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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여의도? "진보당 대표, 보수당 의원과 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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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핑크빛 여의도? "진보당 대표, 보수당 의원과 열애!"

[인터뷰] <내 연애의 모든 것> 이응준의 모든 것

통합진보당 대표가 새누리당 의원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면? 게다가 그 둘이 미모와 지성을 뽐내는,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도 호감도 1, 2위를 겨루는 훈남, 훈녀라면? 아무리 지금처럼 선거 운동의 불이 당겨진 때라도 다른 '정치' 기사들은 저만치 8, 9면으로 밀려날지 모른다. 스캔들은 정치보다 힘이 센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정치 스캔들'이니까.

작가 이응준(43)은 이 솔깃한 상상을 <내 연애의 모든 것>(민음사 펴냄)에서 풀어냈다. 주인공 커플의 설정은 위에 적은 대로 파격적이다.

이응준. 2009년 <국가의 사생활>(민음사 펴냄)에서 "북한 조선중앙방송 아나운서였던 엘리트 여성이, 남한 잠실야구장 청소부로 일하다 자살을 하는" 어둡고 절망적인 '흡수 통일 이후 한반도'를 그려 화제를 모은, 작품을 직접 영화로도 만들고 있는 바로 그 작가다. 파격적 소재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두 작품의 톤은 전혀 다르다. '남남 대립'을 다루고는 있지만 <내 연애의 모든 것>은 작가가 직접 단 카피대로 "사랑과 인생에 대한 '희극적' 교본"이라 할 만큼 밝은 로맨틱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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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연애의 모든 것>(이응준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여성이자 최연소로 진보노동당의 대표가 된 '오소영'이 판사 출신 매끈한 쾌남 새한국당 '김수영' 의원과 대립 끝에 사랑에 빠진다. 오소영의 보좌관 정윤희는 김수영을 짝사랑하고, 소설의 처음과 끝을 맡는 한물간 록 스타 '장도준'은 오소영을 '이상하게' 짝사랑한다. 오소영 판박이인 어린 조카 '보리'는 김수영을 따르는 소년 '전태양'에게 한 눈에 반하고, 김수영의 아버지는 자신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해 노년의 눈물을 흘린다.

"원고지 1200매 안에 사랑의 모든 양상을 그려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는가? 등장인물만 많은 게 아니다. 오비디우스, 소크라테스, 모어, 스탕달, 스피노자, 니체, 쇼펜하우어, 이상, 하이네…. 수많은 '인생 선배'들을 데려오고 깔아 눕히고 패러디하면서 촘촘한 '교본'을 엮어 나간다.

장르 소설의 냄새가 물씬 나는 <국가의 사생활>에서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연상되는 <내 연애의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행보만 보면 '통통 튀는 젊은 작가'라 오해할 법 하지만, 1990년 시로 등단한 24년차 작가다. 게다가 그의 단편들은 미학적이고 관념적이라 할 정도로, 스토리텔링과는 거리가 멀다. 본인 스스로도 "구한말 선비같이 꼬장꼬장한", "20세기적인 작가"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전혀 다른 느낌을, '이응준'이라는 세 글자의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는 긴밀히 연결되게 만드는 작가를 만나봤다. 지난 21일 홍대입구역 근처 모 카페에서 진행된 이응준과의 인터뷰는 때로는 종잡을 수 없는 선문답에 빠지기도 했지만, 작품과 문학 인생, 사랑과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 대한 의견을 통틀어 단 하나를 강조하는 일관성을 보였다. '변화'다.


▲ 작가 이응준. ⓒ프레시안(최형락)

흡수 통일 이후 다룬 작가, 왜 여의도로 눈 돌렸나

프레시안 : <내 연애의 모든 것>이 나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책에 대한 트위터나 블로그 반응을 적극적으로 검색해 보는 사람인가? 혹시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이응준 : 트위터는 안 한다. 블로그에선 예전에 썼던 <국가의 사생활>을 본 분들이 "같은 작가 맞아?"라는 반응을 보이더라. <국가의 사생활> 작가가 로맨틱 코미디를 썼다는 데 신기해하는 거지.

