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사이가 좋고 나쁘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나 신용카드 없어진 것 같아. 책상에 있나 좀 찾아봐 줄래?" 나도 모르게 애원했나 보다. 채 잠이 깨지 않은 동생은 몹시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목소리 왜 저래." 전에도 동생은 내 목소리가 가식적이라고 했다. 다시 그런 어조를 듣자니 순간 나는 가게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싶었다.
아무리 내가 못 마땅해도 그렇지, 내겐 위급한 일인데 왜 이런 식으로 대한단 말인가. 그동안 밥 먹고, 카페 다니고, 영화 보고, 함께 낄낄대던 일들은 다 뭐란 말인가. 좀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어느 정도 친해졌다 생각해도 원점으로 돌아갈 때마다 맥이 탁 풀린다. 우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나는 형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면서 약간은 진지하게 형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그러나 형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한심할 정도로 떠오르지 않았다. 남에게 붙임성 있게 잘 다가가고 싫어도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좋은 척한다. 솜씨 없는 척하고 소설가를 지망하는 척하면서 이 가게에서 나가려고 한다. 거기까지는 안다. 하지만 진짜 형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한 살 터울인데도 나는 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비좁은 방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대화다운 대화는 거의 한 적이 없다. 크게 싸운 적도 없는데 언제부터인지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밖에 하지 않게 되었다."
▲ <도무라 반점의 형제들>(세오 마이코 지음, 고향옥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
이 책을 쓴 세오 마이코는 교사 출신 작가다. 작가보다 교사라는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는 청소년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번역이 매끄러운 덕도 있겠지만, 단순한 내용과 문장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다. 실제로 이 책을 읽혔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다.
사실 이 책과 나와 동생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일단 가업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와 동생은 형제가 아닌 자매다. 자매 간 시기와 질투는 문학의 단골 소재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에게 열등감도 느끼지 않을뿐더러 딱히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고스케의 표현처럼 "라이벌이라고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 경쟁할 일도 간섭할 일도 없다." 이 책이 떠오른 이유는 형제 사이에 새삼스러운 친목이 없다는 점과 두 사람의 가는 길이 이후로도 많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우리도 어렸을 땐 여느 형제처럼 잘 어울렸다. 서로 친구 집에 데리고 가며 함께 놀았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에서 비디오도 보고, 게임도 하며 온종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와 엄마의 싸움도 무차별적으로 봤고, 때론 언니라는 이상한 권력에 취해 동생한테 심한 짜증도 부렸다. 동생은 예쁜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내 온갖 심부름도 들어주었다.
"부모 자식이라고 형제라고 취향이 같을 수는 없다. 뜻이 맞지 않을 수도 파장이 다를 수도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동생의 가는 길이 위태롭고 불안해지기 시작한 때가. 중학생이 되자 우리가 마주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나는 나대로 사는 게 힘겨웠다. 지독한 우울증이 따라다녔다. 큰 키에 늘씬한 동생은 소위 일진들과 어울렸다. 나는 그게 지금도 친구의 영향 탓인지 모르겠다. 동생은 8년간 집에 머물렀다. 나는 내심 동생이 걱정되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는 너무 멀었다. 사사건건 부딪히고 싸웠다. 서로 무관심했다.
나는 동생이 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외출도 안 하면서 옷은 왜 즐겨 사는지 이해 못 했다. 동생의 검은 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울면서 이야기했다. 교회에 억지로 데려갔더니 사람들이 아는 척 해주는데도 입을 안 벌리고 이상하게 웃는다고, 이가 전부 죽어서 차마 밖에 안 나가는 거라고, 밤마다 치통 약을 삼키며 끙끙대는 줄 언니인 너는 알고 있느냐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느 날, 동생은 정말 심심했는지 불쑥 내 방에 들어와 재밌는 책 좀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제 컴퓨터 게임이 지겨운 모양이었다. 나는 살갑게 굴었다. 긴 시간이 미움과 증오를 희석했을까. 우리는 서로 마음고생을 알고 있다는 듯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게 겨우 1년 전이다. 마침 나는 돈을 벌어서 가끔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줄 수 있었다. 비록 시원하게 한 턱 내진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둘이 만나는 게 여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한 관계 맺음이라 상처 주고 실망하는 게 우리의 현주소다. 그리고 요즘은 다시 냉전 중이다.
몇 달 전, 오랜 고심 끝에 동생은 임플란트 수술을 받았다. 아래 앞니 몇 개를 제외하고 전부 인공이식을 했다. 큰 망치와 주사가 왔다 갔다 했다고 하니 고통도 엄청났을 테다. 현재 동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홍보 회사에 나간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혼자 질문하고 답변하는 인터넷 글을 올리는 거란다.
그런 일 해서 뭐가 좋으냐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내 말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차라리 학교에 다시 다니면 어떨까 싶지만,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붙었다고?"
"당연하지. 무사히 대학 합격!"
"그런 거,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 아니, 보통은 보고하잖아?"
터놓고 이야기하는 형제 사이도 아닌데, 고스케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래도 일부러 여기까지 올 거 없이 전화로 해도 되는데."
"전화 쪽이 더 일일이 보고하는 거지. 우리 형제, 워낙 전화로 얘기한 적이 없잖아."
(…)
"아무렴 어때. 잘 왔다."
"으응, 진짜 고마워. 형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게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지만 역시 고맙다는 말밖에 할 게 없어서 말하는 거야."
고스케는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창피해서 죽을 지경인 건 제 사정이지만, 바로 앞에서 깍듯한 절을 받는 내 쪽이 더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제 곧 집을 떠난다. 내 생애 첫 독립이다. 새 직장도 얻었다. 이제 내 앞엔 또 다른 길이 펼쳐질 것 같다. 내 방의 책은 다 두고 가려고 한다. 동생이 보아주었으면 좋겠다. 책을 가까이하면서 마음에 위로도 얻고, 꿈도 꾸면 좋겠다. 정색 인사는 못 하겠다.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내 방 잘 써라."라고 했지만, 이 한마디 하기가 얼마나 민망하던지…….
남의 속도 모르는 동생은 엄마와 내 흉을 본다. 떠나는 주제에 욕심이 많다나 뭐라나. 정말이지 너무 얄밉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수술을 받거나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도와주고 싶다. 뒤늦게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스케를 헤이스케가 보이지 않게 도와준 것처럼 결코 생색 안 내고 지금껏 못 했던 언니 노릇을 언젠간 꼭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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