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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군정 재판, 최대 수혜자는?

[해방일기] 1947년 4월 9일

1947년 4월 9일

미군 진주 직후, 군정청의 사법 기구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법령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는 주둔군 군사 법정이 점령 지역의 유일한 법정이었고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이 유일한 법전이었다. 그런데 사법 기구와 법령 체계가 만들어진 뒤에도 군사 법정의 군정(軍政) 재판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남조선에 2중 사법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47년 4월 11일 돌연 조선인에게 군정 재판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군정청 공보부에서 나왔다.

"조선인에 대한 軍裁 철폐-사법권 이양으로 11일부터"

1945년 9월 7일 미군 진주 이래 혼란된 남조선의 치안 확보를 최단 시일 내로 기하고자 사법 재판에 병행하여 태평양육해군총사령관포고령 제2호를 위시로 한 다수의 군정 법령을 적용하여 실시 중이던 조선인에 대한 군정 재판 제도는 사법권 완전 이양 정신에 의하여 4월 11일로 철폐하였다 한다. 그간의 큰 사건으로서는 대구 폭동 사건과 최근의 남로당 간부 사건에 대한 재판이었으며 미결 중의 사건은 사법재판소에 이관하리라 한다.

김(병로) 사법부장 담 : 아직 정식 통첩을 받지 못하였으나 대체로 조선인에 관한 재판은 사법부로 이관될 것이다. 그러나 군정이 있는 한 군정 재판도 폐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4월 13일자)


조선인 사법부장도 알지 못하는 채로 나온 발표였다. 며칠 후에는 실제로 군정 재판에 계류되어 있던 사건들이 사법부로 이관되었다. 이 조치가 갑자기 취해진 이유나 경위를 자료나 연구에서 확인한 것이 없다. 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사법 체계의 치명적 결함이라 할 수 있는 이 문제도 정비할 필요가 제기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 동안 군정 재판이 남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왔는지 한 번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1946년 7월 말 정판사 사건 제1회 공판 때 시위자 수십 명에게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3~5년의 중형을 무더기로 때린 것이 내 기억으로는 가장 인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자유신문> 기사 중 "군정 재판"으로 검색해 보니 더 인상적인 것이 나온다.

"광주 법원 검사장 군정 재판에 회부"

광주 법원 검사장 여철현 씨는 전남 군정장관의 명령으로 신체를 구금당하고 20일 군정 재판에 회부되었다는데 동 검사국 직원이 22일 상경하여 검사총장에게 전후 사정을 보고하리라고 하는 바 현직 검사장이 군정 재판에 회부된 사실은 처음 되는 일이므로 그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공소원 검사장 구자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화로 사건 보고가 있을 뿐이므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고 직원이 출장해 온다니까 전말이 명백해질 것이다. 하여간 현직 검사장이 관계 장관도 모르는 채 이같이 되었으니 사건 내용은 여하간 정말로 유감된 일이다." (<자유신문> 1946년 4월 23일자)


아니, 일개 도의 검사장이 군정 장관(도지사 자격)의 명령으로 구속당했다고? 무슨 이유인지 서울의 관계 장관도 모르는 채로? 이제 "여철현"으로 검색해 본다.

"군정관 명령 불복이 이유-여 광주 법원 검사장에 체형 언도"

광주 법원 검사장 여철현 씨 사건은 지난 20일 군정 재판에서 1년 체형에 2만5000원의 벌금형을 언도하였는데 사건 내용은 광주인민위원회장 박준규 씨를 중심으로 일본인 물건을 불법 처분한 사실을 전남 군정관의 의뢰로 조사하던 중 사건이 벌금형 정도이므로 피의자들을 석방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군정관의 명령을 불복종하였다는 이유로 처단된 것으로 지난 22일 광주 법원장 오필선 씨와 동 법원 차석 검사 김점섭 씨, 동 검사국 서기장 김영식 씨 등이 급거 상경하여 23일 검사총장과 사법부장 그 외 요로를 역방하고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였는데 이 사건은 일단 상고심에서 재심될 것인 바 당자가 사법부 장관일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명령 불복종 사건이므로 상부와 하등의 연락도 없이 현직자를 구속처분한 데 있어 사법부 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은 이 사건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4월 24일자)


미군정이 자리 잡기 전에 광주인민위원회에서 행한 일을 여 검사장이 관대하게 처리한 데 불만을 품은 군정장관 프라이스 대령이 극단적 조치를 취한 모양이다. 군정장관이 전라남도에서는 왕 노릇 하는 걸로 생각한 걸까? 그 뒤의 경과를 보면 프라이스는 서울의 사령부에 보고도 없이 일을 저지른 것 같다.

4월 26일에 여 검사장을 즉시 석방하고 불구속 상태로 상고심에 회부하라는 전보가 광주로 내려간 것을 4월 28일자 기사 "여 검사장을 석방-상고심 회부 電命"에서는 군정청 사법부장 우달(E Woodall, 전쟁 전 중국 거주 때 취한 이름 '門達'로 기사에 나옴) 대령이 노력한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5월 4일자 기사 "여 검사장 사건은 불일 중 해결될 듯"을 보면 4월 27일에 광주로 간 전규홍 사법부 차장이 5월 2일 돌아올 때까지도 여 검사장은 석방되지 않고 있었다.