프레시안 : 그냥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통합진보당을 연상시키는 '진보노동당' 대표 오소영과 누가 봐도 새누리당인 '새한국당'의 의원 김수영이 사랑을 한다. 정치권 반응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응준 :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정치부 기자들 가운데 예전에 문학도 담당해봤던 분들이 재미있어하고 관심을 많이 가졌다. 역시 익명이지만 국회의원 몇 분도 재밌어 하더라.

프레시안 : 인터뷰 오기 전에 독자 반응을 검색해 봤는데 어느 블로그에서 이 소설을 '떡볶이'에 비유한 것을 봤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일부러 좀 힘을 빼고 간 건가.

이응준 : 작품에는 기표와 기의라는 게 있다. 표면에 설계해 놓은, 그대로 읽히는 부분이 있고 이와 구별되게 그 밑에 깔려 있는 구조 즉 상징, 의미가 있다. 소위 '대중 문학'과 '순수 문학'이란 경계가 분명했던 시절, 가령 20세기 같았으면, 문학가가 분명하게 문학에 훈련되어 있는 독자들을 상정하고 작품을 썼을 텐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 정말 재주 있는 작가라면 표면상으로는 술술 잘 읽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그 밑에 자기가 정말 전하고 싶은 문학적 상징, 구조를 깔아야 한다고 본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따라서 기존에 이응준을 아는 문학 독자들이나 이론적 바탕이 있는 이들은 이번 작품을 봤을 때 그 밑에 있는 레퍼런스나 상징들을 읽어낼 수 있겠지만, 그런 문학적 훈련이 덜 되어 있거나 의미를 찾는 데 관심 없는 독자들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 읽는 것 아닐까 싶다.

프레시안 : 전작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주목도가 높다. 그런데 <국가의 사생활>이 통일 이후의 한반도라는 소재 자체가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는 반면, <내 연애의 모든 것>은 남한의 정치 갈등이 배경으로만 그려진다는 느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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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사생활>(이응준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응준 :
<국가의 사생활>은 근미래 가상 역사 소설이라는 분명한 장르적 정체성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하지만 그걸 날것으로 드러내게 되면, 그냥 짜깁기가 되어 인문학 도서가 돼 버린다. 그런 소설을 쓸 때 소설가는 많은 공부를 하고, 그것을 증류한 뒤 가장 단순한 뼈대만 남기는 작업까지 가야 한다.

반면에 <내 연애의 모든 것>은 정치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치에 관심 없는 보통 사람들이 9시 뉴스를 보는 수준만 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와 감각으로 써야 한다는 기술적 전략이 있었다. 만약 이 수준이 더 깊어지게 되면 소설 판 '청와대 비서실'이 되는데 이 부분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정치, 인생에 대해 뭔가 끄집어낼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끄집어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사랑 이야기 3부작'을 기획 중이라고 들었다. 이번 책이 그 첫 번째인데, 왜 하필 정치권을 배경으로 택했나.

이응준 : 사실 <국가의 사생활> 이전에 나는 전형적인 '문학적 성리학자'였다. 실존적인 부분, 원론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말하자면 20세기 유럽형의 미학적 단편들을 써 왔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유독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스토리텔링을 못 해서 안 하는 것 아니냐며 한계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웃음)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기를 변화하고,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좋아, 보여주지!"라는 느낌으로 <국가의 사생활>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해방 이후 조선 현대사에서 가장 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통일 이후의 한국 상황에 대해 처음 쓴 사람은 영원히 나다. 이 권위는 무너뜨릴 수 없다.

