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당시 내가 머물렀던 대학가의 고민스런 풍경과 어울려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당시 대학생의 연합 조직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8월이 되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범민족대회'라는 걸 개최했다.
당시 초짜이던 나는 뭣도 모르고 범민족대회가 열렸던 대학까지 선배를 따라 얼떨결에 갔다가 그 안에 3일을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다. 통일에 대한 신심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3일 동안 나는 무엇이 이토록 많은 이들을 민족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르게 만들 수 있는지 무척 신기하고 의아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해에 일어났던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의 죽음(당시 그는 등록금 투쟁에 나섰다가 폭력적인 시위 진압의 희생양이 된 새내기 대학생이다)이나 여러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약하나마 분노가 일었지만,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도무지 그러지 못했다(당시 북한에 대한 태도는 오늘날에 볼 수 있는 '인도주의적' 입장과도 미묘하게 달랐다는 걸 감안해주기 바란다). 이후 한국사에 대한 이해라든가 하는 지적 포장을 통해 통일의 정당성에 일정하게 수긍하게 되었지만, 민족 자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당시의 나에게 여전히 물음표였다.
그러던 차에 민족이란 사실 그 실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가 표상하듯 오래된 것도 아닌, 근대의 역사적 형성과 궤를 같이 하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는 앤더슨의 책은 무척 통쾌하게 다가왔다. 인류학자이자 역사가인 저자가 그 상상의 공동체가 어떻게 그토록 대단한 위력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소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점이 아쉬웠지만, 객기에 찼던 나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민족이라는 편협한 이해보다는 더 보편적이고 더 넓은 "인류의 문제" 혹은 "계급의 문제"에 집중해야 할 이유였다.
▲ <공감의 진화>(폴 에얼릭·로버트 온스타인 지음, 고기탁 옮김, 에이도스 펴냄). ⓒ에이도스 |
책의 저자들이 도덕 철학자라거나 사회 운동가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터다. 하지만 에얼릭은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다. 그의 입장을 굳이 분류한다면 인간의 진화가 지닌 특이함, 즉 생물학적인 유전자 선택 과정과 더불어 이를 제한하고 분기시켜며 가속하고 때로는 지연시키기도 하는 인간의 문화적 차원과 둘 사이의 상호 작용에 주목하는 이른바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론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소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몰라도, 1980년대 이후 인류학과 생물학(그리고 때로는 경제학까지도) 문화가 인류 진화 과정에 끼친 독특한 차원에 꽤나 주의를 기울여 왔다. 에얼릭의 <인간의 본성(들)>(전방욱 옮김, 이마고 펴냄)이 이러한 공진화론에 대한 이론적인 요약—사실 이 입장에 관한 가장 체계적이고 잘 정리된 접근은 피터 리처슨과 로버트 보이드의 <유전자만이 아니다>(김준홍 옮김, 이음 펴냄)이다—이라면, 공진화론에서 도출되는 주요한 결론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게 된 위기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책이 <공감의 진화>이다.
책의 주장은 원제인 "외줄에 선 인류(humanity on a tightrope)"로 압축될 수 있겠다. 오늘날 인류에게 산적한 문제 특히 지구 온난화, 환경 재앙, 핵 위기는 현재 국민 국가의 틀로는 풀 수 없는 문제다. 아이러니한 점은 가족이든 국민 국가든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결사체가 바로 진화의 과정에서 보다 유리한 생존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선택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던 그 결사체들이 너무 효과적이었던 나머지 오늘날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만일 인류가 살아남고자 한다면 여기서 진화의 지혜와 상상력에 기대어 한 번의 도약을 더 이뤄내야 한다.
이러한 도약을 위해 저자들이 제시하는 단서의 한 조각은 인류 진화의 유구한 역사다. 오늘날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이나 국민 국가는 결코 자연스럽거나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다. 과거 우리는 훨씬 크고 넓은 "우리"를 지녔던 바 있다. 종족 번식의 편의성에 따른 모계 중심 사회의 잔존하는 흔적들은 가부장 중심의 가족을 넘어선 형태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뇌는 생래적으로 공감 능력 및 도움 성향을 갖추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공감 능력이 "우리"를 낳았다. 마이클 토마셀로의 유명한 유아 실험이 보여주듯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별도의 교육 없이도 타인을 도우려는 능력과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인간과 영장류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다(<이기적 원숭이와 이타적 인간>(마이클 토마셀로 지음, 허준석 옮김, 이음 펴냄)). 인간은 발달된 거울 신경 세포 덕분에 타인의 처지와 감정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고 이를 제 것으로 체화할 수 있다. (물론, 프랜시스 드 왈 등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인간만 이러한 거울 신경 세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고 거울 신경 세포는 영장류 및 일부의 포유류와 조류에게서도 널리 발견된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상황은 무척 희망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모순적이고 다양한 성향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자신과 타인들을 이미 수없이 경험해 왔다. 사실, 이 방면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이기적인 인간만 판치고 날뛰었다면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역사의 종말이 이미 몇 번은 찾아오고도 남았음 직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들이 많고 그 본성이 기회주의적인 데에도 세상이 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요컨대, 인간 진화의 역사는 타인과 공감하고 협동하려는 생래적/문화적 성향이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 이면의 이기성을 눌러온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를 달성해온 여러 방식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했던 기제의 하나가 우리와 타인을 적절하게 구분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다.
