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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가루 집안, 아비 죽음 앞에서 쇼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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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가루 집안, 아비 죽음 앞에서 쇼쇼쇼!

[김성희의 '뒤적뒤적'] 조너선 트로퍼의 <당신 없는 일주일>

"목적을 가지고 책을 펴고 이익을 얻고 책을 덮으라."

어릴 적 집에 굴러다니던 나무필통에 새겨져 있던 구절이다. 누가 어디서 한 이야기인지 모르나 대체로 맞는 말이라 여겨진다. 왜 읽는지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그 속도나 역점을 두고 접하는 부분, 시각이 달라져 같은 책에서도 얻는 게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거슬리긴 한다. 실용적 독서를 부추기는 듯해서다. 꼭 뭘 얻으려고 책을 읽어야 할까, 그냥 재미로-하긴 이것도 목적이 되긴 하겠다. 흔히 말하는 시간 죽이기 용으로-읽을 수는 없을까. 그 재미란 것을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까지로 넓히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대체로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인 잡식성 독서인으로 갖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번엔 소설이 손에 잡혔다. 뉴욕 맨해튼빌 칼리지 영문학 교수가 썼다는데 영 낯설다. 20여 개국에서 작품이 번역된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니 그럴 만하다. (문학적 소양이 깊진 않아도 국어 교육 덕에 작가와 작품은 많이 아는 편이다.) '재미없으면 덮고 말지' 하는 심사로 별 기대를 않고 펼쳤는데 의외다. 흡인력이 뛰어나 단번에 끝까지 읽고 말았다.

▲ <당신 없는 일주일>(조너선 트로퍼 지음, 오세원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하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시바를 치러 달라고 유언을 해서 4남매가 모인다. 시바란 유대교에서 7일간 고인을 추모하는, 우리로 치면 삼우제 비슷한 추도 행사. 1년에 한두 번 얼굴을 맞대고 그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이들이 모친과 함께 고향집에서 꼼짝없이 일주일을 부대껴야 한다. 이쯤 되면 이야기는 뻔하다. 서로의 추억을 나누는 흐뭇한 이야기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상처를 헤집고 갈등을 겪다가 그래도 종내는 가족 간의 화해로 마무리되는 줄거리 아니겠는가. 이 과정에서 때로는 뭉클하고 때로는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구조다.

제한된 시간, 한정된 공간이란 이야기 틀은 긴장을 조성하기 맞춤이라선지 애거서 크리스티 등 추리 작가들이 애용하는 무대 장치다. 출구와 입구가 정해졌으니 결국은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다채로운 사연으로 승부하는 형식인데 이 소설에선 번득이는 묘사와 삶에 대한 성찰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우선 "화학 반응에서 서로 튕겨나가는 분자처럼 서로를 밀쳐내기 바쁜" 남매들이 일주일간 집안에 갇힌 셈이니 소설의 기본 요소인 갈등은 보장된 셈이라 하겠다. 여기에 각자의 사연도 기구하다.

주인공이자 화자(話者)인 저드 폭스먼은 라디오 PD인데 아내와 별거 중이다. 아내 젠이 자신의 상사이자 방송 진행자인 웨이드와 자기 집 침대에서 뒹구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저드는 "욕정의 다급한 목마름에만 온 신경을 빼앗긴 채 이제 막 시작된 사랑의 단층선에 서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사실은 그 때 꽁지가 빠지게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야 했다"고 회상한다.

아버지의 스포츠 용품 사업을 거들던 형 폴은 고교 시절 장래가 촉망되던 투수였다. 하지만 동생 저드를 괴롭힌 녀석을 응징하려다 사고를 당해 꿈을 접어야 했는데 사고 순간 자신을 외면한 저드에 앙금이 남아있다. 누나 웬디는 장인의 상가에 와서도 일손을 놓지 못하는 펀드 매니저인 남편과 명목만의 부부로 지내는 처지.

저드와 열 살 터울의 막내 필립은 허풍선이에다 마약에도 손 대 감옥살이까지 한 개망나니. "어쩌다 그렇게 됐어"란 변명을 입에 달고 사는데 저드는 "거의 모든 상황에 갖다 붙이는 일회용 반창고 같은 변명으로, 자신의 인생에조차 항상 방관자처럼 처신하며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묘비명으로 딱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런 필립이 자신의 심리 치료사인 연상의 여자와 함께 들이닥친다.

이들 남매는 고향집에서 모자이크 같은 이야기를 엮어낸다. 웬디는 한 때 사랑했던 이웃집 호리와 밀회를 하고, 저드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형수 앨리스와 몸을 섞는다. 그러면서도 액션영화의 누드신 같은, 그러니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좋은 솔직함을 지닌 고교 시절 여자 친구 페니에게 끌린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외도 상대인 웨이드와 살겠다던 젠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폭탄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저드는 고민한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여인과는 결혼할 게 못 된다. 하고 싶으면 그녀들을 숭배해도 좋고 가능하다면 같이 잠도 자라. 하지만 결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다르다. 미녀와 결혼을 한 사람은 평생을 초대받지 않은 잔치에 온 사람 같은 느낌에 시달릴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느끼기는커녕 항상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그녀의 하이힐이 총알처럼 당신의 심장을 꿰뚫을 때까지"라고 되뇐다. (솔직히 이 대목은 미국이고, 아내의 외도를 겪은 사람의 이야기여서 에누리해 읽었다.)

이 소설의 매력은 굳이 무게를 잡지 않으면서도 군데군데 빛나는 사유가 있다는 점이다.

"때로 행복은 마음의 문제다. 지금 당장 내 손에 지니고 있는 것을 쳐다보면서, 이미 내게서 떠난 것에다가 끝없이 견주기보다는 그것이 내게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진실이고 지혜로운 삶의 자세라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옛 사랑 페니에 기울어질 때 저드가 떠올린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상복으로는 부적절한 차림을 한 모친을 두고는 이렇게 평한다.

"'좋은 연설은 여인의 치마 같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큼 짧아야 하지만 주제를 덮고 있을 만큼은 길어야 한다는 뜻이다. 엄마의 짧은 면치마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연설이라기보다는 친구들끼리 이메일로 돌려 보는 야한 농담이다."

어릴 적 가족사진을 보며 "아무리 별 탈이 없이 시간이 순조롭게 흐르더라도 성장을 하는 것에는 무언가 비극적인 것이 있다"고 깨달은 남매는 마침내 화해한다.

"여기 이렇게 동생과 같이 앉아 있자니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이 들면서 폐부 깊숙이에서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밀려왔다. 우리는 아버지를 보고,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어린 동생과 장난을 치지만, 언제가 그런 일들을 하는 마지막 순간인지 알지 못한다."

늦었을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누가 옳고 그른지보다는 화 나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악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는 흡연처럼 되는 게 더 큰 문제라는 형 폴의 말이 맞지 않을까.

작가가 사회의 지성인이고, 책이 정보와 재미의 주요 원천이던 시대는 지났다 해도 소설의 힘은 여전하다. 읽으면서는 밑줄 긋고 책장을 덮은 뒤에는 긴 여운이 있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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