한편으론 지금도 단편을 쓰고 시집도 쓰고 있다. 작가라는 존재는 그런 거다. 과거에 20세기적 문학을 했더라도 현재는 스토리텔링이라는 표현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거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쓰는 형식은) 작가가 처한 현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본다. 결국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그때그때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사회에서 질문 던질 만한 게 무엇인가 하니, 통일 이후의 한국 말고 다음으로 센 건 뭘까, 좌우 대립 그리고 그 만남이다. 그 얘기를 모든 주제를 담을 수 있는 용이한 그릇인 '사랑' 안에서 다뤄 본 것이다. 정치와 사랑 중 어느 것이 내면이고 어느 것이 외면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외면이자 내면이고 정치가 내면이자 외면인, 마치 그 둘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엮고 싶었다.

현실 정치는 좀 더 뜨겁지 않나?

프레시안 : 정치권의 좌우 대립을 소재로 하지만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한국의 현실 정치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령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경기동부'만 해도 그 역사가 한 편의 소설인데 (웃음) 주인공 오소영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다. 혹시 사랑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이런 묘사를 죽여서 아쉬운 게 있는지 궁금하다.

이응준 : 없다. 그렇게 현실 정치를 세세하게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시의적이고, 메타포화 할 수 있는 유효 기간이 분명하다. 책 표지에 나오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희극적 교본'이란 카피를 직접 썼는데, 바로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 편견을 걷은 이야기, 인간과 정치에 대한 메타포, 좀 더 큰 얘기 말이다.

프레시안 : 언론 관련 법 통과를 둘러싼 여야 의원의 몸싸움이나,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아나운서 되려면 다 줘야 한다"고 말하는 신한국당 의원 '문봉식'처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비튼 묘사가 많다. 한국의 실제 정당들을 연상시키기에 희극적 묘사를 할 때도 그 점을 의식하지는 않았나? 그 묘사는 두 당 모두에 공평했다고 생각하나?

ⓒ프레시안(최형락)
이응준 :
답하기가 힘들다. 그 질문에 대한 아이러니가 이 소설의 주제이니까. <국가의 사생활>의 이선우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우파는 우파가 아니고, 좌파는 좌파가 아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 편을 든다 만다 했을 때 혼동된단 거지. 나도 내 정치적 성향을 보면 전형적인 우파 자유주의자 날라리인데, 한국에서 뭔가 의견을 개진하다 보면 좌파 소리를 듣는다. 이 판이 개판이란 얘기다. (웃음) 그러니 한국에선 제대로 된 노선 투쟁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은 제대로 된 사전이 없는 사회다. 어떤 사람이랑 얘기를 하려면 그 사람 용 사전을 따로 만들어서 얘기해야 한다. 서로 받아들이는 뜻이 다르니까 건축가도 각 건축주마다 사전을 따로 만들어서 일을 한다더라. 그래서 결국 진지한 토론을 하려고 해도 그 벽에 부딪치는 거다. 싸움이 되려면 각각 자리에서 정말 '진짜'여야 하고, 서로에게 진정한 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싸움이 늘 더럽게 끝날 수밖에 없는 건, 우리 각자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구 편을 들었다 한들, 그게 과연 편든 것이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아이러니 말이다. 오소영과 김수영이 처한 모순도 그거 아니겠나. "너는 세상을 구한다면서 왜 나는 못 구하냐"라는 김수영의 말에 오소영이 기껏 하는 대답이 "난 이 나라가 지긋지긋해"다. 이런 모순이 결국 연애고 삶인 게 아닐까.

프레시안 : 독자로서 작가가 의도한 것보다 좀 더 현실을 의식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웃음) 그래서 캐릭터 역시 좀 비슷한 정치인 없나 생각을 하면서 봤는데, 혹시 오소영이란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인물이나 사건은 없나.

이응준 : 이정희 씨의 경우, 여성이자 최연소로 진보당의 대표가 된 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딱 그런 부분만을 스캐닝하지 않았나 싶다. 책을 보면 오소영과 이정희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여러 인물이나 장면을 부분적으로 스캔한 이미지를 가지고, 상상력으로 극단화시킨 거지.

프레시안 : 실제로 오소영 같이 아름답고 신념에 가득 차 있는 인물이 있다면 팬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결말을 봤을 때도 그렇고 너무 곧아서 그런지 끝까지 정치를 할 사람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김수영은 '세상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크게 있어 보이지 않아서 애초에 왜 판사직을 버리고 정치에 뛰어 들었나 궁금해진다.

