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생님은 노랗게 머리를 물들이고 나타나서 말했다.
"언젠가 한번은 염색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학부모님 중에 한 분이 더 늦으면 못할 것 같아 수염을 기른다는 말을 듣고, 아! 했죠. 그래서 바로 염색을 하러 갔죠. 사실 이 머리는 염색이 아니에요. 탈색인데, 알고 보니 사람마다 탈색을 하면 머리 밑 색이 나온다 하더라고요. 녹색인 사람도 있고 갈색도 있대요. 전 노랑이더라고요."
책을 읽는 내내 대안 학교에 근무하는 그 선생님 생각이 났다. 매 사건마다, 매 일정마다 그 일이 아이들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교사 스스로가 바뀌어가는 그런 선생님. 그 선생님은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뭘 먹다 걸리면, 그 먹은 것을 반 전체에 돌려야 하는 벌칙을 주기도 했고, 신학기 아이들의 반 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달 여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제비뽑기를 채택하기도 했다.
간단한 해법 같지만, 수업 시간의 규칙을 어긴 벌은 반 전체에 간식을 돌리는 것이니 반 친구들에겐 선물을 돌리는 셈이고, 간식비가 만만치 않으니 부모님이 아이가 수업 시간에 뭔가를 먹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벌을 받은 아이는 상처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기발한 벌 아닌가!
반 배정 역시 기발하다. 반을 정하는 기존의 '성적순'이라는 원칙은 성적이 제일 좋은 아이를 임원으로 세우고, 다시 일렬로 아이들을 서열화한다. 물론 아이들의 관심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아이랑 같은 반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런 서열과 아이들의 호감도를 떠나 원칙을 정한다면, 그것은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 우연적인 변수 제비뽑기 밖에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1년간 그 반에서 다투고 화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겪어나간다면, 그런 우연을 즐거움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의 공유 과정. 그 선생님은 그 과정을 '반 배정'에 적용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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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에냐 리겔 지음, 송순자 옮김, 착한책가게 펴냄). ⓒ착한책가게 |
'읽는 것'을 배우지 못했거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주장이 무엇인지 말하고 쓰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는 위험 집단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30쪽)
내가 볼 때 학생에게 시위하고 싶으면 가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그 학생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정당화할 수 있는 일이다. 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그 만큼의 공백을 스스로 메워야만 한다. 시위에 나가느라 놓친 시험은 훗날 언젠가 치러야 한다. 학부모에게도 이를 알려야 한다. (211쪽)
무대 의상, 무대 그림 등을 포함한 기타 물품 구입 비용은 약 900에서 1500유로에 이른다. 이렇게 지출된 금액을 다시 채워 넣을 책임은 각 학급에게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적어도 여섯 회, 많으면 그 이상 무대 위에 올린다. (245쪽)
이상하지 않은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이상적인 학교에서 글을 못 읽는다고 위험 집단으로 규정하고, 사회 참여의 자유도 주지 않으며, 학습에서 경제적인 책임을 진다니. 정말로 의외의 언급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생들이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뚜렷한 신념이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헬레네 랑에 학교는 공부만을 중시하지 않지만, 공부를 경시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대한 흥미가 공부에 대한 흥미에서 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자신의 글을 교내에서라도 출판하도록 하고 또 교정을 보게 하면, 글을 쓰고 읽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함수도 언덕에 나가 활용하면 재미있는 놀이로 전환된다는 믿음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성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시위 등의 사회 참여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헬레네 랑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사회 참여를 결정하여 행사에 참여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공부 손실을 반드시 채울 수 있는 결심 위에서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곳보다도 경제 중심주의를 배격하지만, 학령기에 돈과 관련된 경험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공연 등을 통해 스스로 경제적 주체가 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공부 못지않게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학교에는 뚜렷한 원칙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공부는 해야 하지만 상황에 따라 안할 수도 있고, 경제는 중심적 관심은 아니지만 가르치지 않아서는 안 되며, 부모는 학교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지나친 관심으로 아이들의 학습 욕구를 꺾어서는 안 된다.
