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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가는 해부학자다!

[프레시안 books]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

시신을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시 '생명'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역설적인 광경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 있다.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 찬, '해부학' 실습실이다.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는 UCSF(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약학 대학의 해부학 실습 첫 날을 배경으로, 약간은 활기차게 시작된다. 이 책은 19세기에 살았던 두 명의 해부학자에 대한 전기이자 그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작가의 해부학 실습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이 '의학' 논픽션이 의학의 두 경계인 삶과 죽음 가운데 결국 후자 쪽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록 에필로그의 맨 끝 문단에서 "우리는 해부학으로부터 생명을 배운다"고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가령 '등장인물' 소개가 맨 앞이 아닌 맨 끝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엔 묘지 사진과 함께 이들이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가 중점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헨리 그레이

▲ <해부학자>(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등장인물의 맨 위를 차지하는 것은 헨리 그레이(1827~1861년)의 이름이다. 1858년 그가 낸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은 영국에서는 40판까지, 미국에서는 37판까지 한 번의 절판 없이 출간되었다. 최근에는 의대생의 필독서, 대중들의 인기 교양서를 넘어 패러디된 드라마 제목(Grey's Anatomy)으로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고전이다.

저자 빌 헤이스 역시 "플라톤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한 권씩은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별 고민 없이 이 책을 구입했고, 이후 집필 시 참고용으로, 인체 부위를 확인하기 위해 종종 들추어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스친, "도대체 이 책을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이 바로 <해부학자>의 출발점이 되었다.

헤이스는 즉시 인터넷 서점부터 도서관, 고서점 연합회 등을 조사했지만 결과는 허탈할 정도였다. 그토록 유명한 '고전' 저자에 대한 전기는커녕, 탄생 연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조차 없었던 것이다. 검시관(1848년), 해부학 박물관 학예관(1852년), 해부학 강사(1854년) 등, 그와 관련된 기록은 "깔끔하게 라벨이 붙은 표본" 같기만 했다.

하지만 공란과 미스터리가 작가로서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리라. 거기다 그는 <그레이 해부학> 100주년 기념 판에 수록된 한 장의 사진 속, "뭔가를 생각하는 듯 뚫어져라 카메라를 바라보고, 셔터가 닫힐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는 듯한" 그레이를 보고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첫눈에 빠진 사랑과 같은 기분을 뒤로 한 채, 그는 그레이를 알기 위해 UCSF의 해부학 강의실로, 그곳의 특별 자료실로, 그레이가 살았던 런던으로 발을 옮긴다.

또 다른 헨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 <해부학자>는 헨리 그레이에 대한 책이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헨리 그레이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또 한 명이 존재한다. 그는 '등장인물'에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린 또 한 명의 헨리, 헨리 밴다이크 카터(Henry Vandyke Cater, 1831~1897년)다. 카터는 <그레이 해부학>의 삽화 제작자, 혹은 공동 저자다.

같은 세인트 조지 병원 의과 대학 졸업생인 두 명의 헨리는(카터가 입학했을 때 그레이는 마지막 학년을 다녔기에, 그 시절에 서로 알았을 지는 불명확하다) 서른 살 무렵 '협업'을 통해 책을 만든다. 아버지로부터 미술 재능을, 어머니로부터 화가 '반 다이크'의 이름을 물려받은 이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은, 당신이 분명히 매료될 정확하고 섬세하며 알기 쉬운 인체 해부도를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그의 열네 번째 생일인 1845년 5월 22일에 시작되는 그야말로 깨알 같은 일기, 그리고 누이인 릴리와 주고받은 편지 등 '개인 문서'였다. 런던에 있는 웰컴 도서관이 카터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게 된 헤이스는, 당장 마이크로필름으로 된 자료를 전해 받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가는 "카터의 눈을 통해 본 그 불가사의한 헨리 그레이의 모습을 일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400쪽 남짓 되는 본문을 읽어가며 나는, 작가가 애초에 가졌던 기대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적인' 실패로 보인다. 물론 카터의 기록에는 그레이에 대한 단서가 적지 않다. 묘한 질투심의 노출을 통해 그레이가 누렸던 평판을 상상해볼 수 있고, 그와의 말다툼을 통해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3부로 된 책의 구성 중 굵직한 2부('화가')가 카터의 기록을, 그보다 얇은 3부('해부학자')가 끝내 찾아낸 그레이의 기록을 다루지 않았을까 예측했던 나의 기대는, 여전히 카터의 기록에 기대고 있는 3부까지를 읽으며 또 다른 궁금증에 봉착했다. '그레이의 기록은 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까?'

또 이 책이 두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 결코 분량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카터는 기록하는 자였고, 그레이는 카터에 의해 (불완전하게) 기록되는 자였다.

해부와 '글쓰기'

150년이 지나 또 다른 관찰자가 개입하는 순간, 이 능동태와 수동태의 차이는 현격해진다. 작가는 카터의 수많은 관찰 대상 중 하나인 그레이보다는 이 '일기 작가'에 더 감정 이입하게 되고, 결국 그가 일기를 쓰지 않은 기간에 일어난 상당히 흥미로운 '스캔들'을 포함해 전 생애를 추적하게 된다. 애초의 목표에 대한 사료 부족이 작가를 당황하게 만들었을 법도 하지만, 이 추적자는 억지로 과대 해석을 하거나 목표를 수정하지 않고 아주 의연하게 하던 실습을, 하던 조사를 해 나간다.