이응준 : 김수영은 공부도 잘하고 남자답고 사랑도 듬뿍 받은 쾌남이다. 이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을 감추지 않는 것, 솔직함이다. 그 솔직함 때문에 국회의원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자기 문제는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강한 사람이다. 반면 오소영은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속은 상처로 곪을 대로 곪아 있어서 매 순간 악을 쓰며 산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사랑을 통해 성장해 가는 이야기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변화'다. 김수영은 오소영이 자기 안에 들어옴으로써 성장을 하고, 오소영은 김수영을 통해 용기를 낸다. 그러면서 둘 다 새롭게 시작할 여지를 남기게 되는 거다. 마지막에 오소영이 새롭게 변해서 김수영을 찾아오지 않았나. 그 다음에 어찌될지는 모르는 거다. (오소영이) 다시 정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응준의 사랑 론(論)

프레시안 : 김수영과 오소영은 정치적으론 정적이라 현실에선 절대 연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소설에선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린다. 둘의 설정은 독특하지만, 연인 관계 그 자체는 평범하게 묘사하고자 한 건가.

이응준 : <로미오와 줄리엣>의 구조를 가지고 와서, 대학생들이 봤을 때 '어, 이거 학교에서 내 친구랑 나랑 겪었던 일인데'라고 느낄 법하게 설계한 이야기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둘 사이에선 사랑할 때 일어날 수 있는-막말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고, 유치해지고, 다 주게 되는-모든 과정을 다 그려내 보고자 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칭송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 가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진짜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세상의 반 이상은 그의 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건 동지가 아니라 적이다. '너는 제대로 된 적과 제대로 된 싸움을 하고 있느냐. 그건 어떤 싸움이냐. 그 싸움은 늠름하냐. 너를 고귀하게 만들고 있느냐. 너는 그 적의 진짜 적이 될 자격이 있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사랑이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 물을 때 대답하기 힘들지만 한 가지 분명히 드는 생각은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의 그릇된 운명과 투쟁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지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 사람이 용기를 잃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 그런데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이게 나를 성장시키는 싸움인지 제대로 된 사랑인지를 알 수 있나. 보통은 잘 모르다가 나중에야 판단해 보게 되는데….

이응준 :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인생에서 분리해 인생의 어떤 '정수'라 믿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 둘을 떼어내서 생각하는 자체에서 비극이 싹튼다고 본다. 왜 보통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말하지 않나. 그 말대로 매 순간 변화에 적응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사랑을 할 때는 '사랑' 딱 그 상태로 있기를 바란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다. 상대가 변하면 나도 변해야 하고 내가 변할 때 상대도 변한다는 걸 알아야 하며, 둘 다 가만히 있어도 관계는 변하고 있다는 걸 느껴야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는데, 그거 틀렸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은 깨진다.

<주역>에서도 '내 안에 변하지 않는 하나로 만물의 변화에 대응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불교 철학이 전하는 말도 딱 한 마디,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부처가 여든이 되어 죽을 때 남긴 말이 이렇다.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나니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나는 방일하지 않았으므로 바른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부처의 깨달음도 어느 날 갑자기 온 게 아니고 매일 참고 정진하다가 온 것이다. 인생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정신 차리고 순간에 대응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들리고 보이는 상태의 글'

프레시안 : 이 소설은 8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장을 한 신에 대입해 그대로 영화 시나리오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영상 매체 같은 구석이 있다. 다른 리뷰에서도 영화나 드라마 장면이 떠오른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정현 PD가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다. 집필할 때 혹시 영상화를 염두에 두었나.

이응준 : '영상화를 염두에 두었나'란 질문은 내게 있어서 적합한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염두에 둔다고 그렇게 써지는 게 아니거든. 나는 그저 들리고, 보이는 상태까지 가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도 그렇다. '보이는' 연설문이다. 예수님, 부처님 말씀은 눈 감고도 보인다고 한다. '보이는' 글이 내 체질이나 사고방식에 맞아서 예전부터 그렇게 써 왔다.

