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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서 태어난 10대 예수 혹은 야누스, 그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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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서 태어난 10대 예수 혹은 야누스, 그 목소리는…

[프레시안 books]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문학동네 펴냄, 2007년) 이후 꽤 오랜만에 김영하의 장편이 출간되었다. 작품의 제목을 짓는 작가의 작명 센스를 빌리자면, "오빠가 돌아왔다"고 그간의 기대감을 뭉뚱그려 말할 수 있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문학동네 펴냄)는 광신도와 남창, 걸인과 사기꾼, 창녀들과 가출한 십대들, 신흥 종교의 교주와 호객꾼들, 소매치기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그중에서도 이 모든 욕망이 뒤엉킨 "한 편의 악몽"과 같은 고속버스터미널의 화장실에서 태어났고, 그 즉시 버려진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제이'이다. 함께 서사를 진행시키는 친구들의 이름이 '목란', '동규'인 것을 감안하면, '제이'라는 이름은 어떠한 상징을 가진 영어의 이니셜로 읽힌다. 작품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Jesus)와 야누스(Janus)이다. 소설의 곳곳에 작가의 의도적인 구절이 있기에 '제이'라는 이름에 담긴 이 두 가지 의미를 따라 읽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독법이라고 생각된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먼저, 예수의 '제이'. 소년이 태어난 날은 종말론자들이 휴거일이라고 주장한 "1992년 10월 28일"이다. 기독교의 종말은 말 그대로 최후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미혼모 십대 소녀의 몸에서 태어난 제이는 터미널 옆의 화훼 상가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는 '돼지엄마'에 의해 거두어진다.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방금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온 미끌미끌한 핏덩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돼지엄마는 신비롭게도 "처녀 가슴에서 젖이 나오는" 체험을 하고, 천사의 날개가 퇴화된 듯한 "부어오른 듯 불룩 튀어나온 양쪽 어깻죽지 부근의 뼈"를 가진 아이를 기른다.

도시의 변두리에서 비교적 정상적으로 성장하던 제이는 가난을 통해 돼지엄마에게 버림을 받고 보육원에서 자라난다. 그곳에서 제이는 "자기 영혼을 다른 존재에 불어넣어 그 삶을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빙의"의 체험을 하고, 이것이 자신이 가진 특수한 능력임을 자각한다. 제이는 자신의 능력과 이 능력이 요구하는 운명을 동규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있어. 바로 센서야. 감각을 하는 게 그것들의 목적이야. ……고통을 감지하는 센서……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고아원을 나와 서울로 올라온 열여섯 살의 제이는 대한민국의 제일 밑바닥 계급이라고 말해지는 가출 십대들의 끔찍한 삶을 체험한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야생"이며, "십여 년 전 놀이터에서 하던 소꿉놀이의 악몽 버전 혹은 포르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참혹한 폭력과 난교의 나날이다. 신뢰를 공유하는 친구도, 사랑의 언약을 나누는 연인도 존재하는 않은 이 야생의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는 폭력이다. 때로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때로는 한계를 넘은 소년들의 악행을 응징하기 위해 제이는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만 이는 자신의 육체에 고통과 상처로 되돌아온다. "보육원의 독방에서부터 시작된 정신적 변화가 점점 형체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이후 제이는 혼자서 도시를 떠돌며 생쌀로 섭생을 하고, 주운 책을 읽고, 명상을 하며 살아간다.

어릴 적 친구인 동규와 대학로에서 우연히 만난 목란의 앞에 나타난 열일곱 살 제이는, 소년이라기보다는 "인도의 걸인"과 같다는 설명처럼, 그들에게 정신적 구원을 찾아 도시를 헤매는 영적 지도자로 감각된다. 제이는 광야에서 돌아온 예수처럼 "외국인 불법 체류자와 비슷한 급의 천민"인 "가난한 십대"들을 찾아다니며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전한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 아이들은 제이가 자기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존재라고 느꼈고, 그의 기이한 생활 태도에 외경심을 품었다."

