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19일 중국공산당의 본거지 연안(延安)이 국민당 군에 함락되었다. 8개월 전 국공 내전(중국에서 공식 명칭은 '해방 전쟁') 발발 후 공산군이 최악의 수세에 몰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북 지도자들이 중국 공산군의 대대적 지원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장면을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김동노·이교선·이진준·한기욱 옮김, 창비 펴냄) 334~335쪽에 이렇게 서술했다.
미국 정보기관은 1947년 초 한중 국경을 넘나드는 군대와 물자의 이동을 예의 주시했다. 북한의 군사력이 1946년 후반 한국 내에서 급속히 팽창하면서 만주에서의 춘계 공세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약 3만 명의 조선인이 김책의 지휘 아래 1947년 4월에 만주로 이동했으며, 그 무렵 만주에 있는 중국공산당 병력의 15~20퍼센트는 한국인이었다.
그 시점에서부터 1950년 겨울까지 미국 정보기관은 이 병사들을 '중국 공산군' 또는 '중국 공산군계 한국인'이라고 불렀다.(이 책은 번역이 미심쩍은 대목이 많은데 이 대목도 그중 하나다. 후에 원서를 입수해서 이 책의 인용을 모두 대조할 필요가 있겠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이란 언제 누구 귀에 들린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중국 공산군계 한국인"은 원서에 뭐라 적힌 것일까?)
커밍스는 북한의 변화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매우 중시해서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에 이를 다루는 한 장(제11장 "North Korea's China Connection", 350~376쪽)을 두었다.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에 비해 중국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1960년대 초 중·소 갈등 중에 북한이 중국 편을 들 때까지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감추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 항복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해방 공간의 조선에 여러 모로 큰 영향을 끼쳤다. 장개석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해-중경 임시정부 인사들은 조선 문제에 중국이 발언권을 가지기 바랐다. 독립동맹 등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독립동맹 인사들은 중국공산당의 이념과 전술을 도입했다. 그리고 중국 내 조선인의 활동과 거취가 국내로 이어지는 것이 많았다.
중국 내 조선인 중 만주에 정착한 농민 집단은 중국 조선족의 출발점이 되고, 그 향배가 꽤 밝혀져 있다. 그러나 만주 이외 지역의 조선인 활동은 밝혀진 것이 별로 없는데, 사실에 있어서 조선 국내와 연결된 중요한 활동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3월 16일자 일기에서 다룬 마카오 무역 같은 것도 중국의 조선인 사업가들이 많이 관여했을 것이다. 1950년 봄 체포될 '거물 간첩' 성시백은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중국 인맥을 활용한 사업이었다.
중국 내 조선인 활동은 조금이라도 드러난 것이 있다면 열심히 활용할 것이고, 오늘은 국공 내전을 중심으로 중국 사정을 한 차례 개관해 둔다.
1923년의 제1차 국공 합작은 갓 태어난 중국공산당의 발전을 위해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 외국의 원조를 바라고 있었는데 소련만이 원조를 제공했고, 그 조건이 국공 합작이었다. 1925년 손문 사거 후 정권을 장악한 장개석이 1927년 봄부터 공산당 탄압에 나섬으로써 합작이 중단되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고 중원을 넘보는 상황에서도 장개석 정권은 공산당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일본의 침략에는 비굴한 자세로 임했다. '내부의 적'을 완전히 소멸시킨 뒤에야 외부 문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전면 침공이 임박한 1936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장학량(張學良)이 일으킨 '서안(西安) 사변'을 계기로 제2차 국공 합작이 맺어졌다. 제2차 국공 합작은 그리 공고한 것이 못되어서 양측 사이에 협력은커녕 적대적 관계가 이어졌지만 적대적 관계가 쉽게 폭발하지 못하게 하는 어느 정도의 억지력은 발휘했다. 1940년 12월 국민당 정부의 압박으로 인한 공산계 신4군의 궤멸 이후 실질적 협력 관계는 완전히 중단되었지만, 국민당 정부를 원조하는 연합국의 압력 때문에 공식적 관계는 유지되었다.
일본 항복 후 국민당 정부는 만주를 제외한 중국 전국(대만 포함)의 일본군 항복 접수를 맡았다. 덕분에 국민당 군은 많은 지역을 일거에 점령하고 공산군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일본 점령 지역을 모두 넘겨받는 것이 국민당 군에게 벅찬 일이어서 수송 등 미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은 국민당 정부에 엄청난 거액의 원조를 제공했는데, 그 대부분이 군사 원조였다.