프레시안 : 사실 이 질문, 좀 조심스러웠다. 작가들이 '작품 쓰면서 영상화를 생각해 본 적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의 사생활>도 직접 메가폰을 잡고 스크린으로 옮기는 입장이니까,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응준 : 나는 기본적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원래 연극을 했었고, 소설과 함께 시도 쓴다. 그런 걸 예전에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서 20세기 영미 작가들의 약력을 한 번 봐라. 시집 안 낸 소설가가 거의 없다. 한국에선 나 같은 경력을 신기하게 여기지만, 내 쪽에선 그 반응이 더 희한하게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대륙과 대륙을 오가는 새를 보고, "너는 바다 위에서만 날아야지 왜 산 위를 날려고 하니"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철저한 문학주의자다. 그러나 문학만 해야지 문학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상업 영화를 만들게 된 건, 내가 한 인간으로서 실존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나름의 모색이었다. 내 자리를 하나 더 만든 거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연히 문학과 연결될 수 있는 자리다.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새로운 툴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툴, 그러니까 영화는 종합 예술 아닌가. 즉 그 안에 문학도 들어가고 철학도 들어가고, 미술, 기술, 과학, 사회, 대인관계가 다 들어간다.

프레시안 : <내 연애의 모든 것>은 레퍼런스가 많은 소설인데, 드라마에선 인용문이나 경구들을 그대로 실을 수 없으니 생략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일 텐데 아쉬운 점은 없나?

이응준 : 전혀 없다. 일단 내 손을 떠난 작품이고, 내가 각본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원작 소설 집필과 영화 연출 두 가지를 다 해봤기 때문에 두 입장을 잘 이해한다. 보통 원작자들이 자기가 생각했던 장면이 안 나오면 아쉬움을 갖는 편인데, 나는 오히려 원작자 쪽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 원작자들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화를 내는 경우도 많이 봤다.

프레시안 : 조금 다른 얘기지만 2년 전 방영됐던 <시크릿 가든>에서는 책 속 레퍼런스가 아닌 책 제목을 그대로 활자로 띄워 내용을 전달했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주인공 김주원(현빈)이 집어든 책 중에선 당신의 단편집인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민음사 펴냄)도 포함돼 있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듣고 싶다.

이응준 : 사실 좀 씁쓸했다. (침묵) 나는 이제 마흔세 살인데, 데뷔를 스무 살 때 했으니 이제 작가 생활 24년째다. 인생을 살다보면 비슷한 패턴이 반복될 때가 있다. 가령 뭘 그만두려고 했는데 어떤 계기가 생겨서 계속 하게 된다든지 하는. 그 패턴을 잘 기억해 둬야 한다. 그게 자기 인생이니까. 그 패턴이 어떻게 반복되는가를 인식할 때 비로소 패턴을 변형시키기도 하고 깨기도 하면서 응전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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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이응준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어쨌든 이 얘기를 <시크릿 가든> 때와 연관 지어 답변하자면, 당시 더 이상 단편은 쓰지 않으려고 결심한 시기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는 지옥에서도 쓸 수 있는데, 단편 소설은 너무 힘이 드는 거다. 그렇게 힘이 들면 약간의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내 소설을) 나만 읽는 것 같아. (웃음) 이렇게 훌륭한데, 그 단편 소설들한테 내가 미안하더라고.

그때 <시크릿 가든>에 (책 제목이) 나온 거다. 나는 그때 TV도 안 봤으니까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좀 심각한 사람이니까, 아는 사람들이 쭈뼛거리면서 묻더라. "어제 <시크릿 가든> 보셨어요?"라고. 처음엔 노르웨이 그룹 말하는 건 줄 알았고, (웃음) 다음엔 출판사의 간접 광고겠거니 했다. 근데 아니더라. 이틀쯤 지나고 찾아 봤더니 일이 좀 커졌더라고.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내 단편을 사 보는 거야. 하하….

