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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점거하냐고? 비어 있으니까!"

[프레시안 books] 고병권의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근원이 있는 샘물은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르고 흘러 움푹 팬 웅덩이들을 다 채운 뒤에야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물의 덕을 칭송하며 정치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한 맹자의 말이다. 고병권의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그린비 펴냄)를 읽으며 맹자의 저 말이 떠올랐다.

한국 사회가 샘물이 바다에 '닿음(이룸)'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 책은 샘물이 움푹 팬 웅덩이들과 그것을 어떻게 메우고 있는지를 실황 중계한다. 중요한 것은 샘물이 끝끝내 바다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라, 움푹 팬 웅덩이들을 다 채우고 있다는 뜻이다. 바다에 이름은 웅덩이를 다 메우고 난 이후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고병권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이 책은 르포르타주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내부의 작동 방식과, 거기 모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을 먹고 하루를 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허나 생태 보고서는 아니다.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의 대화, 식사, 의사소통은 뉴욕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실험이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전통과 도전의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고병권은 말한다.

책이, 혹은 월스트리트 점거가 묻는 것은 어떻게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오래된 질문은 우리의 생각을 그 대답으로 추동하며, 여기에 미디어는 늘 어떻게든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소박한 절규는 끊이지 않고 있다. "누가 몰라서 대출받나?", "가고 싶어서 대학에 가나?",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어떻게 사나"….

책에 나와 있는 고병권이 찍은 수많은 뉴욕의 사진들은, 우리들의 문제가 동시적이며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계 부채로 인해 부동산을 차압당한 중년 부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어 몸을 방치해야 하는 의료 보험 비 가입인, 학자금에 쫓겨 앞으로 십 수 년을 저당 잡혀야만 하는 대학생 등은 한국에서 칠레에서 미국에서 영국에서 동시에 사는 사람이다.

슬프게도 이제 뉴욕이라 새로울 것은 없다. 전 지구적인 절규의 동기화(synchronization)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 개혁에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다. 선거는 관습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거대 규모로 자행되는 자본의 만행에 질식사했다.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은 "난 이렇소"라고 그리고 "이렇게 해 주시오"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 할 수 없는, 그 이야기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한 자본에의 파산 요구이다. 대충 그런 사람들이 월스트리트를 점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점거'가 어째서 거번먼트인가? 선(禪)문답 같은 한 점거자의 말이 재미있다.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여기를 점거했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여기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8쪽)

월스트리트 점거는 민주주의의 지속에 대해, 민주주의란 샘물이 웅덩이를 메우는 과정이지 바다로 나아가려 함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한다. 월스트리트는 기업 지배 체제(corporatocracy), 금권 정치(plutocracy)의 상징이다. 이곳에 점거자들이 들어가 "셀프-거버닝(self-governing)을 하고 있다."(20쪽) 왜냐하면 월스트리트야말로 민주주의가 비어 있는 곳이며 거번먼트가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요구들이 이야기되고 그것이 흐를 때, 이미 바다로 나아감은 필연적일 것이다. 이런 매끄러운 상황은 자연스러워 보이면서 동시에 매우 이상적이어서 우리의 현실감과는 닿지 않는다. 한국에서 우리가 가지는 현실감들이 오히려 이러한 흐름을 기이하게 보게 만들지는 않는가. 요구들을 진지하게 다룸, 소수의 의견을 제도적으로 보장함, 개인 윤리의 결여가 아닌 사회적 해결의 부재–우리 역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셀프-거버닝이 필요하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 모이는 것이 필요하다.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월스트리트에 모여 있고, 세계의 텔레비전은 그들에게 질문한다. 누가 이렇게 모이도록 시켰는가. 무엇을 할 것이냐. 그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2008년 한국의 질문과 닮았다. "그래서 미국산 쇠고기에 반대하라 한 이들은 누구인가?", "이 집회는 누가 시켜서 나왔는가?" 이에 대해 지금의 월스트리트, 고병권의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는 그 누구도 아니며, '나'이자 동시에 '우리'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점거는 그 스스로의 확대를 그나마 가시적인 목표로 하지 어떤 주의 주장의 관철이나 가시적이며 바로 도래하는 변화를 위한 수단이 아님을 반복한다.

2008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라는 중심과 그 중심의 커다랗고 웅장한 스피커들, 100만 명이 모여서 아침이슬을 부르는 스펙터클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야당은 지속적으로 이명박에 반대하며 꾸준히 실패하고 있고, BBK는 식지 못하는 떡밥이 되어버렸으며,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중심에 있던 이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기실 2008년 이후의 민주주의적 정치는 멈추고 기계만 톱니에 맞춰 삐걱거리고 있다.

고병권은 이를 필시 한심하다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였지만 우리가 비판하던, 대변인 성명을 발표하던 이들과 어떤 차이도 낳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 멋대로 떠들게 하고 내버려두며, 그 안에서만 솟아나는 각자의 목소리들을 살려서 저 중심의 목소리를 끊었어야 했다. 이것은 월스트리트의 경험에 반사된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그 때 우리가 하지 못한 혹은 우리가 귀 기울이지 못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귀 기울여주는 일들을 통해서, 그래서 무엇이 생기는가? 이러한 목적론적인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렇게 우연히 모인 이후에 시작되는 거번먼트이다. 거번먼트는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로 관철할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영역이며 "예술적 기예"가 필요한 끊임없는 현재의 영역이다. 이러한 거번먼트-민주주의를 지속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99퍼센트가 서로를 메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과정 속에 민주주의의 본령이 있다.

훌륭한 사상가의 조건은 확고한 대답을 적절한 시기에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대립되는 질문을 자기 머릿속에 오래도록 품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월 스트리트 점거-도전은 이런 점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는 르포르타주이면서 동시에 고병권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이야기이다. 점거는 어떻게 확산되고 또한 수렴되는가, 점거 이후의 남은 여파, 사람들의 생태학과 동역학 등등 현장 바닥에 앉은 이들이 나누는 예민하고 흔한 주제들을 월스트리트 점거와 함께 밖으로 꺼내준다.

민주주의가 빈 공간을 점거하는 것은 그곳에 무엇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기 위한 터를 닦는 작업이다. 사람들이 먹고, 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완력이 강한 자 혹은 돈이 많은 자의 부당함이 배제될 수 있다. 단순하고 뻔하며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기업 지배 체제, 금권 정치의 영역이 거의 전부이다. 그곳은 민주주의가 빈 공간이며, 동시에 우리가 점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원리적으로 그렇다.

목적론적 사고의 유혹에 완강하게 버티면서 이들이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경험을 공유하는가에 대해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관찰=참여가 낳는 수많은 현상들이 책에 가득하다. 이것들은 우리 사회가 이미 경험했고 좌절했고 또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들이다. 지구 반대편의 지혜를 더해보자. 월스트리트 점거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행동 지침이 있다.

"①점거하자 ②말을 퍼뜨리자 ③선물하자 ④점거 상황을 체크하자 ⑤당신 자신을 교육하라." (62쪽)

다시 한 번, 2012년 5월 1일 세계 노동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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