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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에서 살아남는 법, "알아서 기어!"

[철학자의 서재]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

통치 전략의 변화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반민주적 독재 권력에 맞서 각고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적어도 '정치적' 차원에서는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정치적 차원을 넘어, 경제와 문화를 비롯하여 일상적 삶의 세계까지 망라한 사회 전 분야에서의 민주화, 곧 '실질적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또 다른 역사적 과제를 수행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수 정권의 재등장은, 비록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과거의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시대착오적인 반민주적 악행이 재현되는 등 비민주적 상황을 연출하면서 '민주화의 퇴행'을 초래하고 있다. 최근에 불거져 나온 소위 '민간인 불법 사찰'은 그러한 퇴행의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같은 상황이 우리 사회의 발전적 흐름을 '일시적으로' 역사 퇴행적인 방향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고 해서, 현 이명박 정부를 이전의 유신 독재 체제나 군사 독재 정권과 동일 선상에 놓고 '반민주적 독재 정권'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 사적 이해관계의 관철 및 유지를 위해 자의적으로 지배 권력을 남용한 독재자와 그 추종 세력 그리고 공공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던 강압적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폭력적 수단 등은 최소한 '현상적으로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불어 명색이 민주화된 상황에서는 물리적 통제 수단이 수반된 강압적 통치 권력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임 노무현 정부를 대신한 이명박 정부 하에서, 물리적 제재 수단에 의거한 비민주적인 강압적 통치 방식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다. 정부의 정책이나 방침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 저항적 실천 운동 등을 다양한 형태의 법적 규제 장치나 물리적 제제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봉쇄하고 억압하는 등 시민들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가 전임 진보 정권에 비해 현저히 훼손되고 유린당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국민의 생명 및 건강과 직결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정당한 거부 투쟁으로서의 '촛불 집회'를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 진압 해산함으로써 민의를 저버리면서 생명권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비민주적인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전체적으로는 그러한 외적인 강제 수단에 의거하여 국민들의 '비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통치 방식을 구사하기보다는, 국민들 각자의 '자발적인 동의와 순응'을 이끌어내는 지배 방식이 주된 통치 전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수준에서나마 민주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폭력적 수단에 기초한 정치적 권력의 공개적인 불법적 사용과 자의적인 남용은,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게 된 것이 오늘의 변화된 현실이다.

이 점을 현 보수 집권층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외적 강제와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순응이 아닌, 교육이나 언론 매체 등을 통해 비민주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지배가 정당하고 올바른 지배 양태인 것처럼 오인(誤認)시키는 은밀한 비가시적 폭력을 구사함으로써 이른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통치 방식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 독재자의 전제 정치를 참는가?

▲ <자발적 복종>(에티렌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울력 펴냄). ⓒ울력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발이나 저항이 사라진 채 개별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가능케 하는 비가시적 폭력으로서의 새로운 통치 방식에 관한 '철학적 기원'이 담긴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Etienne de la Boétie)의 <자발적 복종>(1548년 집필)을 만나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 그렇게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독재자의 전제 정치를 참고 견디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가"(14쪽)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드 라 보에티는, 16세기라는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재 권력과 그에 기초한 폭압적 철권 정치의 본질과 실상에 관해 날카로운 비판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함께 16세기 당시의 군주제의 기원과 실체를 비판적으로 폭로하는 과정에서, 오늘의 '민주화된' 사회에서 자행되는 지배 권력의 '비민주적' 남용에 관한 사회 구성원들의 무비판적 순응과 동조, 무저항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일깨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민들이 "인민을 (…) 통치해 온 훌륭하고 비범한 인물을 (…) 따르고 신뢰하며 자신의 높은 지위까지 바쳐가면서 그를 섬기는 데 익숙하게" 될 때, "그 비범한 인물은 인민이 누렸던 지위를 박탈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즉시 죄악을 저지른다"(16쪽). 그럼에도 이때 인민들은 "강압적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억압을 자청하고 있다"(16~17쪽)고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목도한다. 마치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저자세를 취하면서 유권자들의 물질적 속물적 욕망을 한껏 부풀려 놓기에 충분한 선거 공약을 내세워 환심을 산 후, 마침내 자발적 지지와 투표를 통해 최고 통치자에 선출되면, 그때부터는 권력 추종자로서의 야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선거 전에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것 같은 자세를 보이지만, 일단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순간부터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이해관계 그리고 자신의 추종 세력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관철하고 확대하는 데 정치적 권력을 무제약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통치자를 지지하고 선출해 준 다수의 국민들은 그가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은 국민들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는 정치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으며, 권력자의 통치 행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물론 오늘의 사회 현실은, 드 라 보에티가 정면으로 맞서 비판하고자 했던 16세기의 군주제 사회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비판적 분석은,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권력이 행사되는 양태와 방식 아울러 그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태도 에 관해 적지 않은 교훈과 시사점, 실천적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점은 특히 '인민에 의해 선출된 자'로서의 폭군 유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인민에 의해 선출된 폭군은 앞의 유형보다는 낫게 행동할지 모른다. 실제로 사람들은 선한 왕을 기대하면서 누군가에게 국가를 위임한다. (…) 그런데 새로운 군주가 인민의 이러한 생각을 알아차리면 그 다음부터는 결코 권좌에서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작심한다." (44쪽)

