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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것'보다 '우둔한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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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것'보다 '우둔한 것'이 문제다!

[해방일기] 1947년 4월 6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1947년 4월 6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민정장관에 취임한 지 두 달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가 진짜 '민정'으로 넘어갈 때까지의 임시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두 달이 짧은 시간이 아니죠. 취임을 응낙할 때와 비교해서 이 자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안재홍 :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애초부터 밝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리가 아니니까요. 막상 일하면서 정말 어려운 자리라는 생각은 더 깊어집니다.

이 자리가 가진 모순성이 무엇보다 어려운 점입니다. 독립국이라면 '공무원'이라 불려야 할 군정청 모든 직원의 문제죠. 미국인에게 월급 받고 보호받는 종속적 입장이면서 또한 필요할 때는 조선인을 대변해서 그들과 맞서야 하는 입장이란 점입니다.

김기협 : 미군정은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정장관 이하 군정청 직원들의 입장에 모순될 것이 없죠.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보다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리라는 것을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일이죠. 군정청 안에 들어가 겪어보니 이해관계의 상충을 더 분명히 느끼실 수 있겠습니다.

안재홍 : 밖에서 볼 때에 비해 군정에 대한 개인적 인상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양심적으로 일하고, 일부 난폭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손가락질을 받더군요.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직원들은 오히려 조선인들 사이에 더 많습니다.

그런데 미군 소속 직원들의 사기(士氣) 문제가 있어요. 영관급 장교들이 각 기관을 맡는 등 중요한 역할인데, 조선 주둔 끝나면 이 사람들 거의 예외 없이 전역 대상인가 봐요. 그래서 품성이 괜찮은 사람들도 뒷날 생각을 않고 해이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잘못을 봐도 엄격하게 지적하려 들지 않죠.

김기협 : 제가 군 복무할 때 "군대는 그때뿐이야!" 하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부터 유행이 시작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군대라는 조직이 형식을 너무 중시하기 때문에 내면적 도덕성이 위축되기 쉽지요. 꼭 미국이 감군(減軍) 단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군정'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선생님 같은 원칙주의자가 끼어들었으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많이 느끼기도 할 것 같은데요. 특히 군정청 근무를 특권으로 알고 탐욕을 부리던 사람들이 선생님을 무척 미워할 것 같습니다. 두 달 전 취임하실 때 한민당(한국민주당) 주변에서 "저 자를 한 달 안에 끌어내리겠다"고 벼르던 분위기도 그런 '통역 정치' 분위기에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견딜 만하시던가요?

안재홍 : 세간에서 흔히 '통역 정치'라고 비난과 조소의 뜻을 담아 이야기하는 것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좀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를 느낍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은 '갑'이라 하는 것을 '을'이라 통역해서 남을 골탕 먹이고 자기 이익을 취하는 것인데, 그런 악질적인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양심껏 일하는 사람들도 상황 인식의 잘못 때문에 본의 아니게 조선에 해를 끼치는 일이 많습니다.

조병옥 씨와 장택상 씨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는 짓도 많이 하지 않나 의심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군정청에 들어와 보니 직원 중에 그 두 분처럼 심한 행동을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고급 간부들 중에는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참 열심히 일하고 양심적으로 일하는데도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많아요. 그래서 나는 '통역 정치'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보다 제도적-구조적 문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김기협 : 당시 인사행정처장으로 있던 정일형 씨와 갈등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정 씨의 회고 중 "각료 회의, 국-차장 회의, 그리고 도지사 회의를 주관함으로써 국내 행정의 총수일 뿐만 아니라, 하지 장관이나 러치 장관과의 개인적 관계도 깊어져서 자연 군정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오직 한 길로>(정일형 지음, 을지서적 펴냄), 157쪽) '행정의 총수'로 자임하고 있다가 선생님이 민정장관을 맡으니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을 것이 짐작됩니다. 정 씨는 1904년생이니 선생님보다 15세 연하군요.