이러한 시간들이 축적되며 제이를 추종하는 가출 청소년들의 무리는 많아지고, 제이는 이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집단, 즉 폭주족의 리더가 된다. 제이는 폭주를 "우리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리는" 행위이며, 감정의 심미적 분출로 설명한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마치 도시의 거리에 굵고 힘찬 붓질을 하는 것과 같다." 제이가 이끄는 집단의 폭주는 점점 대담해지고, 과격해지면서 언론과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결국 제이는 자신이 계획한 광복절의 대폭주를 진압하던 경찰과 충돌하며 죽음을 맞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경찰과 수백 명의 폭주족들은 제이가 죽은 후 승천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새벽 세 시경, 하늘에서 내려오는 난데없는 한 줄기 빛과 그것을 타고 오르는 희끄무레한 형체", 즉 제이가 "하얀 날개를 펼치고 올라가"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이렇게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서사를 읽으면, 제이의 메시지를 "자기 계발서에서 건진 듯한 잠언이 종교적 교훈과 뒤섞였고 싸구려 대중 소설의 잔뜩 힘을 준 비장한 문체가 로맨스의 극적인 구성으로 스며들었다"고 불신하고, 결국엔 경찰과 내통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몬 동규의 존재는 제이의 이니셜을 가진 또 다른 인물로 해석된다. 동규는 제이와 자신의 관계를 "좌우가 뒤바뀌어 있을 뿐 근본은 같은, 나이를 먹어 둘로 분리된 정신의 샴쌍둥이"라고 생각하며, 제이에 대해 취재를 하는 소설가에게 "제이가 바로 저예요"라고 말한다. 결국 죄책감에 자살을 선택하는 동규는 유다(Judas)이다.

다음은 야누스의 '제이'.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자생신인 야누스는 문(門)의 수호신이며, 처음과 끝의 신이다. 앞과 뒤를 가진 문의 형상을 따라 야누스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형상으로 표현되며, 그렇기에 흔히 이중적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김영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장을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로 시작한다. 김영하 자신을 연상시키는 소설가로 작품에 등장한 '나'는 이 시의 한 구절―"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을 반복적으로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문이 반쯤 열려 있다는 것이 묘하다. 닫혀 있지도 않고 활짝 열려 있지도 않다. 슬쩍 지나쳐도 그만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

반쯤 열려 있는 묘한 문, 닫혀 있지도 않고 열려 있지도 않은, 이 세계의 입구이자 다른 세계로 가는 출구인 문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인 제이를 말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성인도 소년도 아닌, 고통의 체현자이며 폭력의 구현자인, 길의 성자이자 거리의 광인인, 목란의 연인이며 그녀와는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 이 서사의 시작(출생)이자 끝(죽음)인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시작(승천)인, 제이에게 가장 적절한 이미지는 야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이가 지닌 야누스의 면모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센서에서 거리의 소년들을 강력하고 음험한 폭력으로 제어하는 폭주족의 지도자로 탈바꿈하는 제이의 변천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제이는 특유의 성자적 면모와 광기를 통해 폭주족의 "왕"이 되자, "인기가 권력이라는 것,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린다. 제이는 더욱 과감하고 강도 높은 폭력을 통해 무리의 리더가 되지만, 그것은 "야생"의 먹이사슬 위에 군림하는 폭력의 왕과 다름이 없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서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읽든지 간에 이 소설에서 독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욕망의 집합소인 서울의 공간을 순례하며 타인의 고통을 육체의 상흔으로, 세계의 폭력을 사유의 깊이로 감각하는 제이의 영적 성장이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경찰은 제이를 "단순한 반항아가 아닌, 맬컴 엑스형의 정치적·영적 지도자"로 파악하고, 더불어 독자는 그 존재에 값하는 서사를 요구한다. 김영하가 이 소설을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잘 알려진 가요의 제목에서 차용한 것은 주인공 제이가 지닌, 미세한 영혼의 소리를, 나약한 고통의 탄식을 감지하는 모습에 보다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쉽지만, 폭주족의 리더가 되어가는 후반의 서사에서는 제이의 사려 깊음과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머플러를 통해 분출하는 분노의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김영하라는 문학의 특별한 아이콘에게 독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사유의 형태로 표현되든, 서사의 형태로 표출되든, 어떤 한계를 넘는 영적·정치적 상상력의 분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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