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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개천'의 공포, 남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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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개천'의 공포, 남일이 아니다!

[프레시안 books] 최인기의 <가난의 시대>

여덝 살 때, 아빠의 사업이 망해서 '연립 주택촌'에서 벗어나 중랑천을 끼고 있는 주택가로 이사했다. 집에선 나를 속셈 학원에 보낼 여력은 있었다. 내성적인 나에게 말을 걸어준 첫 번째 친구는 늘 원피스를 입고 학원에 오는 여자아이였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우산 둘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그 아이는 계속 '똥개천' 쪽으로 향했다.

의아했다. 발걸음을 멈춘 그 아이의 '집'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연신 물을 양동이로 퍼 올리고 있었다. 동화책을 보여주겠다던 그 아이는 원피스를 입은 채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달려들어 세숫대야로 물을 퍼 올리기 시작했다. 좀 지나자 그 아이는 이사를 갔고, 이사 가는 날까지 나는 그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아이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아이 말고도 많은 판잣집에 살던 친구들이 있었다. 돌다리가 놓여있던 똥개천에서 같이 놀던 기억도 난다. 어느 순간 그 친구들과 판잣집을 이어놓는 내 기억의 회로는 끊어졌다. 그 많던 판잣집들은 '복개천'으로 '똥개천'의 이름이 바뀔 때쯤 사라졌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내 친구의 '범주'에서 사라졌다.

또 다른 기억. 이모는 언제나 홍수만 나면 1층이 통째로 잠기는 강남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았다.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언제나 물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나곤 했다.

어느 날 이모는 '부자'가 될 거라 했다. 이모네 아파트 단지를 '삼성 래미안'에서 재개발 할 거라 했다. 살던 사람들이 다 빠져 나와야 공사를 시작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공사가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모는 늘 엄마를 만날 때마다 아직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은 '돈 노리는 파렴치한 작자들'이 버티고 있어서 문제라고 했다.

▲ <가난의 시대>(최인기 지음, 동녘 펴냄). ⓒ동녘
최인기의 <가난의 시대>(동녘 펴냄)를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사람들의 기억이 샘솟듯 떠오른다. "그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하는 질문이 곧바로 떠올랐는데, 잔혹하고 끔찍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너무나 꼼꼼하게 일제 시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의 '빈민'의 역사를 기록한 탓에, 1990년대 어느 날엔가 사라진 사람들의 소재에 '맥락'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도시화의 과정에서 서울을 덮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철저히 '채'를 통해 수요 관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뼈가 빠지게 일해서 돈을 악착같이 모은 '가난한 사람들'과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난장이처럼 '몰락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분리해서 관리했다.

덕택에 가난했던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구조적으로 주어졌던 '가난'이라는 '빡빡함'에 대한 기억을 '낭만' 혹은 '경고'의 메시지로 온 몸에 각인했다. 하지만 그 한편에는 언제나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방당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묘사되어 왔기 때문에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와중에 이모와 나 역시 가난을 예외적이고, 파렴치한 작자들에게 주어지는 단죄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외환 위기 이전만 해도 국가의 그런 관리는 '적당히' 먹혔다. 산업의 고도화를 무리 없이 수행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완만하게라도 작동했기 때문이다. 과반수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론 조사에서 답하던 순간이었다. 마을 전체가 연고도 없는 경기도 광주에 집단 이주되어 노역하듯이 집과 일터를 다시 일궈야만 하고, 어린 아이가 철거된 동네에서 놀다가 집이 무너져 사경을 헤매는 동안 방치되고,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아이들이 질식하는 순간도 모두 '예외'로 유지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의 감수성을 탓할 수만은 없는 순간이었다.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의 말마따나 '괴물'인 상태를 유지하면 그런대로 '인간'의 탈이라도 쓰면서 살 '희망'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사라지지 않았던 '가난한 자'라는 '유령'들이 다시금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 계급)로 출몰한다.

일차적으로는 토건 사업의 덫이다. 건설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진행했던 1980년대의 '합동 재개발', 그리고 2000년대의 '뉴타운 사업'의 지나친 성황 덕택에 주택 분양가, 지가 모두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로 상징된 '토건 사업'은 자체의 구조적 덫에 걸려버렸다.

두 번째로는 외환 위기 이후 늘어난 비정규직화와 고용 불안이다. 특히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주체로 좌파나 우파나 목소리 높여 칭송하는 '청년'들의 불안정한 삶이 그렇다. 이들에게는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의 결과로 새로운 무대가 펼쳐졌다.

