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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전쟁터, '전사'의 조건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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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전쟁터, '전사'의 조건을 묻는다!

[프레시안 books] 문강형준의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 서평꾼 '로쟈(이현우)'의 말을 빌리자면,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이매진 펴냄)의 문강형준은 "밀물처럼 들이닥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문화 비평 분야의 전사"로 기록될 만한 신예 비평가다. 물론 이런 로쟈의 평가는 밀물과 썰물을 이루었던 그 '문화 비평'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생략한 것이다.

문강형준은 문화 비평을 "사회가 생산하는 의미들에 대한 개입의 한 방식"으로 본다(11쪽). 이렇게 문화 비평을 정의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시사 평론'이나 '정치 평론'과 구분해서 말랑말랑한 글쓰기라고 오해받았던 문화 비평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자 그 역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 비평이 "지배적 의미의 생산을 거스르려고 한 마르크주의자들"을 통해 수행되었다고 지적함으로써, 문강형준은 문화 비평의 방향성을 확고하게 설정한다. 이런 방식은 확연하게 1990년대에 대세를 이루었던 자유주의적 문화주의에서 '다른 의미 생산'을 위한 현실 개입의 문화 비평을 분리해낸다. 문화 비평이 마르크스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야말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가 놓여 있는 지세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문강형준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이 책은 7개의 꼭지로 나누어서 각자의 비평들을 배치했다. 문화 비평의 운명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성이다.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비평은 언제나 '연재'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쇄 매체든, 아니면 자신의 블로그든, 어쨌든 문화 비평은 그때그때 써야한다. 그것이 모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마치 모자이크 같은 방식으로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이를테면 문화 비평의 특징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문화 비평들을 모아놓은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파국의 지형학>(자음과모음 펴냄)이 다소 묵직한 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면, 이 책은 사안별로 이야기들이 풀려나가는 형세이다. 따라서 7개의 꼭지는 기본적으로 사후에 완성된 비평들을 분류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저자도 나중에야 책의 구성을 인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문화 비평은 실천적 행위이다. 문강형준 자신의 말처럼, 지배적인 의미에 대항해서 다른 의미를 생산하기 위한 개입의 순간들이 모여서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대중문화의 양면성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진술을 보자.

대중문화의 내러티브는 분명히 더 좋은 사회를 향한 대중의 유토피아적 열망을 표출하는 창구이기도 하지만, 그 유토피아적 열망을 치열하게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 손쉬운 화해와 화려한 음악과 눈물 흘리는 슈퍼스타의 탄생을 그리면서 이 열망을 상상적으로 봉합한다. (30쪽)

<슈퍼스타K>에 대한 논평이지만, 이런 특성은 대중문화 일반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작은 단위에서 커다란 추상의 그림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문강형준은 충실하게 문화 비평의 원리를 따라간다. 그는 잘 훈련된 병사처럼, 전투의 기본에 충실하다. 어떻게 방어막을 치고, 어떤 방식으로 침투해서 적진을 돌파할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슈퍼스타K>라는 대중문화가 어떻게 환풍기 수리공을 스펙터클로 만들어서 '비정규직 노동'을 은폐하고 있는지,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몸에 대한 분석은 또 어떤가?

가장 거대한 담론도 가장 개인적인 우리 몸을 '통해서' 실현되고 관철된다. 몸은 담론의 전쟁터다. 오늘날 난무하는 식스팩과 칼자국은 관리를 생명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성격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생존하고 성공해야 하는 개인들의 '몸'부림이 형상화된 것이다. 이를 '아름다움을 향한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다. (115쪽)

이 짧은 문장들 속에서 문강형준은 '관리된 몸'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둔갑시키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폭로해낸다. "관리된 아름다움과 효율성"을 그는 '추악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비평들은 상당히 규범적인 판단을 전제한다.

이 책의 저자가 나의 입장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에게 문화 비평은 이데올로기의 지형을 드러내고 그 가치 평가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퍼포먼스이지만, 그는 그 지형을 그려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평가의 판단을 개입시켜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죄르지 루카치나 테오도어 아도르노처럼 규범적 마르크스주의를 주요한 비평의 관점으로 차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규범적 문화 비평 자체에 대해 잘잘못을 따질 의도는 없다. 그의 비평이 드러내는 경향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다만 이처럼 규범적 태도를 취했을 때, 자본주의 대중문화는 언제나 '추악한 것'으로 판명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도덕 환원주의의 유혹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의 문화 비평은 다음과 같은 비평가의 주장으로 곧장 나아간다.

현실의 정치적 모순과 문제들을 '휴머니즘'으로 살짝 포장하는 것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진실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아버지의 눈물에 통닭과 냉장고 따위를 건네는 일 말고 그 눈물이 빚어낸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의 확대와 복지의 축소를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명박의 눈물이 아니라 없는 눈물을 짜내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폭력 통치를 가려야만 하는 그 절박함이 중요한 것이다. (257쪽)

<우리들의 일밤>에 나오는 '우리 아버지'라는 코너에 대한 비평이다.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강형준의 문화 비평이 지향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진실'을 깨닫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고 폭로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비판과 폭로의 주체는 비평가 자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대중에게 확대되어야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문강형준은 확실히 정통 문화 연구의 정치학에 충실한 비평가이다. 내가 변칙 복서라면, 그는 정통 복서이다. 이런 차이를 확연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바로 '숭례문이라는 환상'이다. 나 역시 이 현상을 비평한 적이 있는데, 비슷한 연장을 사용하면서도, 문강형준은 사뭇 다른 방식으로 조형술을 발휘한다.

문강형준의 입장에서 숭례문은 근대화를 감추기 위한 전략으로 남겨진 것이다. 전통을 무너뜨려야 발전하고 경쟁에서 이긴다는 논리를 삶의 원칙으로 삼아온 한국에서 국보와 보물은 "그것만큼은 아끼는 척"을 하기 위한 핑계이다(366쪽). 이 핑계를 통해 한국 사회는 전통을 사랑한다는 환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환상마저 불에 타서 사라진 것이 바로 숭례문의 소실이었다는 분석이다.

환상 없이 실재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전제에서 숭례문은 다시 지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문강형준은 근대의 속성, 나아가 계몽의 속성으로 본다. "주체가 일어서려면 타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원리가 이 속성을 뒷받침한다. 이런 전개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의 입장은 근대의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극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인 각성과 실천적 행동의 통합을 추구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도의 성패 여부는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을 것이다.

비평가로서 문강형준이 드러내는 경향성은 책의 뒤에 붙어 있는 '감사의 말'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뉴레프트리뷰>라고 할 수 있는 <문화/과학>이 그의 지적 성장을 도운 터전이었다. 내가 간접적으로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는 초기 문화 연구 멤버들과 같이 부대꼈던 장본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나보다 늦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보다 더 일찍 문화 연구의 세례 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허언을 허락한다면, 그야말로 199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국 문화 연구 전통의 맥을 잇는 적자인 셈이다.

내 입장에서 문강형준 같은 동세대 비평가가 문화 정치학의 전선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다. 그리고 더불어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책이 보여주는 비평의 지세가 한국 문화 비평의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또 다른 갈래를 보여준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가 아직 젊다는 것은 그래서 여전히 한국 문화 비평의 가능성을 믿는 독자들에게 더 없는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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