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선택
홍콩 행정장관 선거가 지났다. 렁춘잉(梁振英)이 당선되었다. 타이완에 이어 홍콩까지, 속속 2010년대 중화권의 꼴이 갖추어져 간다.
렁춘잉의 당선을 쉬이 '친중파의 승리'라고 일갈하기는 힘들다. 올해 초만 해도 그가 당선되리라 예상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헨리 탕(唐英年)의 스캔들이 결정적이다. 혼외정사와 호화 주택 문제로 민심 이반이 상당했던 것이다. 일찌감치 그를 점찍었던 중국 또한 경로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반중 감정을 악화시킬까 우려했던 것이다.
게다가 홍콩(과 마카오)은 차기 주석 시진핑의 관할 구역이기도 하다. 민심을 거스른 선택을 강행했다가 역풍을 맞는다면 권력 이양에도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친중파의 승리'이기는 하되, 중국이 홍콩의 민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지점도 눈여겨볼 일이다.
오히려 한층 흥미로운 대목은 홍콩 자본가들이 베이징의 뜻을 거슬렀다는 데 있다. 그들은 차기 권력의 직접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헨리 탕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렁춘잉의 친서민 민생 행보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렁춘잉은 평범한 경찰관의 자식으로 역대 행정장관들과는 그 출신 성분이 다르다.
그리하여 홍콩 엘리트들은 그간 소원했던 민주파와 연대하여 렁춘잉을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민주파의 반렁-반중-반공 구도의 색깔 공세에 묻어간 것이다. 이는 홍콩 반환 15년을 맞이하여 부상한 의미심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중국 공산당-홍콩 자본가 연합이라는 기존의 담합 구도에 균열이 가고, 중국 공산당-친중파 대 홍콩 자본가-민주파 연합이라는 새로운 구도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 직선제 실시를 앞두고, 향후 홍콩의 진로를 가늠해볼 수 있는 유력한 징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선거는 끝났으되, 선거 국면은 지속되고 있다. 당장 9월에 입법회 선거가 있을뿐더러, 렁춘잉 본인부터 2017년 직선제에 출마하여 연임할 뜻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민주파도 향후 5년간 시정에 협조할 뜻이 일절 없음을 밝히고, '선전 포고'를 한 상태이다. 렁춘잉의 배후는 공산당이며, (중국)공산당이 홍콩의 무대에 직접 올라선 것이기에, 극도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파의 '지하 공산당원' 공세로 렁춘잉의 지지도가 대폭 떨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풀뿌리 차원에서 반중, 혹은 반공 정서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반공-반렁의 기치 아래 홍콩의 민주파와 엘리트층이 연대하여 과두제를 도모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지 모른다.
홍콩 반환 이래 민주파가 줄곧 요구한 것이 '민주'이다. 대륙은 전제적이고 비민주적인 공산 정권이기에, 조속한 민주 제도의 도입이야말로 홍콩의 번영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친중파와 홍콩 좌파들은 이러한 반중 정서 자체가 영국의 식민 통치와 냉전을 통해 형성된 양분법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여긴다. 대륙 대 홍콩, 전제 대 민주라는 인식 구도야말로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결국 홍콩의 균열 또한 민주란 무엇인가, 나아가 어떤 민주인가를 둘러싼 동시대적 현상이라 하겠다. 대륙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화두인 것이다. 2017년 행정장관 직선은 그 경합하는 민주의 일대 격전장이 될 공산이 크다. 이번 선거는 그 전초전적 성격이 농후했던 셈이다.
허나 양자 모두 홍콩의 국지적 영역의 민주에 방점이 찍혀 있음이 못내 아쉽다. 홍콩이 노정하는 '일국양제'라는 예외적 실험에 대한 안목은 부족한 것이다. 일국양제는 일국 내의 민주라는 근대적 사고의 지평을 돌파하는 측면이 크다. 근대 국가의 재구성과도 직결되는 과제로, 정치적 상상력의 해방을 촉발하는 것이다.