하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나마 사회적 자본이나 문화적 자본도 없는, 언제나 추방될 수밖에 없는 조르조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헐벗은 삶', 호모 사케르의 삶이 펼쳐진다. 둘, 그나마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의 자산을 까먹으면서 버틸 수 있다면 '잉여'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셋, 간신히 비정규직 자리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보해봐야 '워킹푸어'의 삶이 펼쳐진다. 이가 시리고, 건강 관리를 하지 못해 아프고, 경조사가 터지면 버는 족족 사라지고 외려 빚이 늘어난다. 넷, 그나마 스펙(specification)과 스토리를 쌓는 '자기 계발'에 간신히 성공해서 정규직 공채에 취직했을 경우에도 '집'은 엄두도 못 내고 부모의 집에 얹혀살기 일쑤다. 간신히 원룸이라도 '스스로' 구하면 그 빚을 갚는 데만도 오랜 시간을 소모한다. 그 사이에 회사에서 자리보전이 어려울 수도 있다. 사랑을 찾고 결혼을 생각하게 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는 게 이 모든 스테이지 청춘의 시나리오다.

각각의 스테이지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질시하지만, 모두 말 그대로 '푸어', 즉 가난해질 확률에 광범위하게 노출된다. 물론 경영학 서적이 인도하는 대로 '그럭저럭' 살기 위해 재테크 전략과 커리어 개발 전략으로 '생존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럭저럭 사는" 상황은 예외가 되어 버렸다. 애당초 이런 '생존 전쟁'의 스테이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까운 말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로 등장하게 된 '신 빈곤'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과 계속 떠밀려서 추방당하고, 근근이 하루를 살아갔던 노점상과 철거민으로 대표되는 '유령'들의 모습이 마주치게 된다. '살아남은' 기성세대들은 다시금 아파트에서 쫓겨나 전소된 포이동에 도달한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가난의 공포'와 '가난'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뭔 일이 벌어질 만한 상황이 된 걸까? 이제 '격발'의 순간이 오게 된 것일까?

<가난의 시대>는 책의 후반부인 '2부 : 도시 빈민 운동,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서 머뭇거린다. 빈민 운동이 봉착한 어려움과 상처 때문이다. '새로운 주체'는 등장하거나 탄생하거나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진단된다. 최인기의 경험이 그렇다. 1970년대 <페다고지>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들고 와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그들 스스로의 자생적인 운동을 주장하던 왕년의 명망가들의 상당수가 정치권에 투신하거나 서경석 같은 뉴라이트가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혁명 운동에서 빈민 운동도 하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며 말하던 운동권들의 많은 숫자가 집단적으로 정치권으로 투신하거나 시민 단체를 일구었다.

빈민 운동에서 빠져 나와 새롭게 '세련된 이름의' 시민 단체로 다가온 구 운동가들은 어느 날 '운동가'에서 '사회적 서비스 제공자'로 변신하며 빈민들에게 '인적 자본'으로 거듭나라는 세례를 주기도 했다. 국가는 명민하게 공식 부문으로 편입하라며 노점상을 시스템에 입각하여 관리하고, 무력을 직접 쓰기보다는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철거를 진행한다.

그 와중에 '실용주의' 운동가들과 '비타협적' 운동가들의 전선이 나뉘고, 이합집산이 진행된다. 지역 운동, 노동 운동, 독자 운동으로서의 빈민 운동들의 위치가 정립되지 않은 채 각개격파 당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와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에 대한 담담한 어조는 운동의 무기력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국가 관리 기법의 '진화'와 새로운 운동 방식의 '정체'는 짝패로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물론 최인기는 아직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싸우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인기는 외환 위기 이후 새로운 방식으로 진입한 운동가들과, '반 빈곤 운동'을 매개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보려 한다. 하지만 그 프레카리아트의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명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최인기는 장소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네트워크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구체적 삶의 문제를 건드리는 운동의 '장소'에 대한 고민하자고 주장한다. 책을 읽으면서 2010~11년, '젊은 활동가들'이 등장했던 동교동 두리반과 명동 마리의 사례를 참조한다면 저자와 함께 보되 다른 방향에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로 등장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의' 운동이 위치한 역사적 맥락을 <가난의 시대>를 통해 파악하고, '서울 점령자들'이나 '5·1 사회 총파업'을 통해서 그 현재성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는 것이야 말로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가난의 시대>는 지금 도래하는 관리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속속들이 해부할 수 있는 매뉴얼이다. 양극화와 신빈곤의 문제를 이제는 국가도 인정한다. 다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행정학과 경영학의 '관리 도구'가 작동하지 않아 풀지 못할 뿐이다. 이제 '가난한 자'는 철거민과 노점상이라는 '예외'가 아니다.

아슬아슬 '견디고' 있는 당신을 지지하던 발판이 해체되는 순간 곧바로 당신이 위치하게 될 위치이다. 따라서 당신이 가난해지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이 순간 신자유주의적으로 '경쟁에 찌들어' 사는 것이 아닌, '달리 사는 감각'으로 그 감각을 공유할 최소한의 준거 집단과 함께 실제로 '달리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틈입시키는 것. <가난의 시대>가 점점 많은 프레카리아트가 될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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