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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소녀, 천문대 '계산기'로 살다 죽은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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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소녀, 천문대 '계산기'로 살다 죽은 사연은…

[이명현의 '사이홀릭'] 조지 존슨의 <리비트의 별>

오랜만에 소백산 천문대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사람과 함께 과학과 문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관측실 책꽂이에 제본이 되어 꽂혀 있는 1988년의 관측 일지를 꺼내들었다. 여러 장을 넘기자 낯익은 글씨가 나타났다. 내가 쓴 관측 일지였다. 소백산 천문대에 올 때마다 들춰보지만 볼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소백산 천문대에서는 여전히 변광성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밝기가 변하는 별을 변광성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세페이드 변광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평균 밝기와 그 밝기가 변하는 주기 사이에 비례 관계를 보이는 특이한 변광성이다. 주기는 거리와는 상관이 없는 값인 반면 겉보기 밝기는 거리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밝기 관계를 이용하면 다른 곳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 있다.

천문학자는 다른 은하에 속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와 겉보기 밝기를 관측한 후 이 관계식을 이용해서 그 은하까지의 거리를 구하곤 한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사용해서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처녀자리 은하단에 속한 은하들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관측했고 그 은하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지구에 가만히 앉아서도 우주의 크기를 잴 수 있는 막강한 도구를 갖게 된 것이다.

내가 공부했던 몇몇 천문학 교과서에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밝기 관계를 발견한 사람은 여성 천문학자 '리비트'라고 짧게 적혀 있곤 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늘 궁금했다. <리비트의 별>(조지 존슨 지음, 김희준 옮김, 궁리 펴냄)을 펼치면서 내심 드디어 나의 궁금증이 모두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은이가 쓴 서문을 읽는 순간 그런 기대는 접었다. <리비트의 별> 속 헨리에타 스윈 리비트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아련한 인물이었다.

"헨리에타 스윈 리비트는 제대로 된 전기로 남을 만한 인물이지만 그 자취가 너무나 희미해 영영 그럴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에게서 일기도, 몇 상자의 편지도, 과학과 관련된 회고록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전기에 관한 참고 도서나 각종 인명사전에 몇 문단으로, 혹은 천문학 입문 교재에 각주나 옆쪽의 박스로 처리되어 소개될 뿐이다."

그래도 이 책 속의 작은 불빛을 따라서 그녀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리비트는 오벌린 대학을 거쳐서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다. 4학년이 되어서야 당시 하버드 천문대 대장이었던 에드워드 피커링의 천문학 수업을 들었는데, A(-) 학점을 받았다. 리비트의 지적인 능력과 성취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충분했던 것 같다.

"1892년 스물네 살 생일이 오기 얼마 전에 헨리에타는 졸업 증서를 받고 졸업했는데, 그 증서에는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하버드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기에 충분한 과정을 모두 마쳤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남았고 그다음 해에는 대학원 학점을 따고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천문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 <리비트의 별>(조지 존슨 지음, 김희준 옮김, 궁리 펴냄). ⓒ궁리
하지만 리비트는 당시 모든 다른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천문학자'로서가 아니라 관측 자료를 그저 분석만 하는 일종의 '컴퓨터'로서 하버드 천문대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버드 천문대의 대장이었던 피커링은 리비트에게 별의 밝기를 측정해서 등급을 매기는 일을 시켰다.

시간에 따라서 빛이 변하는 변광성을 찾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별의 밝기를 측정하는 '컴퓨터'였을 뿐 '왜 그런지를 알아내는 것'은 결코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동료의 표현을 빌자면 리비트는 이 고생스러운 일에 대해서 겉으로는 "거의 종교적 열정"을 갖고 몰입하면서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리비트 자신이 발견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밝기 관계에 대한 논문은 1912년 하버드 천문대 회보에 피커링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단지 논문을 시작하면서 "소마젤란성운에 들어 있는 25개 변광성의 주기에 관한 다음 내용은 리비트 양이 작성했다"라고 기록되었을 뿐이었다.