진화하는 일국양제
일국양제의 영문 번역은 'One Country, Two Systems'이다. 'One State'가 아니라 'One Country'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계약에 입각한 법률적 개념의 국가(state)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국'의 그 '國'이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정치 공동체에 가깝다. 국가(國家)보다는 가국(家國)인 셈이다.
그래서 그 일가(一家)의 한 지붕 아래서 다른 법체제의 시행도 가능하다. 즉, 중국이 홍콩에 요구하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체제나 제도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조국(산하)', '(사해)동포'라는 전통적 문명 개념에 가깝다. 근대적 국민 국가를 초월하여 '문명 국가'의 지평에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 홍콩의 관계는 정책적 차원을 넘어서 심층적인 사고 체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의 정치 이론(자유주의는 물론 마르크스주의도)으로는 쉬이 해석하기 어려운 다른 지평의 사유인 탓이다. 근대 정치학에서 주권은 곧 현실 정치에서의 통치와 직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국은 홍콩의 주권을 보유할지언정, 주권을 직접 행사하지는 않는다. 주권의 담지자와 주권의 시행자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港人治港', 즉 홍콩은 중국이되 홍콩인이 다스리는 것이다. 이는 국민 국가 단위의 사고와 발상이 아니다. 사실상 유가 전통의 천하 관념을 복원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일국양제를 덩샤오핑 개인의 빼어난 전략이라고만 치부하기도 힘들다. 역대 중국 왕조가 변경을 다루는 특유의 정치철학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청 제국의 유산이 뚜렷하다. 제국적 주권 하에서 지역마다 개별적인 통치 정책을 채택했던 것 말이다. 만주와 몽골, 신장과 티베트 그리고 중원에서 각기 상이한 제도가 적용되었다.
중원은 유교 문명을 고수하되, 변방은 불교나 이슬람 문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는 중원은 '사회주의'를 고수하되, 홍콩이나 타이완 등 일부 지역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허용할 수 있다는 발상과 상통한다. 타이완에서는 독자적 군대의 허용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일부의 경제 특구에서는 해외 자본을 도입하여 사회주의 경제를 보완하고, 생산력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개혁 개방 또한 제국의 고전적 정치철학의 연속이라고 함직하다. 개혁 개방과 일국양제 구상이 동시에 제기된 것도 우연의 소산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일국양제의 상상력은 반근대 국가적 국가 이론이라 하겠다. 근대의 곤경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제국적 정치 전통을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21세기 중국의 행로를 '재봉건화'라고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군현제가 일국일제의 통일성을 강조한다면, 봉건제는 일국다제 아래 차이성과 다양성을 보장한다. 상하 간, 대소 간, 중심-주변 간 차이는 있으되, 그 차이를 동질화로 해소하지 않는 것이다.
충칭 모델, 광둥 모델, 상하이 모델, 선전 모델, 홍콩 모델, 타이완 모델이 우후죽순 경합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징후이다. '중국 모델론'은 애당초 복수형인 것이다. 이로부터 '일국일제'라는 20세기의 신화가 허물어지는 상쾌함과 상큼함을 맛볼 일이다. 즉, 중국은 하나의 국가일 뿐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철학 개념이자, 근대와는 구분되는 정치 질서의 체현이다.
중국 혁명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중국은 혁명을 통하여 제국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그 속성을 속 깊이 보존한 것이다. 그래서 좌-우의 근대적 척도로는 헤아리기 어렵다. 100년간 고독했던 '천하'(天下)라는 옛말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짐작컨대 중국의 '민주화' 또한 이러한 역사적 경로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돌아보면 전 지구적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버금갔던 20세기는 법가와 군현제의 시대였다. 허면 탈근대는 (신)유가와 (재)봉건의 시대일까? 1997년 홍콩 반환은 아편 전쟁으로 야기된 근대의 꼬리표를 떼어낸 사건이었다. 그와 함께 출범한 '일국양제'는 50년간 지속된다. 그 반세기 후, 2047년의 중국을 더듬어 보는 긴 호흡이 절실하다.
중국의 홍콩화도, 홍콩의 중국화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쌍방향의 동학을 아울러 아편 전쟁 이전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흡사 미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Back to the Future). 동아시아는 실로 크게 반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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