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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또 학살…반복되는 광기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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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또 학살…반복되는 광기를 고발한다!

[親Book] <인디언 마을 공화국>·<아마존 최후의 부족>

원주민 절멸은 불가피했을까?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샌니콜러스 섬에는 약 300명의 인디언이 살았다. 그러나 섬 주위에 수달과 물개가 풍부하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인디언은 돈벌이에 눈이 먼 미국 백인에게 학살당하고 겨우 7명만 살아남았다. 나머지 7명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강제 이주된 뒤 모조리 죽었다.

강제 이주를 거부한 마지막 인디언 여성은 고립된 무인도에서 20여 년을 홀로 살아남았다. 이 여성은 1853년 수색대에 의해 잡히고 나서 선교사단으로 보내졌고, 2주 후에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와 함께 샌니콜러스 인디언 부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48년 뒤인 1908년 11월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야히 부족 인디언 남성 한 명이 발견되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최후의 인디언 '이시'이다.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865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백인 목장주들은 돈벌이에 눈이 멀어 야히 부족 인디언들을 한꺼번에 대량 학살해 버렸다.

이시는 대량 학살을 피해 달아나 고립된 상태에서 숨어 살았다. 이시는 발견된 지 4년 반 만에 박물관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당시 이시는 석기 시대에서 곧장 현대의 문명 세계로 들어온 '미개인'으로서 화제의 대상이었고, 그의 시신은 의사들의 칼로 부검이 실시되어, 뇌는 스미소니언박물관에 비밀리에 보관되었다.

사후에 무참하게 난도질당한 이시의 경우는 예외가 아니라 아주 흔한 일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 이주민은 남쪽의 낙원 같은 섬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해 멸종시켰다. 이들은 칼이 잘 드는지 안 드는지 실험하기 위해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을 앞에 두고 팔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마치 고기를 썰 듯 칼질을 해대기도 했다.

1869년 태즈메이니아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원주민이 죽자 파리 떼처럼 달려든 백인 의사들은 원주민의 시신에서 머리를, 손발을, 귀와 코를 자르는 식으로 마치 전리품 취하듯 시신의 일부를 기념품으로 잘라서 가져갔다. 심지어 어떤 백인 의사는 그 원주민의 피부로 담배쌈지를 만들기도 했다.

계속되는 살해와 멸종!

1970년대 초 브라질의 군사 독재 정권은 아마존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개척민에게 250에이커씩을 최저 가격으로 경매했다.

1984년 포장 도로가 생기자 아마존의 혼도니아 한 주에만 10년 동안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이주민들이 몰렸다. 그리고 해마다 300만 헥타르 이상의 숲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존 밀림은 전무후무한 속도로 순식간에 척박한 목초지와 농토로 바뀌었다. 그리고 당연히 돈벌이에 눈이 먼 개척민 농장주는 아마존 인디언을 무참히 학살하기 시작했다.

2009년 4월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2646명에게 날아든 회사의 정리 해고 통지서에 맞서 파업 투쟁을 벌였다. 파업 투쟁은 인디언을 학살하던 그 백인들을 연상시킬 만큼 잔인하고도 무자비한 경찰 특공대의 진압 작전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14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정리 해고를 당한다.

그리고 지난 3월 31일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 아무개 씨가 자신이 살던 임대 아파트 23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림으로써 삶을 마감했다. 정리 해고자 가운데 스물두 번째, 계속되는 죽음의 행렬이다. 이는 자살이라기보다 명백히 쌍용자동차 자본가의 해고자 살해 사건이다.

경쟁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개발과 성장, 개척과 프론티어 이데올로기의 이름 아래 학살하는 근대화된 대한민국의 민낯이기도 하다.

▲<인디언 마을 공화국>(여치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여치헌의 <인디언 마을 공화국>(휴머니스트 펴냄)을 읽다보면 근대 국민 국가의 기본 속성은 다름 아닌 폭력과 배제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근대 국민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결국 국가 폭력과 살해에 스스로 동참하는 살인자가 자신도 모르게 된다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된다.

사실 그래서 여치헌의 <인디언 마을 공화국>과 몬테 릴의 <아마존 최후의 부족>(정회성 옮김, 아카이브 펴냄)을 읽는 시간 내내 불편했다. 얼굴 흰 미국 국민은 다름 아니라 지금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폭력과 배제의 살인 폭력 국가 국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미국을 추종하는 경지를 넘어 뼛속까지 친미 친일하는 매국노들이 정치 경제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있으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과 이주 노동자를 살해하고 배제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 자신의 민낯을 대면해야만 하는 고통스런 시간이기도 했다.

여치헌은 드물게 꼼꼼한 자료 섭렵과 법학을 전공한 사람다운 냉정한 논리로, 그러면서도 오늘날 산업 국가의 폭력과 배제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숨기지 않으면서, 인디언들이 왜 국가를 만들지 않은 부족 사회인으로 멸종해 갔는지 차분히 이야기한다. 릴은 아마존 원주민 추방과 학살 그리고 백인 농장주의 약탈의 역사를 그림 그리듯이 보여준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복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의 세상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애국가, 청와대와 국회, 법원, 경찰, 신사임당과 세종대왕 등이 그려진 지폐, 온라인 대출과 송금, 자동차, 대형 할인점, 손전화, 컴퓨터…. 그러나 이런 제도, 물건, 화폐 그리고 근대화되고 산업화된 국민 국가가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당연한 것 또한 절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세상이야말로 너무나 이상하고 터무니없이 기괴한 세상이다.

이런 끔찍한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과 배제, 전 국민을 모래알로 만들어놓고 채무 노예로 만들어놓는 이 세상의 핵심에 국가가 있다. 문제의 근원은 국가이다. 모든 국민을 살인 공범자로 만들어버리는 이 기괴한 국가 체제 자체를 그대로 두고서는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지 국가를 목소리 높여 외치는 이른바 진보 지식인과 정치인은 국가보다 더 오래되고 남김없이 파괴되어 멸종되어 버린 사회의 복원을 성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얼굴 흰 백인과 똑같은 맹목의 국가주의자들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복원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모든 자유인들의 어깨 위에 내려진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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