이는 현대 민주제 사회에서 선거를 통해 뽑힌 통치자 역시 16세기의 군주제 사회에서의 폭군 못지않은 독재자 내지 비민주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이에 대한 실례로 이승만 정권 등을 들 수 있다.

왜 청년 세대는 스펙 쌓기에 몰두할까?

드 라 보에티의 주장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통치자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민들은 폭정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 여긴다. (…) 이는 어떤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강요당한 게 아니다"(15쪽).

이 점은 작금의 한국 사회에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가령,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국가 차원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상당한 경제적 이득의 증대를 가져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처럼 늘어난 이익의 대부분은 대체로 재벌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과 소수의 지배 계층에게 돌아가고 99퍼센트에 해당되는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한층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이 예견된다. 그런 한에서 당연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거부 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반대다. 즉,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국가의 이익 증대는 곧 나 개인의 이익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정부의 홍보와 선전을 주저 없이 받아들여 한미 FAT 자체를 지지하면서 정부의 방침과 시책에 적극적으로 따르고 순응하고 있다. 드 라 보에티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의 강압이나 강제 없이도 '자발적 복종'이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서 FTA를 추진하는 이른바 '강부자'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민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네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진력하는 정부인 양, 다수의 국민들이 믿고 지지하고 있는 실태는, 권력자를 비롯한 소수의 지배 계급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또 젊은 청년층의 경우,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진 오늘의 한국적 상황을 자신의 실력 부족 탓으로 돌리고 도서관에 틀어 박혀 스펙 쌓기에 여념 없는 사태 역시 드 라 보에티가 말하는 자발적 복종에 해당된다. 청년 실업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적 혹은 정책적 차원의 문제이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그 돌파구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이른바 '88만 원 세대'라 불리는 청년층은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가서 성공하라"든가 "아직도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식의 정부의 권고에 맞추어 실업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다시금 취업 공부에 열중할 뿐, 청년 실업을 야기하는 왜곡된 사회 구조나 제도, 잘못된 정부의 복지 정책 등을 비판하고 개혁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청년 실업의 문제를 젊은 세대 개인의 탓인 양 호도시켜 정부의 무능과 실책에 기인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력자와 지배 계급에 대한 분노나 저항 없이 순응토록 이끄는, 그 점에서 자발적 복종의 의식이 내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발적 복종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렇다면 '자발적 복종' 혹은 '자발적 복종 의식의 내재화'는 어떤 요인과 메커니즘에 따라 지속적으로 유지되는가? 드 라 보에티는 이를 습관과 교육, 유희와 물리적 이익 및 권력에 대한 욕망 등에 입각하여 해명하고 있다.

먼저,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노예 근성이라는 독으로써 유혹"하며 "이러한 유혹은 하나의 습관으로 작용하여 독이 쓰다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49쪽)는 언급을 통해, 자발적 복종이 가능하게 된 원인의 하나로 권력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틀지어진 습관을 들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충성심과 애국심을 강요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민교육헌장'의 반복적인 암기를 통해 '국가 최고 권력자에 대한 복종과 순응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이라는 식의 의식화 과정을 통해 통치자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식)이 자동적인 습관으로 형성되게끔 시도한 전례가 있다.

그런데 드 라 보에티에 의하면, 그러한 습관은 무엇보다 교육을 통해 주조되고 구조화된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발전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바르게 교육받지 않으면 얼마든지 나쁘게 변형될 수 있다"(50쪽)거나 "인간은 교육에 의해 배워온 관습을 지니고 있다"(56쪽)는 발언을 통해,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습관'이든 혹은 '자발적 복종을 통한 노예적 습관'이든, 습관의 형성은 교육에 의해 절대적으로 영향 받는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학교에서의 교육 과정은 기본적으로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후 가장 먼저 손 댄 것 중의 하나 역시, 한국 근현대사 교과 및 교과서 내용의 수정이었다. 좌 편향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보수적 이념과 입장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고쳐버린 것이다.

