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받은 가장 짧고, 강력한 메시지였다.
한동안 왜 그가 이런 쪽지를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이와 개인적으로 밥 한 번 먹은 적 없고, 소모임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러니 분명 억울한 일이었다. 왜 분노에 가득 찬 글을 보냈던 걸까. 생각할수록 답답했다. 납득할 수 없었으므로 쉽게 잊을 수도 없었다. 그 이후 몇 번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불편한 시선을 보내며 자리를 피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보인 행동에 대한 이유를 들었다. 늦은 시간까지 소모임이 계속되던 날 야식으로 누군가 사온 떡볶이, 순대와 튀김을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하필'이면 그때 내가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푹 담가서 먹었단다. 그 모습을 보고 그이가 질겁했더란다. 얘기를 전해 온 친구는 "야. 네가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능숙하게 순대를 먹더란다" 하며 깔깔 웃었다. 편지만큼 황당한 얘기였다. 그 이후로 한동안 떡볶이와 순대를 먹지 않았다. 혹 먹더라도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피곤 했다. 우습게도 의식의 저편에 떡볶이와 관련된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그이만큼 내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이가 나를 미화하고 이상화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소녀'의 이미지를 전이시키고 판타지를 덧입혀 그만의 사랑을 키웠던 거다. 환상이 깨져버린 순간 분노의 감정을 쪽지로 전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행동화했다. 그러고는 그의 사랑은 끝났다. 누군가를 이상화하면 인지적 폭이 좁아 든다고 한다. 그래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될 일도 아니었다. 중학교 때 좋아했던 체육 선생님께서 트림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꼈던 일이 내게도 있었으니 말이다.
일정 부분 동일시하고, 역할 모델을 기대하고, 이상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대상이 내게도 몇 있다. 그중 한 명이 작가 김형경이다. 이미 오래된 팬 그룹이 형성되어 있는 걸 보면 작가의 삶과 글은 적어도 특정 대상에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 역시 첫 번째 심리 에세이인 <사람 풍경>(예담 펴냄)을 읽고, 아!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천 개의 공감>(한겨레출판 펴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푸른숲 펴냄), <담배 피우는 여자>(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찾아 읽고는 작정하고 작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판타지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신중하게 책을 골라 읽었다.
그러던 차에 네 번째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머뭇거렸다. 이미 <좋은 이별>(푸른숲 펴냄)로 만족감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주저하다 구매했다. 책을 읽으면서 '떡볶이 오빠'와 '이상화', '불안정한 애착' 그리고 '관계'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이처럼 환상과 기대가 깨진 후 날것의 분노를 행동화하진 않았지만, 내게도 환상, 기대, 전이, 저항, 투사와 동일시의 감정이 다른 형태로 내재하고 표출됐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 <만 가지 행동>(김형경 지음, 사람풍경 펴냄). ⓒ사람풍경 |
오히려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 안 돼요"라던 선배나, "만나기 불편해"라고 우회적으로 서운함을 표현한 주변인이나, 격한 반응을 보이고 떠나버린 친구 가인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빠르게 이들과 동일시되어 작가에게 불편함을 느꼈다. 분노를 표출한 친구와 떠나버린 후배는 '직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걸까. 유아기적 욕구를 좌절시킨다는 이유로 "혼자 보세요. 그 풍경과 감정을 혼자 경험하고 소화시키세요"(210쪽) 하는 메시지를 보내야만 했을까? 더는 연락이 없었다는 걸 보면 아직 직면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을 텐데….
직면은 심리 치료에서도 최대한 조심해서 사용하는 기법의 하나다. 일상적인 관계에서 게다가 오랜 친분을 유지해 온 사람에게 혹독하고 냉정하게 직면을 시키려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공격적인 물음이 쏟아지자 멈칫했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을 즈음 작가의 책을 바이블로 여기는 후배가 이번 책은 어떤 것 같으냐고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드라마나 영화도 갈등이 있을 때가 흥미 있고, 몰입도 잘되잖아? 이번 책은 결론만 잘라 놓은 것 같았어" 말했다. 후배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또다시 떡볶이 오빠, <만 가지 행동>에 등장하는 가인, 다인, 바인, 라인에 대해 그리고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복닥거리며 감정과 뒤엉켜 지내는 나는 명쾌하고 단단하게 "그들의 방식에 반응하여 헛되이 나의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것이고, 나의 감정은 나의 것이었다. 나는 그저 자신을 잘 보고, 감정을 잘 관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31쪽)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시기심을 느꼈던가 보다.
'그러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괜찮아졌다. 모든 것이…' 하필 많은 내용 중 그 문장이 각인되어버린 거다. '나는 여전하고, 아직도 멀었는데.'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이 일었다. 함께 놀던 친구가 해 질 녘에 '이젠 다 놀았어. 먼저 갈게' 하고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좀 더 놀고 싶은데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라면 적절한 표현일까.
전작에서 보였던 아파하고, 견디고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실수하고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모습에 동일시했으나, 그간의 정신 분석을 통해 통찰을 얻고 훈습의 단계에 들어간 작가가 '이제는 괜찮아졌다'라고 말한 정돈되고, 평안해진 모습에 아쉬움과 시기심이 생겼고 심통도 났었는가 보다. 이 역시 유아기적 의존 욕구이고 미성숙이며 내가 해결해야 하는 감정일터다.
한번 마음을 주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며 내 특성이기도 하니 <만 가지 행동> 이후에 나 올 예정이라는 두 권의 책도 기꺼이 사서 읽을 테고, 미화된 감정이 훼손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서 작가를 응원하고 힘을 얻을 것이다. 내게도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을 씩씩하게 걷고 있는 든든한 선배이자,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며 삶을 잘 돌볼 줄 아는 역할 모델이 필요하고, 그 중 한 사람이 변함없이 '김형경'이기 때문이다.
내 인식 속에 '떡볶이 오빠'로 기억되고 있는 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이에 대해 가끔 생각하곤 했다. 왜 그토록 분노에 찬 메시지를, 경멸의 시선을 보냈을까? 떡볶이 대신 감자탕을 먹고 있는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단지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먹었다는 이유가 그렇게 배신감을 느낄 만했을까?
하지만 더는 불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다만, 환상이 깨진 후 사랑이 분노로 바뀐 극단적인 모습을 보았을 뿐이라고 정리했다. 헌데 가끔 포장마차 앞을 지날 때면, '떡볶이는 손도 대지 않는 사람과 살고 있을까?' 생각하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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