안재홍 : 무척 선량하고 대단히 답답한 사람이죠. 한신(韓信)이 항우(項羽) 휘하에서 유방(劉邦)에게 넘어올 때 항우의 용맹과 도량이 천하에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한신이 "필부의 용기, 아녀자의 어짊(匹夫之勇, 婦女之人)"이라 평하며 유방의 용기를 북돋워주는데, "부녀지인"이란 말이 정 씨의 선량함에 딱 맞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자세가 정 씨만큼 투철한 사람, 세상에 많지 않아요. 그런데 누구에게 어떻게 착하게 대하느냐 하는 게 문제죠. 기독교인끼리만 뭉치려 들고 서북 사람들끼리만 감싸려 드는 게 무엇보다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사를 맡고 있다 보니 군정청 '평안도 인맥'이란 게 생겨났는데, 그 사람은 고향 잃은 사람들을 우대해 줘야 한다는 거예요. 공직 사회에 인맥과 파벌이란 게 어떤 폐단을 일으키는 건지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그 맹목적인 반공. 나도 좌익에 대해 경계심을 많이 가진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공산주의가 왜 나쁜 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반공 하는 것 같아요. 평안도에서 공산당이 득세하며 교회에 간섭하는 걸 보고 반공 한다는데, 얘기 들어보면 큰 간섭도 아니에요. 이남 각지에서 인민위원회가 탄압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그만 이유로 그렇게 편을 가르는 태도가 민족의 단합을 가로막는 것이 걱정됩니다.

김기협 : 그렇죠. 사악한 사람은 눈에 잘 띄지만 그 수가 많지 않죠. 반면 우둔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지만 수가 많습니다. 파시즘에 관한 연구를 보면 세상이 잘못 되는 데 사악한 사람보다 우둔한 사람들의 역할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 사령관이 미국에서 50일 만에 어제 돌아왔습니다. 하지 사령관과 그 동안 대리를 맡은 브라운 소장, 그리고 러치 군정장관이 미군정 최고 책임자들인데, 그 사람들과는 함께 일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지요?

안재홍 : 브라운 장군이 제일 편합니다. 지난 가을 조미공위를 함께하면서 친숙해졌을 뿐 아니라 두터운 교양을 갖춘 사람이에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뛰어납니다. 지금까지 민정장관 직을 수행하는 데 그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 사령관과 러치 장관, 둘 다 개인적으로는 책임감도 강하고 선량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하던 정일형 씨의 선량함과 같은 자기 중심적인 선량함이에요. 한 번 편견을 가지면 그걸 뛰어넘기가 매우 힘든 사람들이죠.

하지 장군은 그래도 사령관의 책임 때문에 생각을 넓히려고 애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조선에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여러 가지 일에서 훨씬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죠. 내가 민정장관을 맡을 엄두를 낸 것도 하지 장군에게 최소한의 믿음을 가지게 된 때문입니다.

김기협 : 행정을 펼치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돈인데, 4월 1일부터 시작된 신년도 예산이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지요? 세출 필요와 세입 전망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예상된다고 들었습니다. 침체되어 있는 경제상황이나 행정의 미비와 혼란을 감안하면 균형 잡힌 예산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지난달부터 미국의 경제 원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원조를 받아야만 조선의 행정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실정인가요? 행정부 예산을 외국 원조에 의존한다면 독립국의 자격에 미달되는 것 아닐까요?

안재홍 : 각 부서에서 필요한 예산안을 작성해 올린 것을 수합해 보니 세출이 총 550억 원에 이릅니다. 세입 전망은 총 155억 원이죠. 세출을 줄여보려고 중앙경제위원회에서 검토해 왔는데, 460억 원 밑으로는 줄일 수가 없다네요. 그래서 작년도 세출액 150억 원에 10퍼센트를 더한 165억 원으로 일단 운용을 해나가면서 아직도 예산안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작년 지출 수준에 맞춰서 뭐든 집행하라고 해놨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4월 1일 부로 군정청 직원 봉급을 평균 3할 올렸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5할 올리려고 계획해 온 것을 줄여서 올린 것인데도 예상 운영 원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경제 원조가 필요하죠. 물론 경상비를 원조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원조 자금은 경제 기반의 정비와 개발에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왜곡된 산업 구조의 정비에 필요한 비용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야 할 텐데, 독립 국가를 세운 뒤에나 가능한 일이겠죠.

이북에서는 작년 농업 소득세를 20퍼센트 넘게 거뒀다는데, 가혹한 세율이지만 토지 개혁 덕분에 큰 문제없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자립적 회계가 가능하겠지요. 국가 경제가 허약한 지금 단계에서는 사회주의 정책이 유리한 점도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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