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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연이어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말년의 '파파 헤밍웨이'는 가진 것 없지만 열정만은 가득했던 자신의 '꼬꼬마' 시절을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여기서 '겸허하다'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아랫배에 힘을 준 채 독설을 내뱉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무릇 대가란 그런 법이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위대한 작가다운 훌륭한 솜씨로 그 일을 해낸다.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문학 수업을 받으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1920년경 파리 시절을, 수많은 문우들과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을 곱씹어 한 권의 책으로 남긴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즐겁게 (곱)씹었다'고 해야겠지만.
▲ <파리는 날마다 축제>(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이숲 펴냄). ⓒ이숲 |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은 역시 스콧 피츠제럴드와의 추억이다. 화려한 '재즈 시대'의 대변인이자 재능 있는 젊은 작가로, 무엇보다 요란한 스캔들 메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에게는 절친한 친구이자 은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무명 작가였던 헤밍웨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장편 데뷔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출간을 도운 사람이 그였고, 작품에 대한 조언과 '첨삭'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헤밍웨이가 문단에 자리 잡게 한 사람도 그였다. 나아가 헤밍웨이의 작업을, 헤밍웨이가 쌓게 될 작가로서의 경력을 자기 자신의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 역시도.
피츠제럴드의 우정에 보답이라도 하듯, 헤밍웨이는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제목의 챕터에서 커다란 애정을 담아 스콧의 첫 인상을 묘사한다.
스콧은 잘생기고 귀염성 있는 얼굴로 소년을 닮은 남자였다. 그는 무척이나 심하게 곱슬거리는 금발이었고 넓은 이마와 열정적이고 친근감 있는 눈빛에, 긴 입술은 우아한 아일랜드인의 입이었으며, 그것은 아름다운 입을 가진 소녀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턱은 잘 빚어져 있었고, 그리고 멋진 귀와 아름답고 거의 우아하기까지 하면서도 흉터가 하나도 없는 코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멋진 얼굴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아서, 거기다 피부색과 금발, 그리고 입까지 언급해야만 했다. 입은 스콧을 몰랐을 때도 그토록 자극적이었는데, 스콧을 알게 될수록 더욱 더 자극적이었다.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203쪽)
헤밍웨이의 재능은 사실 '장미물'에 있었던 걸까? 피츠제럴드가 들었다면 멋쩍게 웃으며 얼굴을 붉힐 법한 묘사.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이미 세상에 없었고, 헤밍웨이 또한 그런 뜻은 아니었으리라. "귀염성 있는 얼굴", "심하게 곱슬거리는 금발",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입"은 피츠제럴드가 성숙하지 못한 남자임을 암시하고, "아름답고 거의 우아하기까지 하면서도 흉터가 하나도 없는 코"는 싸움 따윈 모르는 겁쟁이란 뜻이며, "자극적인 입"은 둘도 없는 수다쟁이라는 말이다. 또한 "우아한 아일랜드의 입"이라는 표현은 피츠제럴드의 외가 혈통을 암시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대해 갖고 있는 전형적인 편견을, 다시 말해 정열적이고 재기발랄한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이미지를, 무엇보다 그의 음주벽을 환기시킨다. 섬세하고도 단정한 문장에 가려 쉬이 보이지 않지만, 헤밍웨이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뭐랄까…계집애지. 계집애고, 계집애이며, 계집애 같고, 또…그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계집애야. 술에 진탕 취해 노상 수다를 늘어놓는 그런 계집애."
이런 헤밍웨이의 태도는 이어지는 문단에서 훨씬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끊임없이 수다를 늘어놓는 피츠제럴드의 이야기에는 귀를 거의 기울이지 않으며("왜냐하면 그것은 연설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비만도와 그가 입은 브룩스 브라더스의 고급 양복을 관찰하던 헤밍웨이는 마침내 관찰을 그만두기로 마음먹는다.
"이 술집의 의자에 앉았을 때 다리가 몹시 짧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걸 빼고, 나는 그때부터 더 이상 중요한 사실을 알아볼 게 없었던 것이다."
헤밍웨이는 키 작은 자식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으로 이렇게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
"그가 정상적인 다리였다면 어쩌면 5센티미터는 더 키가 컸을 것이다."
