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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사람을 위한 소설, 그 주인공은…

[프레시안 books] 듀나의 <제저벨>

듀나의 신간 <제저벨>(자음과모음 펴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이 책에 실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듀나는 표준적인 과학 소설(SF) 작가이다. 장르의 문법과 클리셰를 충실히 이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딱히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의 소설은 중립적인 의미에서 지극히 정형적이다. 듀나에게는 듀나 식의 틀이 있고, 그 틀에 기대를 맞추고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한, 독자는 배신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기에, <제저벨>을 읽는 것은 대단히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표지에는 '듀나 장편 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 이 책은 링커 바이러스 우주를 배경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중단편 모음이다. 이 책은 '로즈 셀라비', '시드니', '레벤튼', '호가스'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작년에 출간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자음과모음 펴냄)에 같은 링커 바이러스가 확산된 우주를 소재로 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가 실려 있다.

링커 바이러스는 자신과 숙주의 유전자를 조작해 숙주와 환경을 통합하는 바이러스로, 하나의 종이 아니라 통제도 파괴도 불가능한 수억 종의 바이러스 집합이다. 링커 바이러스는 숙주의 몸을 개조하여 낯선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 단지 피부색이 바뀌거나 날개가 돋는 수준이 아니다. 뇌도 신경도 모두 몸의 일부이므로, 링커 바이러스의 세계에 통합된 생명체들은 사고방식도 가치관도 모두 바뀐다. 통합된 생명체들은 어떤 환경에든, 어떤 식으로든 빠르게 적응한다. 어차피 당장의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생명들이니, 유전이나 핏줄은 큰 의미가 없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이 바이러스가 처음 지구에 확산되고, 알려지고,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인간성이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 단편 소설이었다. <제저벨>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그보다 먼 미래에 링커 우주, 즉 링커 바이러스로 환경 통합이 이루어진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 <제저벨>(듀나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제저벨>은 많은 가능성을 가진 흥미로운 설정에서 출발한다. 생명체가 환경에 따라 숙주조차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그 변화가 고정되지 않고 우주 전체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생명체들은 어떤 욕망을 가질까? 어떻게 생존하려고 할까? 또 생존하려고 하지 않을까? 미친다면 어떻게 미칠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듀나는 링커 우주라는 설정에서 재미있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끌어냈다. 인간들은 '아자니'라는 링커 기계를 타고 우주로 날아갈 수 있다. 낯선 행성에 착륙해도 링커 바이러스의 힘으로 그럭저럭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올리비에'라는 공항 역할을 하는 링크 기계가 없으면 행성에서 떠나기는 매우 어렵다.

우주선들조차도 감염되고 변화할 수 있다. 때로 격리된 인간들은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미친다. 어떤 동네에서는 서로 역할극을 하듯이 진짜 전쟁만 해댄다. 가상의 역사를 쓰고 문학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링커 바이러스는 무엇으로도 통제하거나 없앨 수 없는데도 지속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고 하다 큰 비극을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 마피아가 기생충 안에 '말씀'을 담아 전파하려고 했으나, 원래 기생충에 담은 말씀은 링커 바이러스의 작용으로 파괴되고 종교적인 강요만 남아 퍼지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레벤튼'이 그런 이야기의 예이다.

사고 실험이라는 점에서, 독자에게 설정과 상황의 논리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제저벨>은 기본에 충실한 좋은 SF이다.

그러나 이런 <제저벨>의 장점은 이 책이 가진 기술적인 단점들로 인해 빛이 바랜다. 시공간적인 차이가 큰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우주와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제저벨>에 함께 묶어 내지 않은 선택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읽지 않고 <제저벨>부터 읽으면 혼란스러우리라고 생각한다. <제저벨>은 장편이 아니다. 단편 모음(저자의 후기에 나온 표현을 쓰자면 '픽스업')으로서도 하나의 완결된 책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가 되기에 이 책은 너무나 산만하고, 너무 많은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또 이 책의 고유명사는 정말로 어렵다! 듀나는 작가 후기에 자신은 한국적 SF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알리바이'를 붙여 놓았는데, 이것은 한국적 SF이고 아니고 이전의 문제이다. 이 책에는 낯설고 긴 이국식 이름이 너무나 많이 등장한다. 소설 한 편 한 편에 이렇게 길고 많은 고유 명사를, 한국식이든 아니든, 짜임상 꼭 넣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과하다. 고유 명사를 이야기 흐름에서 뽑아내 구분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대체로 미국 것인 듯한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전제로 한 부분도 많은데, 듀나의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독자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했다.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읽힐 것 같은 대목이 많다. 내가 유일하게 이해한 대목은 트레키인 한 등장인물이 '세븐 오브 나인' 섹스 인형을 찾는 부분이었다. 아마 듀나 같은 취향을 갖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모범적이고, 정형적이고, 경이롭지 않더라도 때때로 흥미로운 SF이지만, 내가 읽고 처음으로 실망한 듀나의 SF이기도 하다. <제저벨>은 SF라는 장르의 독자인 동시에 외국 영화와 드라마의 애청자라는 아주 좁은 교집합을 대상으로 한 것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오직 듀나 한 사람만이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만큼이나 온전히 자신의 취향에 맞춘 책을 출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나, 최근 한국 과학 소설의 변화와 확장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SF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거침없이 단언하는 점에서나, 듀나는 이제 한국 SF에서 복합적인 의미로, 고전이 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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