장개석 정권은 미국의 도움으로 공산군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면서도 만주 지역의 확보를 놓고 노심초사했다. 소련에게 국민당 군이 진주할 수 있을 때까지 만주 철수를 늦춰달라고 부탁해서 소련군의 공장 약탈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소련군이 만주에서 반출한 기계류의 가치는 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미군에게 수송 편을 제공받아 국민당 군이 소련군으로부터 점령 지역을 직접 인계받게 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 정권에 대항할 근거를 만들 수 있었다. 소련은 국민당 정권과 우호 조약을 맺고 국민당 정권에게 협조했지만, 만주의 소련군은 중국인 동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산당의 활동을 허용하고 일본군의 무기와 자기네 보급품 일부를 나눠주었다. 국민당 군은 주요 거점들을 소련군에게 공식적으로 넘겨받았지만, 주변 지역에서는 공산당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국민당 정권은 만주 지역에 세력을 얼른 넓히기 위해 토호 세력과 손을 잡았다. 토호 세력의 상당 부분은 '마적(馬賊)'이라 불리던 존재였다. 이로 인해 토호 세력에게 시달리던 일반 주민들이 대거 공산당을 지지하게 되었는데, 조선인 주민들의 호응이 특히 두드러졌다.
해방 당시 만주 지역에는 약 200만의 조선인이 자리 잡고 있었고 대략 그 절반이 귀국했다. 잔류한 절반은 대부분 영세농민이었다. 그들에게는 공산당의 토지 개혁 약속이 반가웠을 뿐 아니라 중국인 토호 세력의 횡포를 막아주는 것도 고마웠다. 그래서 많은 조선인이 인민해방군에 자원했다.
1945년 말 독립동맹 귀국 때 신의주에서 소련군 당국이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대다수 조선의용군이 입국을 포기했다. 당시 독립동맹과 동행한 조선의용군이 4개 대대였으니 수백 명 인원인데 그 후에도 상당수가 같은 길을 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6년 2월 17일자 <자유신문>의 "조선의용군 전모-귀국한 관계자 좌담회" 기사를 1946년 9월 2일자 일기에 인용했는데, 유의할 대목이 있다.
박훈 : 작년 11월 만주까지 왔던 일부가 신의주까지 왔다가 북만 각지 동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만주 각지로 파견되어 갔습니다.
고찬보 : 만주에는 일본 패잔병이 토비로 변하여 동포들의 생명 재산을 위협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일청 : 작년 11월 18일 조선의용군 통화현 경비대가 일본 패잔병 300여 명을 무찌른 꽤 대규모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아주 비적단으로 화해 버린 왜군 300이 산속을 근거로 약탈과 폭행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을 의용군 100여 명이 불시에 습격을 하여 30명을 격멸하고 270여 명을 포로로 하였는데 이쪽은 부상자 하나 안 났습니다.
수백 명 규모의 전투를 할 만한 조선의용군 부대가 만주에서 동포를 보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군 점령 하의 장춘(長春)에서 조선의용군이 해방군의 대열 속에 어울려 있는 모습을 그린 대목도 있었다.
고찬보 : 내가 최근에 가장 감격한 것은 작년 11월 7일 봉천에서 거행한 조선의용군의 행진이었습니다. 이 날 10월 혁명을 기념하여 적군, 조선의용군, 중국군, 몽고군. 시민들의 순서로 행진을 하였는데 가장 질서정연하고 외기가 늠름한 군대는 가장 남루한 의복을 입은 우리 조선의용군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보기에도 그러했던 모양으로 중국 사람들도 모두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박훈 : 더구나 우리 동포들은 감격이 지나쳐 박수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완전 무장을 한 1만여 명의 우리 군대가 보무당당하게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격했던 모양입니다.
1945년 11월 7일 시점에 "1만여 명의 우리 군대"가 장춘에서 행진하고 있었다는 것은 곧이듣기 힘든 말이지만, 그런 이미지가 사람들 마음에 그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다. 상당수 조선의용대원이 무장해제 요구 앞에 입국을 포기한 것은 무장대로서 역할을 맡을 다른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만주 지역의 조선인 주민과 합류해 토호 세력과 맞서는 것이 그 역할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이 후에 인민해방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맨 위에 인용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는 김책이 이끄는 약 3만 명의 북조선 군대가 중국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나는 커밍스가 그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만주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조선인이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부분은 지역 주민이고, 나머지도 중국 다른 곳에서 온 조선의용군 출신일 것으로 생각한다.
3월 7일자 일기에서 1946년 2월 만들어진 '보안대 대본부'를 군대보다 경찰로 본다는 의견을 적었는데, 얼마 전 만난 전문 연구자에게 군대 성격이 맞는다는 의견을 들었다. 더 조사해서 수정해야겠지만, 1947년 4월 시점에서 3만의 병력을 중국에 파견할 만한 규모의 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북의 군대는 1948년 2월 조선해방군 창군 이후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돌베개 펴냄) 95쪽과 99쪽에 따르면 1949년 9월 시점에서 5개 사단에 8만 병력, 1950년 6월 시점에서 7개 사단 규모였다고 하니 병력은 10만 남짓이었을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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