▲ 스콧 피츠제럴드. |
그 중 백미는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피츠제럴드의 '물건'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다. 어느 날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던 헤밍웨이는 친구에게 무언가 고민이 있음을 직감한다. 먹는 둥 마는 둥 안절부절못하는 피츠제럴드와 인내심을 갖고 친구가 먼저 말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사려 깊은 헤밍웨이. 비즈니스 관계자와의 점심처럼 무미건조한 시간이 흐르고, 헤밍웨이가 후식으로 나온 체리파이와 마지막 포도주까지 해치운 후, 피츠제럴드는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는다.
"젤다(피츠제럴드의 부인)가 신체 구조상 나는 결코 그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다고 말했고, 그리고 이것이 그녀를 근본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네. 그녀는 크기에 관한 문제라고 말했네. 난 그녀가 그 얘기를 한 다음부터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고, 정말로 그것이 어떤가 알고 싶어졌다네."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254쪽)
아, 이 가련한 친구! 입으로만 늘어놓는 값싼 위로에는 관심 없던 '진짜 남자'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화장실로 데려가 직접 두 눈으로 그의 '물건'을 확인한다. 그리고 친구를 안심시킨다.
"자넨 완전히 정상이야." 내가 말한다. "자넨 문제없어. 자책할 이유는 하나도 없지. 자네가, 자네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축소되어 보이는 것뿐이라네. 루브르에 가서 조각상들을 보게나.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거울 속의 자네 모습을 보게나."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255쪽)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나열되는 그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심한 피츠제럴드가 "어쩌면 그 조각상들은 일반 크기가 아닐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여전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결국 그는 "다리가 몹시 짧은"(하지만 적어도 '물건'은 완전히 정상인) 친구를 몸소 루브르 박물관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조각상들의 하얗고 단단한 '물건' 앞에서 바쁘게 눈을 돌리는 친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그것이 활동을 하지 않을 때의 크기가 문제되는 건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건 또한 세워졌을 때의 크기에 달려있기도 하지. 각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나는 그에게 베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와, 알아두면 좋은 다른 어떤 여러 가지 방법들을 설명했다.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255쪽)
(참고로 '킬리만자로의 눈'에 따르면 헤밍웨이의 이상형은 "부드럽고 장미꽃잎 같고 꿀 같은 뱃가죽에 젖통이 크고, 엉덩이에 베개를 고일 필요가 없"는 여성이었던 것 같다.)
결국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가 가진 '물건'의 실제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가 무척이나 작은 남자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피츠제럴드는 계집애라고.
그래도 이 정도는 귀여운 편이다. 다른 이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를 보면 비로소 헤밍웨이의 호방한 언어 구사력을 확인할 수 있다. 비난을 넘어 조롱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모자라게 느껴지는 그런 표현들을. 이를테면 1949년, 출판인 찰스 스크리브너에게 보낸 편지. 사업상의 문제를 상의하던 헤밍웨이는 뜬금없이 피츠제럴드를 욕하기 시작한다. 일은 제쳐두고 예의 '물건' 사건까지 장황하게 늘어놓던 헤밍웨이는, 편지의 말미에서 그런 자신의 태도를 사과하며 뒤늦게 피츠제럴드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이런 칭찬이다.
"하지만 무식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부자들을 동경했음에도 그는 훌륭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스패니얼로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스콧 도널드슨 지음, 강미경 옮김, 갑인공방 펴냄), 378쪽)
아마도 헤밍웨이는 대단한 애견인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개에 대한 끔찍한 애정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곰곰이 생각하면 그는 코코스패니얼이나 그가 생전에 키웠던 스프린저스패니얼보다도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 다른 자리에서는 "살아 있을 때 개자식은 죽어도 개자식"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도 했으니, '개보다 못하다'는 마지막 말은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린 헤밍웨이 씨의 실수라고 보는 것이 공정한 일일 것이다.
반면 피츠제럴드에게는 정반대의 일화가 있다. 자신의 집을 방문한 젊은 작가에게 헤밍웨이의 칭찬을 늘어놓으며 <무기여 잘 있거라>의 일부분을 큰 소리로 낭독한 그는, 손님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이렇게 되묻는다.