이 논문은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믿을 만한 도구가 되었다. 리비트 자신이 인지했든 못했든 그녀의 발견은 현대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허블의 우주 팽창 발견도 이 논문의 결과를 응용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리비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리비트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일에 대해서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편지나 일기 같은 내면적인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그녀는 단순히 별의 등급을 결정하는 작업을 뛰어넘어서 별 자체에 대해서 간절히 알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밝기 관계를 발견한 후에도 그녀는 별의 등급을 결정하는 지루한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피커링이 자신의 스태프가 '일하기'를 바랐지 '생각하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천문학자'라고 여겼지만 리비트의 타이틀은 끝까지 '조수'였다.

"그녀가 죽기 1년 전 1920년에 인구 조사원이 린네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이웃 중에는 교사, 캔디 회사 판매원, 은행원, 감사가 있었다.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자 리비트는 솔직하게 그러나 약간 도전적으로 '천문학자'라고 답했다."

그녀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의 초고를 쓰고는 1896년에 배를 타고 영국 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2년을 보냈다. 어디로 갔는지 누구와 함께 갔는지 우리는 모른다. 리비트는 잠적과 복귀를 반복한다. 때로는 건강이 문제였고 때로는 가족을 도와야만 했다. 그녀 자신의 건강도 늘 지속적인 작업을 방해했다.

그래도 그녀의 작업을 인정하고 칭송하는 움직임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국제천문연맹 제1회 총회에서는 리비트 그녀 자신도 속했던 항성측광위원회가 그녀의 "천문학에 대한 위대한 봉사"를 칭송했다. 1925년에는 스웨덴의 한 나이 많은 수학자가 "나는 당신을 1926년 노벨 물리학상에 추천하려고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수학자는 그녀가 죽은 줄도 몰랐다. 이 편지를 대신 받은 당시 하버드 천문대 대장이었던 또 다른 남성 천문학자 할로 섀플리는 리비트에 대한 최소한의 칭찬을 하고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슬쩍 생색을 내는 답장을 보냈다. 섀플리는 그 상에 자신을 추천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리비트는 저급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일을 진짜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늘 조수였다. 아쉬움이 남는 생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니 캐넌의 일기에 이렇게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12월 12일. 낮부터 비가 오다가 밤에는 폭우로 변했다. 헨리에타는 오후 10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남긴 것은 자기 삶만큼이나 파편적인 양탄자와 접는 스크린 같은 잡동사니였다. 당시의 희극 뮤지컬 를 패러디해서 쓴 <천문대 피나포어>의 합창은 "천문학자는 불쌍한 인간이네"라고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리비트 같은 여성 컴퓨터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런 노랫말이 이어진다.

"그는 돔을 열고 바퀴를 돌려야 하지
그러고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별을 관찰해야지
그는 춥더라도 밤늦게까지 수고하고
그리고 괜찮은 급여는 기대도 말고"

<천문대 피나포어>의 다른 부분에서는 '컴퓨터' 전원이 부르는 합창이 튀어나온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우리의 임무는 계산이라네
우리는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우리의 기록은 멋쟁이라네"

<리비트의 별> 40쪽에 나오는 사진에는 이 노래를 합창하는 '컴퓨터'들의 모습이 보인다. 문득 그곳에 리비트도 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헨리에타 스윈 리비트가 이 노래를 같이 부르는 것을 상상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뮤지컬이 쓰인 것은 1879년이었지만 1929년 송년 이브에야 초연되었는데 그때에는 그녀가 이미 죽고 없었다."

열정적이었지만 고단했던 미스 리비트. 그래서일까 리비트가 꼭 그 사진 속에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합창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시대는 변했지만 그녀가 처했던 고통은 이 시대에도 남아있다고 그녀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리비트의 별>을 다 읽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진 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안녕, 미스 리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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