원칙이 없어 보이지만 좀 더 면밀히 보면, 그 중심에는 '아이들의 주체성'이 있다. "학생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학습하고, 학습의 결과물을 학급과 평가단 등에게 발표하며, 외부 전문가의 지식을 맥락에 맞게 끌어다 쓰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체득"(285쪽)한다는 뚜렷한 원칙이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들은 예외없이 아이들의 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교육적 배려의 결과였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떤 말로도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 이 학교의 교육이었던 것이다. 리겔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였던 것은, 어쩌면 교육이란 '그 순간의 판단'이 중요한 일종의 '예술적 행위'임을 수업은 물론 일상의 과정에서까지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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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헬레네 랑에 학교에는 소위 문제아를 포함한 '보통의 아이들'이 입학해서 삶의 주체성 획득은 물론 놀라운 학업 성취도까지 이루게 된다. 문제를 이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해결해 나간다. 이 학교의 어떤 면이 그런 해결을 가능했던 것일까?
그 첫 번째가 교장의 리더십이다. 라인하르트 칼이 쓴 추천사를 보면, 에냐 리겔이 어떤 리더였는지가 잘 드러난다. 에냐 리겔은 모든 교사가 반대하는 '장례식 같은 취임식'을 하고 나서 이 학교의 교장으로서의 일을 시작한다. 명성이나 바라고 온 교장이라는 오해 속에서 그녀가 첫 번째 한 일은 교사의 근무 환경 개혁이었다.
"아침을 제때 맞춰 시작하고 교사 한 명이 아프면 누군가가 이를 대신할 것, 회의는 수업 시간이나 누군가의 생일에 하지 말 것, 그리고 오전 시간에는 음주하지 말 것." (304쪽)
이런 개선 방침은 리겔의 조직 운영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사 개인의 생활은 지켜주되, 교육자로서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원칙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리겔은 교사를 믿어야 교사가 아이들을 믿으며, 믿음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줄 때에만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실천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는데서 개혁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신뢰 위에서 리겔은 교장은 "외부로부터 교사의 자율권을 보호하지만 안으로는 내부 활동을 감사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녀는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묻고, 의견이 다를 때는 맞서기도 하면서 교사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갔다. 그녀는 색깔 없는 중재자가 되지 말고, 하나의 '인간'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삶은 삶을 통해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학부모와의 적절한 파트너십이다. 리겔은 "경제 활동을 하고 대화할 때는 당연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어른들이, 유독 학부모회의에서는 전혀 딴사람이 되는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학부모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학교에 참여하고, 때로 그들의 전문적 능력을 아이들 수업에 써줄 것을 권한다.
하지만 동시에 교사나 교장의 판단을 무시하고 아이들을 부모 마음대로 대하는 경우에는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전학 가겠다고 했던 부모가 별 말 없이 다시 헬레네 랑에 학교로 아이를 보내자, 학교에서는 단호하게 '합의서'를 적성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부모는 오로지 학교 측에서 초대한 것이 분명할 때만 학교에 올 수 있으며 마리안을 더는 데리러 오지 말 것과 학부모회의 때에는 어떤 문제라도 누군가에게 비난을 퍼붓기 전에 일단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경청할 것, 그리고 마리안이 혼자서 숙제를 하도록 놔둘 것. (258쪽)
교사와 학부모라는, 아이들의 기둥이 되는 양대 집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은 것. 교사를 믿되 비판하고, 학부모를 격려하되 제지하는 일은 학교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비판에 개방적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 즉 스스로가 '학습하는 학교'라는 점이 헬레네 랑에 학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세 번째 힘이다.
기존의 학교가 '가르치는 기관'이었다면, 헬레네 랑에 학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의 경험을 의식적으로 성찰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 배워나가는 능력을 갖춘" '배우는 기관'을 자임한다. 그래서 이 학교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다. 프로젝트 수업이나 전일제 연극, 기획팀과 교장의 평가는 강고한 신뢰와 명민한 비판, 거침없는 개방성 위에서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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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그 선생님은, 사실은 모든 교사가 처음 교직에 나설 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선생님은 대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 좀 더 오래 그 초심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학교 종류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대안 학교 교사나 탈학교 운동가라고 해도, 흑백 논리나 자신의 교수법에 갇혀 아이들의 주체성을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살리는 일은 개인과 조직, 교사와 학교, 사람과 구조가 서로 맞물려가며 아이들을 잘 자랄 수 있도록 공진화적으로 학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상상을 현실로 만든 혁신 학교 이야기>는 개인의 경험담이 아니라, 치열하되 개방적인, 확고하되 유연한, 지극하고 멀리 보는 사랑을 가진, 교육의 내재율에 대한 이야기이다. 좋은 교육 꿈을 꾸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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