"그와 같은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표현이 마음에 드는가? 내가 당신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다면 감명을 받겠는가?"
그리고 그는 정말 손님의 머리 위에 올라선다. 정확히 말하자면 올라서려고 용을 쓰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고 해야겠지만. 정말 눈물 나는 우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길. 그들의 관계가 단지 피츠제럴드의 일방적인 짝사랑만은 아니었으니까.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와 즐겁게 어울렸으며 또한 그에게 의지했다. 기꺼이 조언을 구했고, 생활이 어려울 때면 돈을 빌리기도 했다. 1920년대에 피츠제럴드에게 보낸 헤밍웨이의 편지들은 언뜻 무심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문우에 대한 걱정과 애정을 숨기지는 못한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
그리고 태양은 또다시 떠올랐다. 바로 헤밍웨이라는 이름의 태양이.
새로운 시대의 문학 영웅은 헤밍웨이였다. 그의 단호하면서도 건조한 문체와 강력한 목소리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었다. 피츠제럴드는 마흔도 되기 전에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비채 펴냄),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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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당신은 어떤 서사를 떠올릴지 모른다.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라는 격언을 관계 속에서 풀어낸, 야심으로 가득한 남자가 있고 그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는 여자가 있으며 마침내 남자는 성공하고 여자는 버림받는다는 친숙한 이야기.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와 <청춘의 덫>에서 정점을 찍었지만, 여전히 지겹게 반복되는 바로 그 서사 말이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수많은 의혹이 있었지만 그저 가십일 뿐이었다), 헤밍웨이를 두 드라마 모두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이종원의 자리에 대입하기는 어렵지 않다. 재능은 충만하지만 인간성은 바닥인 나쁜 남자(그것도 모자라 소설가)라는 익숙한 캐릭터. 우리는 이야기를 사랑하고, 이야기는 익숙할수록 좋은 법이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옛 연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남자처럼 피츠제럴드에게 받은 모든 영향을 집요하게 부정했고, 때론 사실을 호도하며 헛소문을 퍼트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국의 책임이 헤밍웨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헤밍웨이의 팬이자 찬미자였고, 헤밍웨이가 성공을 거둘 때면 광신자처럼 기뻐 날뛰었던" 것으로 모자라 "친구의 성공을 위해 애쓰다가 정작 자신의 작품에 쏟아 부었어야 할 정식적 에너지를 탕진"했던 피츠제럴드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헤밍웨이의 광신자였다는 사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30년 간 두 작가의 소설을 연구하고 또 강의해 온 스콧 도널드슨은 이렇게 말한다.
헤밍웨이와 마찬가지로 피츠제럴드의 성격 역시 어떻다고 꼬집어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에이보더 오피트가 '연극 같은 성격'이라고 분류한 성격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대개 여성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구성하는 공연에서 주인공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들은 일부러 붙임성 있게 굴면서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며, 그런 시도가 실패할 경우 스스로를 과장되게 낮추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 피츠제럴드의 예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런 사람들은 주목을 받지 못하느니 차라리 불명예를 택한다. 포도주 잔을 깨뜨리고, 손님들을 모욕하고, 싸움을 거는 등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저지르고 나면 그는 비굴할 정도로 용서를 청했다. 그가 헤밍웨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자신의 술주정을 사과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둘이 우정을 지속하는 동안 내내 그는 모든 잘못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 469쪽, 강조는 인용자)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내부 지향적이었던 헤밍웨이는 자기가 이상으로 삼은 이미지(초인)에 부응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끌어내 최대한으로 활용"했던 반면 "외부 지향적이고 자긍심이 부족했던 피츠제럴드는 평생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자신을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열등감에 시달려왔던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과장되게 연기했고, 그리하여 더욱 깊은 자기비하의 늪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소설도 쓸 수 없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술에 취한 채 자신이 빠진 늪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일밖에는.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용감하고, 절제할 줄 알고, 자신감 넘치는" 이상적인 남성상의 체현이라 할 헤밍웨이 앞에서 징징대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헤밍웨이는 그런 피츠제럴드에게 애정을 느끼면서도 그의 나약함을 도무지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성격 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그렇다. 이 역시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서사를 환기시킨다. 이를테면 연예인들의 '열애'와 화려한 결혼, 그리고 이혼에 이르는 서사를. 어쩌면 청소년들의 우정과 반목 그리고 설익은 사랑을 다룬 성장 드라마의 서사를. 곱상한데다 하얗고 안경까지 쓴 아이는 자신과 다른 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까만 피부와 두터운 입술과 커다란 주먹을 가진 친구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친구를 바라보며 어떤 혼란스러운 감정을… 아니, 여기까지 하자. 차라리 다시 한 번, 스콧 도널드슨의 문장을 빌려오는 것이 낫겠다. 위대한 작가들에게 어울리는 멋진 문장을. 그는 이렇게 썼다.