그처럼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지배 계급의 입맛에 맞게끔 재구성될 경우 개별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통치자 및 집권 세력에게 복종적인 행동 양식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습관이 형성되기 쉽다. 과거의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진 '국민윤리' 교육은 정당성과 정통성이 결여된 독재 권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 의식을 주입하여 습관화하고자 한 대표적인 교과 교육의 하나였다.

결국 비민주적인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제도권 교육과 그것을 통해 형성된 의식화된 습관으로서의 자발적 복종은, 심지어 정당성이 결여된 독재자의 통치 행위를 접하는 경우에도, 그에 대한 비판과 분노, 거부와 저항보다는 동조와 지지, 순응과 예속으로 발현되기 쉽다. 이렇듯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의에 반하는 비민주적인 권위주의 통치세력은, 교육이나 선전, 언론 매체 등을 활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자발적 복종 의식을 형성, 내재화함으로써 '마치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거해' 통치자에게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정치적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드 라 보에티에 의하면, 자발적 복종을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유희가 있다. 그것은 국민들 각자를 '유희적 인간'으로 개조함으로써 독재나 권력 남용 등에 대해 무관심하도록 만들거나 제대로 된 가치 판단을 못한 채 순응토록 하는 전략이다. 이를 드 라 보에티는 "백성을 우둔하게 만드는 전제 군주의 책략"(66쪽)으로서 키로스의 조처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키로스는 (…) 사창가, 술집 그리고 도박장을 설치하게 했다. 그런 다음 주민들로 하여금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도록 온갖 별스러운 착상을 고안해 낸다. 그것은 무장 봉기를 일으킬지 모르는 리디아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계략이었다"(66쪽). 오늘날 흔히 '3S(Sex, Sports, Screen) 정책'으로 불리는 그러한 유희적 계략을 드 라 보에티는 수백 년 앞서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자발적 복종의 메커니즘이 유지되는 요인으로 물질적 이해관계나 권력에 대한 개인적 욕망이 지적된다.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85쪽).

곧, 드 라 보에티에 의하면, 권력자는 자신의 비호 아래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권력을 장악하여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추종 세력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자발적 복종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그 결과 국민들을 노예 상태에 머물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게 된다.

벗어날 길은 없는가?

그렇다면, 그처럼 대다수 국민들의 자발적 복종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강자를 위한 비민주적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이는 특히 '시대 역행적인' 정치적 성향과 행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독재 정권이라고 칭할 수는 없는, 비민주적 권위주의 체제로의 회귀를 드러내 보이는 현 한국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다 진전된 실질적 민주화를 완수해 내야 하는 우리에게는 실천적 극복 방안의 모색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드 라 보에티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를 지닌 채 태어났을 뿐 아니라, 자유를 지키려는 충동을 지닌 채 태어났으며"(36쪽) 그런 한에서 "천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35~36쪽)이다. 이는 동물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감금당할 경우 완강히 저항"(37쪽)하는 데서 바로 확인된다.

이렇듯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임에도, "인간의 내면에는 (…) 노예화를 갈구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33쪽)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드 라 보에티에 따르면, 권력자들이 국민들에게 "불법을 가함으로써 (…) 노예로 붙잡아"(36쪽) 두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그는, 자발적 복종이 이루어지는 '노예 상태'로부터 본래 자유롭고 "평등한"(34쪽)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민주적인 사회 상태로의 회복을 주창한다.

물론 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자세히 개진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집약적으로 자발적 복종에 대한 반성적 인식과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배우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자! (…)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의 행동을 깨닫고 우리의 오류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게 하는 신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102쪽).

이로부터, 반민주적 통치자와 그의 부당한 권력 사용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는 우리 자신의 노예적 근성을 반성적으로 자각하는 경우에라야, 비가시적 폭력을 통해 국민들의 일방적 복종을 이끌어내고 그 위에 군림하는 반민주적·반인민적 권력자의 실체를 비로소 꿰뚫어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권력자와 비가시적 강압적 폭정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는 해석을 끌어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 사회는, 드 라 보에티의 입장을 빌려 말하면, 인간의 본성인 '자유와 평등'이 제대로 구현된 민주적 사회 체제를 지향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지배자의 편에서) 국민들의 의식을 노예화하여 노예 근성을 습관화해 나감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자의 편에서) 적지 않은 국민들이 더 많은 경제적 이익과 작은 권력이라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예 상태에 진입해 들어감으로써, 자발적 복종이 구조화되어 나가는,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민주화의 퇴행과 사회 발전의 역행이 초래되는 비민주적 상황에 처해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가? 그에 대한 '잠정적' 답변은 다음과 같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하게 작동하는 비가시적 폭력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권력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 상태를 철저히 자각하고 분노하면서, 규범적으로 정당화된 거부와 저항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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