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판결을 위해서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위법행위를 했다는 범죄사실의 특정이 필수적이다. 식민지 시기 검열 문제는 주로 출판법 위반죄로 다스렸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인쇄했는가를 특정해야 하니까 인쇄 시설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허가받지 않은 것들을 인쇄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한편, 허가 받기를 거부한 인쇄물이 발견되었을 때는 어디에서 인쇄된 것인지를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인쇄 시설을 등록하여 인쇄업 허가를 받도록 했다. 독립선언서는 제법 규모가 큰 보성사(보성학교 교내 출판사)에서 비밀 인쇄되었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며, 대부분의 경우 윤전기까지 갖춘 대규모 시설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사시에는 영업정지나 윤전기 압수 등 처분을 받게 되는 바, 거대 자본은 그런 위험을 무릅쓸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그래서 현재까지도 신문 발행을 허가할 때에는 윤전기 같은 거대 자본이 요구되는 시설을 자격 요건으로 삼는다. 가난한 자들의 담론이 유포될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차단되는 불평등성이다).
그러니 집중적으로 감시당한 인쇄 시설은 값싼 것들, 대표적 보기로 등사기, 즉 '가리방(줄판)'이라고 흔히 불리던 것이었다. 값도 싸고 소수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인쇄할 수 있으므로 불법유인물을 만드는 게릴라적 행위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당국에서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으니 등사기 소유자를 미리 조사해두었다. 예컨대 유명한 사상경찰 미와(三輪和三郞)가 '허무당 사건'의 주동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도 가리방 소유주에 대한 정보는 매우 유용했다. 즉 불온유인물을 발견한 뒤, 종로서 관할지역 내에 그 인쇄물을 인쇄한 구형 등사판은 오직 8개뿐이라는 정보를 근거로 범인을 손쉽게 추적했다. 가리방의 원판에 남아있는 '조선독립'이라는 네 글자가, '불온유인물'에 인쇄된 필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확실한 증거물로 제출할 수 있었노라고 미와는 자랑하고 있다(<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
▲ 가리방의 모습(이성복 제공). ⓒ이성복 |
가리방은 1970년대까지도 '불온유인물'의 주된 생산도구였지만 1980년대로 오면 복사기가 발명되어 대량 보급되었다. 때마침 졸업 정원제가 도입되어 대학생이 거의 두 배로 급증하게 되자, 복사업종은 활황을 맞았다. 이에 따라 80년대 중후반부터 가리방 대신에 복사기가 동원되었다. 이 시기 무수하게 산출된 '불온유인물', 즉 '피'(삐라를 줄여서 이렇게 불렀다)들은 주로 이런 복사집들에서 생산되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복사집들은 생존을 위해 암흑의 복사물들도 마다치 않았다. 물론 단속을 피해야 하니까 단골집에서만 가능했고, 옆에 지켜서 있다가 복사가 끝나면 곧바로 들고 나와야 했다.
졸업 정원제의 역풍이었다. 다들 알듯이 졸업 정원제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데모만 하는" 대학생들을 '학점 벌레'로 만들어 데모를 막겠다는 발상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항언론을 위해 매우 효율적인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역시 모든 제도는 그 기안자의 의도대로만 흘러가질 않는다. 그 제도의 대상이 되는 주체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대중들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때맞추어 비디오테이프나 오디오테이프도 대량 보급되었고 대량 복사도 가능해졌으므로, '광주비디오'라거나, '공장의 불빛'을 비롯한 김민기의 노래, '노찾사' 노래테이프 등이 '암흑의 경로'를 통해 널리 유통되었다. 물론 당국에서는 이런 미디어들을 단속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그 노력은 늘 매우 제한된 효과만을 거둘 뿐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값싼 복제 수단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제공했으며, 그 많은 복제 수단들을 일일이 단속할 재간은 없었으니까. '자스민 혁명'이 트위터를 통해 촉발되었듯이, 억압되었던 민중의 입들은 때마침 바뀐 미디어 환경을 활용해서 누구도 재갈 물릴 수 없는 발언을 시작했던 것이다.
대항언론의 미디어 활용 방식은 기존의 시장 질서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많은 경우 돈을 받고 파는 것도 아니었고, 돈과 바꿔진다고 하더라도 실비에 불과했고 더러 후원금의 성격으로 웃돈을 주기도 했다. 이윤추구를 거부한 대항언론들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는 것은, 시청률 경쟁에 몰입한 언론이 비판받는 것과 대조적인 이유에서였다.
물론 대규모 자본이 투여되지 않은 복사본 책은 조잡했으며, 복사본을 또 복사하는 방식으로 몇 번이고 복제된 노찾사와 '광주비디오'는 음질과 화질이 낮았다. 노찾사 노래테이프의 잡음은 '청각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광주비디오의 화면에는 '비가 내리는' 정도를 넘어서 '폭우가 쏟아질' 지경이기도 했다. 세련된 디자인이란 기대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오히려 거기에서, 조잡하게 복제된 것들에서 진실을 발견했다. 진본과 복사본 사이의 아우라는 전도되어 버렸다. 불편함 조악함 그리고 위험함 속에야말로 진실이 담겨있다는 감각을 80년대 대중들은 공유하고 있었다.
메신저는 일회용이었다. 마치 메시지가 전달되면 몇 초 뒤에 자동 폭발되는 007시리즈의 비밀지령 테이프처럼, 광주비디오나 '피'를 전달한 메신저는 무명씨였다.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투옥이나 고문의 위험을 무릅쓴 메신저는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미디어였다. 기계적 미디어가 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작동시키고 유통시키는 것은 인간의 몸이라는, 원시적이지만 가장 근원적인 미디어였다. 검열을 통과한 합법 언론의 공간에는 불의가 있을 뿐, 불법적 담론 공간에야말로 오히려 정의가 존재한다는 대중들의 믿음에 기반을 둔 적극적인 의사소통의 행위들이, 그 무자비한 전두환의 검열을 뚫어낸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고 진본성의 아우라는 부활했다. 요즘은 불편하고 초라한 것은, 그 메시지와 상관없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노래건 영상이건 책이건, 화려하고 세련된 것이 아니라면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는 합법 공간이 진리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자라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되살아난 진본성의 아우라라는 감각은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다. 권력의 검열을 벗어나는가 했더니 자본의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유의해야 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복사기에 대한 언급은 임태훈, <복사기의 네트워크와 1980년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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