한 작가는 우정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추었고, 강철처럼 단단한 심장을 지녔던 또 한 명의 작가는 이를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 469쪽)
사실 그들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살았고, 서로 사랑했으며, 그로 인해 미워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으며 위대한 작품을 썼다. 여기까지.
대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들의 작품이다. 피츠제럴드 덕에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로 분한 로버트 레드포드를 보았고, 같은 배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볼 예정이며, '벤자민 버튼'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 또한 볼 수 있었다. 헤밍웨이는 고작 우리에게 산티아고 노인으로 분한 안소니 퀸의 실감나는 얼굴을 볼 기회를 주었을 뿐이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50년 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출판사에게 때마침 저작권이 만료된 그의 작품을 마음껏 출판하도록 하는 아량을 베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수십여 종의 <노인과 바다>에 더해 10종에 달하는 새로운 <노인과 바다>를 갖게 되었다. 과연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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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들의 우정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자못 분명해 보인다. 성격은 운명이고 운명은 그들의 우정을 시기했다.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던 1930년대에 그들의 관계는 이미 우정이라는 단어로는 감당하지 못할 의미들로 덧칠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편지를 보내 글쓰기를 독촉하고 또 격려하던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경멸하기 시작했고, 피츠제럴드 또한 그런 헤밍웨이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들은 각자(주로 헤밍웨이) 다른 이들에게(그러나 대개는 같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를 헐뜯었고, 때로는 비평과 소설을 통해(전적으로 헤밍웨이) 침을 뱉기도 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니까 1940년 피츠제럴드가 짧은 생을 마감한 후에도, 홀로 남아 계속해서 친구를 헐뜯었던 헤밍웨이의 마음. 나는 그게 궁금하다.
헤밍웨이는 "고인에 대해서는 가급적 좋게 이야기하는 전통을 철저히 무시했다." (심지어 사르트르조차 카뮈의 추도사를 통해 마지못해서나마 그 전통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개가 비스킷을 거부하지 않는 것처럼 피츠제럴드를 모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깎아내리려 했던 친구뿐 아니라 그 자신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당연하다. 사랑만 돌아오는 게 아니라 비난과 욕설도 그것을 뱉은 이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굳이 부메랑을 던지며 혀짤배기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고, 헤밍웨이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왜?
시중에 유통되는 표준 답안은 이렇다. 피츠제럴드 사후 10년이 흐른 1950년대 초반,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다. 한동안 절판되었던 피츠제럴드의 책들이 새로운 장정으로 재출간되었고, 둘 모두의 친구였던 에드먼드 윌슨(<핀란드 역으로>의 바로 그)의 편집으로 피츠제럴드의 유고까지 출간되면서 '피츠제럴드 붐'이라고 할 만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헤밍웨이는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는다. 피츠제럴드가 남긴 메모를 바탕으로 <밤은 부드러워>를 개정한 소설가 맬컴 카울리에게 그는 이렇게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네와 윌슨이 말끔하게 단장해준 덕분에 스콧은 20세기의 헨리 제임스가 됐지 뭔가."
한편,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헤밍웨이의 새 소설은 형편없는 평가를 받았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피츠제럴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경쟁으로 여기며 기어이 이기려 들었던 헤밍웨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1951년 찰스 스크리브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밍웨이는 이렇게 쓴다.
"스콧은 주정뱅이에 거짓말쟁이에다……겁에 질린 천사의 재능을 이용해 남의 돈을 우려냈습니다."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 378쪽)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경쟁심, 혹은 질투심의 발로였을 뿐일까. 분명 카울리나 스크리브너에게 한 말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부족한 조각들이 너무 많다. 그뿐이었다면 1952년 <노인과 바다>를 통해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명성을 회복하고,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에 대한 집착을 버렸어야, 적어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말았어야 한다.