"외부의 적은 우리를 단결하게 만든다"는 세속의 지혜는 만고의 진리인 셈이다. 이러한 피아의 구분은 자원의 획득과 활용을 둘러싼 환경이 치열해질 때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역설적이지만 타자와의 격렬한 대립을 통해 우리는 동지애를, 전우애를, 그리고 형제/자매애를 나누고 이러한 유대는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외부와의 갈등을 격렬하게 겪을수록 내부적 단결은 단단해진다.
요컨대 우리를 식별하고 타인을 배척하는 것-더 큰 적을 만드는 것-은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기심의 발흥을 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셈이다. 사회, 경제, 역사적인 요소를 과감히 떼어내고 진화라는 맨 눈으로 바라볼 때, 인간 사회의 성공적인 결사체들은 이렇듯 우리와 다른 그 무엇으로 외부를 표상하고 그 명분 아래 하나로 뭉쳐서 보다 높은 성과를 내는 조직인 것이다.
에얼릭과 온스타인의 책은 지금까지 가장 큰 힘을 발휘해온 진화적 귀결물들이 이제 지구적인 위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후 변화, 환경 오염, 전염병에 취약한 환경, 핵전쟁의 잠재적 영향, 인종 차별주의, 성 차별, 경제적 불평등"이 그 대표적인 목록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인간의 적응을 도와온 그 기제가 이제 거꾸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아쉽지만 이 대목에서 에얼릭과 온스타인은 분명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분명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선언 자체가 되레 정직하지 못한 것일지 모르겠다. 다시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 그들은 외줄 위에 올라탄 곡예사를 볼 때 우리의 거울 신경 세포와 조응하는 그 공감 능력을 서커스 밖으로 확장시키자고 말한다.
"우리는 오늘날 비틀거리는 문명이라는 외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즉 우리나라의 시민 동료들과 지구상의 70억 시민 동료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성공한다면 아득히 먼 미래에 외줄 위에서 걸을 기회를 얻게 될 무수히 많은 호모사피엔스들과 한 몸이 되어 움직여야 한다."
이쯤 되면, 존 레논의 명곡 '이매진(imagine)'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라들이 없다고 상상하면 전쟁도 없지 않겠냐는 반문 말이다. 물론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는 아닐진대 아마도 언젠가는 당신도 우리와 동참해서 세계가 하나로 살게 될 것이다."
에얼릭과 온스타인의 해법이 유구한 진화의 역사에서 도출한 일종의 의지적 낙관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함께 지적 비관도 함께 고개를 쳐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류사적 위기라는 수사학이 국민 국가들의 첨예한 이해관계에 뒷전에 놓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리"와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고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은 책에 나와 있는 것 이상의 용기와 노력 그리고 희생을 요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우리"를 우리이게 해주는 기제들이 오랜 진화의 작용이라면 이를 더 큰 틀에 맞춰 재조립하고 이를 다시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쉽게 낙관할 수 없는 과업이다. 저자들 스스로 시인하듯 진화의 역사란 언제나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외줄 타기가 아니던가?
시장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는 21세기 한국에서 유전자 보존의 욕구를 맨 몸으로 노출하는 가족 이기적 사교육 열풍이나 국민 국가를 넘어선 세계적 조정의 필요성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지만 도무지 쉽게 진화되지 않는 세계 금융 위기의 위태한 현재 모습들은 이러한 저자들의 낙관이 쉽게 의지로 승화되기 힘들다는 대변한다.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현존하는 진화의 안정적인 문화적 결과물을 보다 성공적인 모습으로 녹여내기 위한 "이행"의 전략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안" 가족인가? 가족의 약화 혹은 해체인가? 국민 국가들 사이의 협력 증대란 어떤 모습일까? 이른바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희생하면서 공정하고 효율적인 지구적 거버넌스의 등장에 어느 정도나 헌신할 수 있을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나이츠>(1997년)는 1980년대 가정용 비디오의 부상으로 쇠락해간 미국 극장용 성인 영화 주변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따뜻하고도 인상적인 장면은 그들이 하나의 대안 가족으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평안을 얻는 장면이다. 어쩌면 새로운 돌파구란 자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비틀어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화'라는 무척이나 희망적이지만 또한 무척이나 느린 리듬을 지닌 말에 비추어본다면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진화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이웃 프로젝트(The Neighborhood Project)>(Little, Brown and Company 펴냄, 2011년)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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