5월 2일에 전규홍과 함께 서울로 온 프라이스가 우달과 토론 끝에 "명령 불복종" 죄목이 적절치 않음을 인정하여 이 문제의 처리 방향이 잡혔다고 한다.

"여 검사장 사건 낙착"

광주 지방 법원 검사장 여철현 씨의 명령 불복종 문제는 그간 동지 군정관 프라이스 씨가 우달 사법부장과 장시간의 토의가 거듭되어 오던 중 결국 명령 불복종이란 해석 여하로 중간에 오해가 되어 있음이 판명되어 이 사건의 주문을 반복하기로 되어 지난 4일 프라이스 씨는 현지로 돌아갔는 바 여 검사장도 곧 석방되리라 하며 다시 이 문제는 상고심에 회부되어 신중히 처벌하기로 되어 원만히 해결을 보게 되었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5월 7일자)


여철현은 석방 직후 사직했다. <위키백과>에는 이 일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프라이스 미군정지사는 사전 승인 없이 석방한 사실을 들어 1946년 4월 19일 명령 불복종 죄로 여 검사장을 구속하고 다음날 징역 1년과 벌금 2만5000원을 언도하였다. 이에 광주지방법원 판검사 진은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간섭과 침해 행위라고 규정하고 전원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오필선 광주지방법원장과 김장섭 차장검사가 상경하여 군정청의 법무국장 우돌(Emery J. Woodall) 소령을 만나 진정서를 제출하고 강력 항의하자 구속 17일 만인 1946년 5월 5일 무죄로 석방되었다. 여 검사장이 석방되던 날 미군정은 미안하다면서 형무소 앞에 지프까지 대기시키는 선심을 썼으나 여철현은 내 발로 걸어간다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여철현은 검사장 사직원을 제출하였고 후에 전주지방검사장으로 발령이 났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한편 다시 구속된 인민위원회 위원장 박준규와 부위원장 국기열은 정식 재판을 거듭해 무죄로 석방되었다.

조선인을 물로 보는 오만은 프라이스 개인의 문제이거니와, 그런 오만으로 인해 중요한 협력자를 잃고 민심을 등지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게 하는 제도가 군정 재판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둔다. 프라이스의 돌출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절차와 기준을 거의 무시하면서 미군정의 권력을 무절제하게 휘두르는 장치로 군정 재판이 계속 쓰였다는 사실이다.

미운 놈을 무작정 때려잡는 데 쓰인 것 못지않게 큰 문제는 자기네에게 예쁜 놈 봐주는 짓이었다.

"이종형 씨 석방"

동업 대동신문사 사장 이종형 씨는 지난 9월 24일에 적산으로 있는 동사 인쇄소 관리 문제로 군정 재판에서 체형 3년과 44만 원 보상금의 판결 언도를 받았는데 재심한 결과 8일 오후 4시에 석방되었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10일자)


극우 신문으로 <동아일보>가 있었지만, 그래도 <동아일보>는 신문의 형식은 꽤 갖춘 신문이었다. <대동일보>는 순도 100퍼센트 찌라시였다. 그 사장이라는 이종형은 여러 테러 사건에까지 관여한 괴인간이었다. 이 사건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징역 3년 판결된 범인을 재심으로 풀어주는 데 정당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기대도 되지 않는 것이 미군정의 군정 재판이었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7일자에 재미있는 기사 하나가 조그맣게 나왔다. 간단한 사실만 담은 기사이고 제목도 사실만으로 뽑았다. 아마 이런 기사에 기자의 논평이 한 줄만 붙어서 나왔어도 <자유신문> 사람들 여럿(발행인, 편집인, 기자) 군정 재판에 회부되었을 것 같다.

"살인죄로는 5년 징역, 삐라 배포죄로 6년 징역-군정 재판 결과 발표"

1월 27일부터 2월 1일 사이에 종로 군정 재판에서 다음과 같은 판결이 있었다고 공보부에서 6일 발표하였다.

* 김을종, 리웅택, 로각천의 세 명은 밀주(密酒) 만든 죄로 각각 징역 1년.
* 김종근 삐라 뿌린 죄로 징역 6년.
* 리원상은 자동차 부분품과 공구를 절취한 죄로 2년 징역.
* 김수윤은 살인죄로 5년 징역.


이런 '고무줄 양형'을 아예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946년 10월 노동법령(제121호) 발포 때는 상습적 위반을 가중 처벌한다고 하여 "3범 이상은 군정 재판의 판결을 받되 최종의 처벌의 3배 이상을 과하게 될 터"라고 선포했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12일자, "위반에는 엄중한 벌칙-累犯이수록 重刑을 課한다") "군정 재판 보낸다"는 것이 범죄자들에게 협박의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군정청 정책 시행에 극히 편의주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아래 기사 같은 것은 과연 미군정 관리들의 사법 제도에 대한 인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내 눈이 의심될 정도다.

