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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테러의 또 다른 공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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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테러의 또 다른 공범 <동아일보>!

[해방일기] 1947년 4월 4일

1947년 4월 4일

3월 17일 새벽 1시에 계동의 여운형 자택 사랑방에서 폭탄이 터졌다. 여운형이 집에 있을 때 기거하는 방인데 그는 집에 없었고 식구들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날 뉴델리의 범아시아대회 참석차 출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사건 직후 경찰은 사제폭탄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4월 3일에 와서 범인이 3월 20일에 자수했다고 발표했다.

3일 수도경찰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달 17일의 여운형 댁 폭탄 사건 범인 정창화(27)는 사건 발생 3일 후에 수도청에 자수하였다는 바 범인의 경력과 범행 동기는 다음과 같다 한다.

범인 정창화는 일명 백중이라고도 하는데 해방 전에는 북지에서 팔로군 특별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세 번 검거되고 일본 영사관 경찰에 네 번 검거되었으며 그리고 2년 6개월 동안이나 복역한 일이 있는 혁명 청년이라는 바, 해방 후 여 씨를 사모하여 여 씨의 경비원으로 있는 동안 여 씨의 정치 노선이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여 여 씨의 앞을 떠나 작년 12일에 북조선에 가서 평양보안서 간부 김병원을 통하여 다이너마이트 10개와 전관 10개와 도화선 두 자를 1700원에 사가지고 12월 26일에 다시 돌아와서 기회를 보다가 지난 달 12일에 동대문시장 뒷골목에서 헌 배터리 철통을 500원에 사서 돈암동 458번지에서 인화용 폭탄 한 개를 만들어 17일 오전 0시 50분경에 여 씨 댁에 잠입하여 사랑방 아궁에 폭탄을 장치하고 도주하여 폭탄만 1시경에 폭발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러나 범인은 경찰에 죄 없는 혐의자가 속속 체포되므로 미안하게 생각하였음인지 범행 3일 후에 수도청에 자수한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여운형은 3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정창화라든가 백중이라는 사람은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60평생에 있어 경비원이란 한 번도 가져본 일이 없었다. 하여튼 나는 그러한 사람은 전연 모르겠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4일자)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 동안 이 사건이 좌익의 소행인지 우익의 소행인지 시중에 이론이 분분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범인을 체포해 놓고 아무 발표 없다가 두 주일이 지나서야 발표를 한다는 것이 참 미심쩍은 일이다.

발표 내용에도 미심쩍은 점이 많다. 여 씨 측근 인물이 이북 공산주의자를 배경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하는데, 평양보안서 간부가 배후라면 어째서 폭탄을 주지 않고 폭탄 재료를 사줬을까. 여운형 본인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말 여운형의 측근일까.

정병준은 <몽양 여운형 평전> 439쪽에서 경찰의 이 발표를 놓고 "발표 내용은 황당했다"고 평하고, 438~447쪽에서 이 사건을 세밀히 들여다봤다.

정병준에 따르면 정창화는 중국에서 8로군이 아니라 국민당 군의 공작대원이었다고 한다. 수도경찰청은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그의 경력을 조작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후 정창화의 활동이다.

반민특위 간부들을 위시한 신익희, 이문원, 노일환, 지대형 등 제씨를 살해하고자 한 일대 살인 음모 사건은 그동안 검찰청의 민활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수도청 수사과장 최란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등을 체포, 취조하는 동시에 그 외 관계자도 속속 검거에 착수하고 있다 하는데, 29일 전문한 바에 의하면 검찰청에서는 2, 3일 전부터 전기 최, 홍 외에 두 명의 청년도 검거 문초 중에 있다는 바, 그들 중에는 한때 고 여운형 씨 댁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며 금번 사건에 있어서 시초부터 전기 최, 홍 등에게서 직접 지령을 받고 한편 이 사실을 김준연, 조헌영 씨 등 일부 국회의원에게 보고를 하게 한 백민태도 포함되어 있다 한다. 한편 검찰청에서는 동 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나는 대로 근일 동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리라 한다. (<한성일보> 1949년 1월 30일자)

여기서 '백민태'가 정창화의 별명이다.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보름 후 이 사건의 기소 내용이 이렇게 보도되었다.

반민특위 간부를 암살하려는 노덕술, 최란수, 박경림 등 4명은 근 20일에 가까운 서울지검의 치밀한 조사 끝에 드디어 지난 12일 살인 예비죄 등으로 기소되었다 함은 작보한 바이거니와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임석무 판사가 담당, 불일간 공판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여 공판의 결과가 주목되고 있는데 동 사건의 전모를 기소 사실에 의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백민태는 철저한 우익 사상을 가진 사람인데 작년 11월 중순경 최운하 경찰국 사찰과장의 소개로 동 부과장 홍을 알게 되었는데 5, 6일 후 백은 홍을 찾아와 북한에 대한 모종의 공작을 하겠다고 일금 30만 원을 요구하자 홍은 사찰과에는 그리 여유가 없다고 당시 수사과장인 최를 소개하여 30만 원의 융통을 꾀한 것이라 한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백과 최, 홍 등이 알게 된 것인데 당시 국회에서 반민자 처벌법이 논의됨에 전기 4명은 반감을 가지고 있던 차라, 백에게 반민법 제정을 역설하는 김웅진, 김장렬, 노일환 제 의원을 납치 감금한 후 강제로 "나는 이남에서 생활할 생각이 없어 이북으로 간다"는 요지의 성명서 3통을 자필로 작성케 한 후 대통령, 국회 급 신문사 등에 전달케 하고 38선 부근에서 전기 3의원을 살해한 다음 마치 우익 청년들이 살해한 것처럼 가장, 발표할 것이 합의되었었다 한다.