▲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Scott Donaldson, Overlook Press). ⓒOverlook Press |
그럼에도 피츠제럴드의 전기 일부가 <라이프>에 공개되자 헤밍웨이는 잡지사를 비난한다. 이제 와 피츠제럴드의 음주벽을 다시 들추는 것은(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전기를 쓴 마이즈너에게는 그런 글을 쓰느니 "차라리 하수구를 청소하거나 매음굴에서 경비를 서거나 뚜쟁이 노릇을 하는 게 낫겠다"는 악담을 퍼부으며 "허름한 차고 앞에서 목을 매달거나 참수를 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카울리에게는 "죽어서도 이상한 사람들에게 갈가리 찢기고 이용당하다니 스콧이 너무 불쌍하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중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는 듯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헤밍웨이는 심지어 의 '스콧에게 바치는 서문'을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그를 몰랐지만, 나는 그의 너그러운 마음씨와 친절한 행동을 비롯해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해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짐작했겠지만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친절한 행동"은 서문에서 언급했으니 본문에서 쓰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하지만 피츠제럴드의 전기를 쓴 마이즈너에게 쓴 일곱 통의 편지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책에는 문제의 서문이 없다. 미망인 메리와 스크리브너 출판사의 편집장이 그 부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의 눈에 그것은 너무 과한 조롱으로 느껴졌으리라. 물론 그들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헤밍웨이가 피츠제럴드에 대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굳이 그런 서문을 써야했던 이유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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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할 차례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빈 구멍을 메우는 데에는 이야기만한 것도 없는 법이니까. 나는 헤밍웨이가 1938년에 발표한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을 떠올린다. 눈 덮인 킬리만자로가 보이는 아프리카의 고원. 사고로 다리를 다친 채 그 자리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한 소설가의 이야기를 헤밍웨이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킬리만자로는 높이 19710피트, 눈에 뒤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이라 한다.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 어로 '누가예 누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엔 말라 얼어 빠진 한 마리 표범의 시체가 놓여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헤밍웨이 단편소설집>(박경서 옮김, 아테네 펴냄), 91쪽)
헤밍웨이 역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어지는 소설을 통해 그 표범이 다름 아닌 주인공 해리임을, 그리고 해리는 헤밍웨이 그 자신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물어야겠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해리는, 헤밍웨이는, 그러니까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죽음을 눈앞에 둔 해리는 과거를 바라본다. 그가 걸었던 거리들을, 그의 곁을 스쳐간 사람들을, 그의 인생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던 그 모든 여자들을. 하지만 그는 그리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가 쓰려고 했던, 그러나 이제는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모든 글들에 대한 회한일 따름이다.
충분히 이해하고 훌륭한 글을 쓸 때까지는 쓰지 않기로 했던 것들도 이제는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써 보려다가 실패를 하는 경우도 없게 될 것이다. 어차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착수를 못한 것이다. 하여튼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헤밍웨이 단편소설집>, 96쪽)
이런 식의 진술은 소설 곳곳에서 반복된다. 이런 식이다.