"쌀 공출 안한 이에 체형-안동서 군정 재판 언도"

[안동] 안동 미군정에서는 지난 달 25일 오후 2시부터 안동 심리원지청 법정에서 제1차로 쌀 공출을 못한 북후면 임준도, X동식, 임준도 3인에 대한 군정 재판을 집행하였는데 이날부터 1주일 이내에 할당량을 전부 공출하지 않을 때는 그 다음날부터 공출 못한 한 가마니마다 3000원 벌금 또는 30일의 체형에 처할 것을 판결 언도하였다 하며 앞으로도 공출 안한 사람에 한해서는 전부 군정 재판에 회부하리라 한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10일자)


정치적 사건(그리고 정치적 사건으로 몰린 사회적 사건)은 거의 다 군정재판으로 갔다. 정치-언론 탄압, 파업, 소요 사태 등이 일반 법정보다 군정 재판에서 다뤄졌다. 1947년 초까지도 군정 재판은 무서운 판결을 쏟아내고 있었다.

"6명에 사형 언도-진주, 의령 소요 사건"

[부산 19일 발 합동] 지난 19일부터 열린 진주-의령 인민 봉기 사건 관계자 강대창 이하 7명에 대한 군정 재판은 부산 심리원 진주 본청 법정에서 7일간 계속되어 오던 바 최종일인 18일은 상오 8시 반부터 개정하여 군사위원 측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

* 사형 : 강대창, 황문봉, 허정식, 구영대, 강인중, 구영식.
* 5년 징역 : 손희상
* 무죄 : 엄창재 (<자유신문> 1947년 2월 20일자)


1947년 2월 19일 전평 간부의 일제 검거가 군정 재판의 마지막 큰 일거리였다. 50명이 모이는 전평 중앙위원회를 부위원장 자택에서 연 것은 집회 허가를 얻지 못해서였을 것 같은데, 모여서 무슨 나쁜 얘기 했다는 것도 없고, 모였다는 사실 자체로 전원 잡아넣었다. 그중 대부분이 근 20일 만에 무죄로 석방되고, 또 그중 몇 명은 석방 즉시 도로 잡아넣었다가 열흘 후에 기소 유예로 다시 풀어주었다고 한다. 군정청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인권도 없고 자유도 없던 시절이었다.

"전평 간부 전원 군정 재판 회부"

지난 19일 북아현동 박세영 씨 집에서의 무허가의 집회의 이유로 검거당한 허성택, 이현상 씨 외 전평 수뇌부 51명은 기간 경찰 당국의 최조를 받아오던 바 24일 전원이 군정 재판에 회부되었다 한다. 한편 전평 산하 각 단일노조 대표단은 25일 오전 군정장관을 비롯하여 노동부장, 수도청장, 윌슨 미국인 시장 등을 역방(歷訪)하고 피체 간부의 석방을 진정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26일자)

"최고 1년형-전평 간부 군재"

2월 19일 시내 북아현동에서 무허가 집회로 검거된 전평 간부 51명에 대한 군정 재판은 3일 오전 9시부터 방청 금지 리에 개정되었는데 피고 전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최고 1년 최저 1개월의 체형을 언도 하였다.

위원장 허성택, 부위원장 박세영 각 1년. 서기장 문두재 기타 48명 각 1개월. (<자유신문> 1947년 3월 4일자)

"전평 간부 무죄-48명은 석방"

지난 2월 19일 전평 중앙위원 51인은 무허가집회의 죄명으로 검거되어 위원장 허성택 부위원장 박세영 양씨는 1년 징역, 문재두 씨 6개월 징역, 그 밖의 48명은 1개월 형의 판결을 받았는데 7일 1개월 징역 언도를 받은 48인만이 무죄로 석방되고 나머지 3씨는 재심하기로 되었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8일자)

"獄門 나서자 전평 간부 또 체포"

군정재판에서 1개월 언도를 받았던 전평 간부 48인은 7일 석방되었는데 48인이 형무소 문을 나서게 되자 돌연 그곳에 이미 대기하고 있던 형사대가 달려들어 남로당 이현상 씨를 위시하여 전평 문은종, 김한억, 한철, 조맹규의 5씨를 구금하여 수도청에 유치시켰다. 한편 장택상 수도청장은 8일 기자단에게 먼저번 무허가집회와는 따로 포고령 위반으로 검사국의 위촉을 받아 전기 5인을 체포하였다고 언명하였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10일자)

"전평 간부 4씨 석방"

군정재판에서 재심한 결과 무죄 언도를 받고 나오는 것을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송청된 전평 간부 문은종, 한철, 조맹규, 김환옥 씨는 그간 원택연 검찰관으로부터 구속 최조를 받아오던 중 17일 기소 유예로 석방되었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18일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1946년 4월 하순에서 5월 초순에 걸친 '여철현 사건'의 기사를 <동아일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정파적 이유로 그 사건을 외면한 것일까? 도지사가 검사장을 '명령 불복종' 이유로 1년 징역을 때린 이 엽기적 사태에 보도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신뢰성에 관해서는 보도뿐만 아니라 어떤 보도를 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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