헨리 그레이의 구체적인 을 조망하는 데는 '실패'한 이 추적은, 역설적으로 아주 분명한 것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바로 역사는(혹은 전기는) 현재 남아 있는 것, 자료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록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따라서 기록하는 자의 입장이 주인공인 것이다. 미국의 서평 사이트에서는 <해부학자>에 헨리 그레이의 삶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다며 불평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카터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먼지와 함께 도서관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그의 기록 덕분이다. 이는 '죽은' 사람의 몸을 통해 인체와 생명을 알아 나가는 해부 실습실의 장면과 겹쳐진다. 저자가 '고무장갑'의 영역(실습실)에서 '흰 장갑'의 영역(자료실)으로 넘나드는 사이, 우리는 기록과 시체의 유사성, 전기를 쓰는 일 자체와 해부의 유사성, 심지어는 도서관과 해부 실습실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된다.

무질서한 일기와 편지를 질서를 갖춘 서사로 자아내던 작가는 어느 날 생각한다. '해부에서 얻는 이 만족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 그는 "아마도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들어 내는 데 있으리라고, 즉 어질러진 것을 말쑥하게 정리하는 데 있으리라"고 자답했지만, 곧 더 큰 사실을 알게 된다.

"해부학은 사실 뭔가를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질서는 이미 거기에, 그러니까 피부 바로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부학자는 다만 그걸 드러낼 뿐이다."

죽음

<5리터>(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와 <불면증과의 동침>(이지윤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등 국내에 소개된 두 권의 저작만으로 나는 빌 헤이스의 팬이 되었다. 나는 그의 글쓰기 방식을 좋은 논픽션의 모범으로 여기며 흠모하고 있었다. 한 가지 주제를 향한 기록의 탐구와 직접적인 체험을 섞고, 그 과정을 마치 이중나선 구조처럼 대칭적으로 보여주면서 취재 여정까지 낱낱이 기록하는 방식.

치밀하고 차가운 과학 서적을 기대하면서 그의 책을 펼친 많은 이들은 화를 내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글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면의 고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 교리와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 속에서 자랐던 성 소수자이며, 책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반려자는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이다. 그런 그가 <5리터>에서는 '피'에 대해, <불면증과의 동침>에서 '잠'에 대해 쓴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피와 잠은 생명의 증거이자, 죽음과 가장 밀접하게 등을 맞댄 소재다.

<해부학자>에서는 두 전작에서도 저며 나왔던 죽음에 대한 동경과 공포의 상반된 감정이, 시신이라는 소재와 만나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책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인 2004년 10월의 일기에서 그는 "나는 단순히 시체만이 아니라 죽음에도 매료되어 있다. (…) 나는 여전히 항상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고 적었다.

사실 400쪽 줄곧 그는 학생들이 해부 초기에 겪는 '습격'에 대해 꽤나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습격이란 갑자기 솟구치는 감정을 말한다. 실습 때 시체의 얼굴과 손발에 거즈를 붙여 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체의 눈이나 입, 손톱의 매니큐어 칠 등 '개성의 흔적'은 해부 대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여성의 시체를 보고 굳어버리고, 어떤 학생은 잘라낸 피부 조각을 '규정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뭔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며 괴로워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처럼 윤리적 고민에 빠진 의학도들과 달리 헤이스는 사려 깊지만 단호한 어투로 그들을 위로한다. "주어진 임무를 잘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서 그는 더 이상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의 반려자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는 모습, 그리고 그 뒤에 밀려온 완전한 적막. 16년간 헤이스와 함께 산 반려자 스티브는, 이 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했다.

해부대 위의 시신에게선 오히려 경이로움을 느꼈던 그가 드디어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해부학 시간에 배운 것도 전혀 쓸모가 없었노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죽음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일기

마지막으로, 위에서 답하지 못한 한 가지 질문에 답할 차례다. '그레이의 기록은 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까?'

작가의 영국 여정이 펼쳐지는 책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레이를 조사했던 어느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 '어떤 이유로 인해 우리가 필사적으로 찾던 증거들이 한 순간에 전소되었던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참고로 그 '어떤 이유'는 궁금한 독자들이 직접 읽고 알아보기를 권유한다.)

마치 이 책에서 가장 강렬했던 작가의 반려자의 죽음처럼, 삶에 대한 기록도 예고 없는 소멸을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절절한 삶의 고민을 긴 지면에 걸쳐 보여주었던 카터와는 달리, 그레이는 서른넷 젊은 나이, 천연두에 걸린 조카를 치료하다 자신이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단 한 장면으로도 <해부학자>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두 명의 헨리는 다루어지는 방식이 다르다고 이야기했는데, '기록하는 자'와 '기록되는 자'의 대비 말고도 하나의 대비가 더 있었던 셈이다. 삶, 그리고 죽음.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나는 작가가 카터의 일기를 처음으로 열람하는 순간(55쪽) 무슨 생각인지 3년 만에 일기장을 사 버렸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일기를 매일 쓰고 있다.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내가 살아 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끔씩 들었던 불안이 계기를 만난 것이다. 부끄럽지만, 기록하려는 집착은 아직 죽음을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이 꺼내들 수 있는 가장 흔한 대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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