전기 3의원 외에도 자기들 눈에 거슬리는 정부 급 정계 요인들을 살해할 것도 공모하고 최, 홍 2명은 12월 15일경 백에게 일금 30만 원을 교부할 것을 약속한 다음 박흥식으로부터 받은 15만 원 수표를 12월 2, 3 양일에 白에게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금년 1월 8일 최는 수사과장실에서 암살 무기로 권총 1정, 수류탄 5개, 탄환 3발과 현금 7만 원 그리고 박정근 씨가 교부한 2만 원짜리 보증 수표를 주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9년 2월 16일자)

약 2년 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정창화는 수도경찰청 간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의 '자수'를 받았다가 풀어준 경찰의 속셈이 무엇이었을까? 1947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하나를 보면 그 속셈을 알 듯도 하다.

"여 씨는 모르겠다! 범인은 왜 몰라요?-해결 못 짓는 여 씨 서생 문제"

지난 번 여운형 씨 댁을 폭파한 범인 정창화에 대하여 여 씨는 자기 집 서생으로 있던 일이 없다고 부인하여 의아한 감을 주고 있어 경찰에서는 12일 상오 12시 반부터 시내 중부경찰서 서장실에서 대면하였다. 여 씨가 먼저 물어온 다음 범인이 물어왔는데 그 순간 여 씨의 태도는 굳은 표정이었다. 범인은 여 씨를 보자 수갑을 채운 손으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려고 하며 얼굴에는 미소를 띠웠다.

여 : 잘 모르겠는데. 내 집에 있던 사람이면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정 : 선생님이 절 모르신다고요?
여 : 전연 알 수 없다.
정 : 그러면 작년 4, 5월경 청년 두 사람이 있었지요?
여 : 내 집에는 서생이란 것은 두어본 일이 없다.
정 : 그 점까지 부인하신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 : 전연 기억에 없다.
정 : 그러면 선생님 댁 현관 옆 마루방에 있었는데?
여 : 도대체 우리 집에 청년을 두어본 일이 없다.
정 : 선생님, 저는 선생님 댁에 있더니만치 전후 사실을 감추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자수한 이상 전부를 말하였습니다.
여 : (격분하여) 기억에 없는 것을 없다고 하지.
정 : 선생님, 내 얼굴의 기억이 없다니요. 선생님, 청년들 앞에서는 그러지 마십시오.
여 : 양심은 청년에게 중대한 것이야. 어찌 양심을 속이나.
정 : 양심은 청년에만 중대하고 지도자에는 중대하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모르신다고 부인하시면 동네 이웃사함들에게 물어 주십시오. 선생님, 제가 댁에 있던 것을 없다고 하면 죄가 가벼워집니까?

하며 답답한 심정을 말할 수 없어 눈물을 지으며 있을 때 여 씨는 격분하여 가겠다고 나섰다. 때는 12시 45분이었다.

정병준은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테러범한테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을 불러다가, 뻔한 거짓말을 하는 터러범의 '훈계'를 듣게 한 경찰은 몽양의 봉변을 즐기는 듯했다"고 논평했다. 범인과 경찰이 짜고 피해자를 놀려먹는 판이다.

그러나 정병준은 이 야바위판의 공범 하나를 놓쳤다. <동아일보>다. 위 기사의 필치를 보라. 미소를 띤 범인의 얼굴과 굳어진 여운형의 얼굴을 대비시키는 저 필치를. 이 대면 장면을 보도한 기사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다른 신문에서는 찾지 못했다.

정병준은 해방 후 여운형이 당한 테러를 12건 집계했는데 이것이 그 열 번째였다. 자칭 범인 정창화는 경찰과 <동아일보>의 협력으로 여운형을 마음껏 모욕하다가 막상 검찰에 이관되자 진술을 번복하고 4월 26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된다.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는데 자백을 번복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 씨 댁 폭탄범 사실을 부인"

여운형 씨 댁을 폭파한 범인이라고 자수한 정창화는 서울지방검찰청 조재천 검찰관의 손에서 문초를 받고 있던 바, 17일에는 자기는 전혀 그러한 범죄를 행한 일이 없고 다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허위 자수한 것이라고 사실 전부를 부인하여 검찰관을 무색케 하였는데 18일에는 일단 문초를 중지하고 피의자의 동행을 감시하고 있는데 사건은 실로 수수께끼에 들어가 일반의 많은 관심을 모으게 하고 있다.

1) 범인을 잡지 못하여 애쓰는 경찰관에 동정한 것.
2) 많은 혐의자가 공연히 문초를 받고 있는데 동정한 것.
3) 북지(北支)에서 함께 일하던 동지들에게 자기 소재를 알게 하려는 것.
4) 여운형 씨는 기회주의자로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 (<동아일보> 1947년 4월 19일자)

거짓 자백만으로도 공무 집행 방해는 성립되고, 조사 과정에서의 발언으로 명예 훼손이나 무고가 성립될 텐데,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이런 장난을 치고도 잘 쉬고 나가게 해주는 것이 당시 경찰과 검찰의 분위기였다. 이 사건의 피해자가 몇 달 후 정말로 암살에 목숨을 잃고 범인은 정치테러에 또 다시 나서게 되는 데 경찰과 검찰의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인가?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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