이것은 그가 후일 글을 쓰려고 간직해 두었던 것 중의 하나다. (<헤밍웨이 단편소설집>, 99쪽)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안일만을 추구하며 자기 스스로 멸시했던 그런 인간이 되어 버린 매일의 생활이 그의 재능을 우둔하게 만들었고, 일에 대한 의욕마저 약하게 했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헤밍웨이 단편소설집>, 107쪽)
그러나 언젠가는 쓸 때가 오리라, 하고 늘 생각해왔다. 쓸 것은 참 많았다. 나는 이 세상의 변화를 보아 왔다. 그것은 표면의 사건뿐이 아니다. 사건도 많이 보아 왔으며 사람도 관찰하여 왔으나 그것보다는 미묘한 사회의 변화를 보아 왔던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회상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을 관찰해 왔으므로 그것을 쓰는 것은 나의 의무다. 그러나 이제는 쓰지 못하리라. (<헤밍웨이 단편소설집>, 120쪽)
그렇다. 나는 아직 파리에 대해선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다.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파리에 대해서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면 아직 써 본 일이 없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무엇을 썼던가. (<헤밍웨이 단편소설집>, 129쪽)
글쓰기에 대한 집착. 차라리 강박. 이것은 비단 '킬리만자로의 눈'뿐만 아니라 그가 썼던 거의 모든 글-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편지-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라도 아침 여덟 시면 책상 앞에 앉았던 그는 끊임없이 썼고, 피츠제럴드를 욕하는 와중에도 쓰기에 대한 자신의 강박을 털어놓기를 잊지 않았으며, 쓰기를 계속함으로써 돌아갈 길을 마련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구덩이를 파는 사람처럼 자신을 쓰기 속으로 더욱 깊이 몰아갔고, 그럼에도 언젠가 쓸 수 없는 날이 찾아 올 거라는 두려움을 끝내 떨쳐내지는 못했다. 정신과 의사인 어빈 얠럼과 문학비평가인 그의 아내 마릴린 얠럼은 그런 헤밍웨이의 성격을 이렇게 분석한다.
헤밍웨이는 초인의 이미지를 자신의 이상으로 채택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목표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기에 그는 자기회의와 자기 경멸에 끊임없이 발목을 붙잡혔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 457쪽)
헤밍웨이 또한 자신이 그 목표에 결코 도달할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그렇기에 그는 서쪽 봉우리 근처에서 얼어 죽은 표범을, 고립무원에서 다리를 다친 채 죽어가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찾아 그곳에 갔고, 결국 실패한 채 죽어갔다. 훗날의 헤밍웨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자기 예언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글을 쓰지 않음으로써 파멸해갔던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두려움과 절망이 겉으로 드러난 또 다른 자신에 다름 아니었다. 언젠가 날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을 두렵게 예감하는 나비 앞에서, 더러워진 날개로 땅을 기어 다니는 병든 나비였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피츠제럴드를 공격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의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 끝까지 쓰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피츠제럴드를 공격하고, 공격하고, 공격했던 헤밍웨이는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피츠제럴드가 죽은 후에도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두려움이라는 무형의 존재로 화한 피츠제럴드는 그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또한 그가 피츠제럴드를 온전히 증오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 누구도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증오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츠제럴드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에 대한 하루키의 단평에는 공정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하루키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은 제아무리 현실에 가혹하게 시달려도 글에 대한 신뢰를 거의 잃지 않았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은 글을 씀으로써 구제되리라 굳게 믿었다. 아내의 발광도, 세간의 냉랭한 묵살도, 서서히 육체를 좀먹어가는 알코올도,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빚도 그 뜨거운 믿음을 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글을 통한 구원을 믿지 못해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옛 기숙사 친구 헤밍웨이의 운명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죽음 직전까지 매달리듯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이 소설만 완성하면……' 하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모든 것이 회복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314쪽)
피츠제럴드에 대한 부분은 모르겠다.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은 누구나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 하루키는 피츠제럴드의 열렬한 팬이고, 분명 자신만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헤밍웨이는 애초에 글을 통한 구원 따위는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것, 멈추지 않고 쓰는 것, 그리하여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이것이 구원이 아님은 헤밍웨이 스스로 증명한 바 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죽음을 불신자의 비겁한 선택으로 몰아가는 것은 일종의 근본주의적인 폭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헤밍웨이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해석들이, 그만큼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저 그의 글을 곰곰이 곱씹을 뿐이다. 이를테면 이런 글을.
글을 쓰는 일은 잘해야 외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작가를 위한 단체는 외로움을 덜어주지만 글이 좋아지는가 하는 점에는 회의가 듭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면 작가의 공적인 위상은 올라가지만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지요.
혼자 일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말 훌륭한 작가라면 매일 영원의 세계를 직면해야 합니다. 아니면 영원의 세계가 없다는 것을 직면해야겠죠. ('노벨 문학상 수락 연설', <헤밍웨이의 글쓰기>(래리 필립스 엮음, 이혜경 옮김, 스마트비즈니스 펴냄), 79쪽)
그러니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그는 정직한 작가라면 영원의 세계를, 혹은 영원의 세계가 없다는 것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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