고, 또 누리꾼 몇몇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제목을 등록하면서 '압구정 가슴녀'는 너도나도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검색어가 되었다. 거기다 언론들이 앞에서 열거한 제목으로 이런 분위기를 더욱더 부추겼다.
물론 수십 건의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 중에서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내용을 담은 기사는 없었다. 다들 "노이즈 마케팅" "압구정에서 새벽 시간에 가슴을 노출하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는 루머 때문" 등 누리꾼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소문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다였다. 그나마 <중앙일보> 정도가 "<프레시안> 기사 탓일 것"이라는 <네이버> 관계자의 말을 전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해프닝은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주장했던 대로, 일본 사회 못지않게 한국 사회가 얼마나 여성을 대상화하는데 익숙한 '여성 혐오' 사회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도대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압구정 가슴녀'를 클릭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런 점에서 이번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한 언론이 말하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낳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누리꾼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테스트라는 반응도 있다. 최근 들어 계속 등장하고 있는 '○○녀' 시리즈를 비판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대체 '압구정 가슴녀'가 뭐야?…29일 새벽부터 인터넷 난리법석", <국민일보> 2012년 4월 29일)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사실 이번 해프닝을 통해서 짚어봐야 할 더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압구정 가슴녀'가 포털 사이트의 중요한 검색어가 되고, 더 나아가 수십 명의 기자가 기사로 쓸 정도로 중요한 기삿거리로 취급되는 과정 자체야말로, 2012년 한국 사회에서 공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은 이미 1985년에 이렇게 경고했다.
(<1984>의) 조지 오웰은 우리가 ('빅 브라더'라고 불리는) 외부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의 미래상에선, 인간에게서 자율성과 분별력 그리고 역사를 박탈하기 위한 빅 브라더는 필요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 압제를 환영하고, 자신들의 사고력을 무력화하는 테크놀로지를 떠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웰은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오웰은 정보 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지나친 정보 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봐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비현실적 상황에 진실이 압도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 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죽도록 즐기기>(홍윤선 옮김, 굿인포메이션 펴냄), 9~11쪽)
'압구정 가슴녀'를 둘러싼 해프닝을 보면서, 이런 포스트먼의 때 이른 경고를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설사 '압구정 가슴녀'가 실재한들, 그것이 과연 포털 사이트에서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의 관심을 끌고, 더 나아가 기자 수십 명이 달려들어 기사화할 만큼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인가?
정말로 <1984>가 아니라 <멋진 신세계>가 옳았다. '압구정 가슴녀'가 남긴 뒷맛이 쓰다.
덧붙임
당장 이런 반론이 들린다.
"이 모든 게 '음험한' 또 '엉큼한' 낚시 제목 탓이 아닌가?"
맞다. 조금만 제목을 자극적으로 달면 물고기가 떡밥에 몰리듯이 파닥파닥 낚이는 이들이 부지기수니 '압구정 가슴녀'와 '분당선 대변녀'로 이른바 '낚시'를 해볼 의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목 보고 낚였다며, 내용은 읽어볼 생각도 안 하고 낚시 타령을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기자는 이렇게 되뇐다.
"나의 독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사람)지, 피스케스(Pisces, 물고기)가 아닌데…."
폴 발레리가 말했고, 최근에는 이효리도 다시 강조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읽는 기사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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