이유를 다 떠나서 '이거 또 다시 단편 쓰라는 모양이구나' 싶었다. 이상한 게 치고 들어와서 결국 못 그만두게 하는, 이런 식의 패턴이 예전에도 있었거든. 원래부터 문학이랑 그런 게 좀 있었다. 그 드라마 해프닝이 그런 계기를 준 건 맞는데,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론 잘 된 부분도 많은데, 당연히 마음 아픈 부분은 있었다. 목적에 대한 소외라고 할까.

프레시안 : 그때 한창 '주원·라임의 테마 도서 세트'라는 이름으로 책이 세트로 묶여 팔렸다. 그러면서 신문 지면마다 '드라마에 나와야 책이 팔리는 시대'라며 개탄의 목소리도 높았다.

이응준 : 사실 그게, <시크릿 가든>이 나온 그 시점에 얘깃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다. 미국에서, 일본에서 언제부터 그런 고민을 하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미 다 철 지난 이야기를 가지고…. 아니, 바닷물을 마셔 봐야 짠 줄 아나. 불에 손을 넣어봐야 뜨거운 줄 아나. (웃음) 우리가 얼마나 닫혀 있었고, 세상 변화를 몰랐느냐는 얘기다. 그대로 남겨둘 것은 무엇인지 변화할 것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고, 거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나.

"전집으로 평가 받고 싶다"

프레시안 : 1990년에 시로 등단해 작가 생활 24년째다. 사람의 평균 수명으로 봤을 때 햇수로만은 절반 정도 걸어온 셈인데,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나.

이응준 : '내 인생은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 문학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써도 되는 사람이다'라고 정리하고 싶다.

사실 난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원래는 꼬장꼬장하게 문학을 가르치고 한 1000명이 읽어주는 책을 꾸역꾸역 쓰다가 아주 고집불통으로 죽고 싶었다. 구한말 선비처럼. 그런데 세상이 그 순교를 방해한다. 먼 길을 왔는데, 참 쉽지가 않다. 아직도 스물네 시간 중에 네 시간 정도는 그 부분(문학적 정체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피곤하다. 매일 자세를 가다듬고, 매일 적들과 싸워야 하니까.

프레시안 : 궁극적으로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단기적인 계획은?

이응준 : 나의 기본적 기조는 유지하되 전형으로는 빠지지 않으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써 나가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태작이 하나도 없는, 전집으로 평가 받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의미 있는 작품으로 삶의 부끄러움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당장은 일단 4월에 시집이 나올 것 같다. 소설은 앞서 말한 대로 '사랑 3부작'을 기획 중이다. 가끔 이응준이 쓰는 <상실의 시대>는 어떨까, 이런 생각도 해 보고 그런다.

프레시안 : 4·11 총선을 앞둔 시기이니만큼 작품이 묘사한 세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내 연애의 모든 것>을 통해 정치인들이나 유권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프레시안(최형락)
이응준 :
작가의 말에 "거대한 벽 앞에 홀로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이 시국에 맞춰 그 말을 다시 하자면, 원하는 세상이 무엇이든 간에, 세상이 보다 더 낫게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읽어 주면 좋을 것 같다.

하나 더. 예전에 김춘수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역사 속에서 보십시오." 최근 몇 년간 나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역사 속에서 그 도도한 흐름을 보기 위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을 정말 많이 봤다. 결국 이게 동족상잔의 비극의 연속에 놓여 있으니까.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서 문제라고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무관심하지도 않을뿐더러 굉장히 '얼라이브(alive)'하다. 그야말로 살아 있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권위가 깨지고 변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그냥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선생을 사형시켜서 끊겼던 진보의 맥이, 이제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오고 있지 않나. 뒤집어지고 박살이 나고 그럴 거란 말야. 여기까지만 하겠다. 더 하면….

프레시안 : 걱정 안 해도 된다. 온건하게 쓸 거니까. (웃음)

이응준 : 아니, 과격하다 온건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냥, 약간 희한한 사람 같아.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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