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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뉴델리에 갔더라면!

[해방일기] 1947년 3월 26일

1947년 3월 26일

하경덕, 백낙준, 고황경 세 사람이 뉴델리 범아시아회의 한국 대표단으로 3월 17일 떠났다. 여운형이 이 대표단의 수석대표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떠날 날 새벽 그의 집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그는 위험에 처한 가족을 버려두고 출국할 수 없다며 뉴델리 행을 취소했다.

범아시아회의는 그 해 여름 독립을 앞두고 있던 인도의 임시 과도 정부 수상 네루가 주선한 것이었다. 인도와 네루가 장차 이끌어갈 비동맹 운동(Non-alignment Movement)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회의였다. 아시아 여러 나라 독립 운동 지도자들을 초청한 이 회의에서 네루는 이렇게 말했다. (<Wikipedia> "Asian Relations Conference" 조)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의 지배가 남긴 중대한 결과의 하나는 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은 것입니다. (…) 오늘날 이 고립 상태가 정치적 의미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 풀어지고 있습니다. (…) 이 회의의 의미는 아시아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온 뿌리 깊은 욕구의 표현이라는 데 있습니다. (…) 이 회의와 이 사업에는 이끄는 자와 따라가는 자가 따로 없습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공동의 과제 앞에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을 때였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촉발된 움직임이었다. 인도처럼 원래의 지배국에 협력하며 독립 약속을 얻은 민족들도 있었고 베트남처럼 지배국의 식민지 복원 시도에 저항하며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들도 있었다. 어느 경우나 세계 대전으로 인한 지배국의 약화가 독립 운동의 강력한 계기가 되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진행 중이던 인도는 종교 분쟁으로 인해 탈식민지 시대의 문제를 앞장서서 겪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 독립에 대한 영국의 저항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신생국의 공동 노선을 먼저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 강대국들이 신생국의 움직임을 쉽게 억누르지 못한 것은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유엔이 세계 질서의 중심축으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의 해외 여행을 통제하고 있던 미군정이 비록 자기네 입맛대로 지명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대표단을 뉴델리에 보내기로 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수석대표로 뽑은 것은 당시로서 매우 전향적 조치였다. 미군정 노선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인물에게 외교 무대에서 활동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 미군정의 편협한 자세에 비춰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풍설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여운형을 뉴델리 회담에 참석하게 한 후 미국 본토에 초청해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조선의 대표적 지도자로 만들며 국제적 명망을 키워줄 계획이라는 풍설이었다. (<몽양 여운형 평전>(정병준 지음, 한울 펴냄), 394쪽)

여운형은 그런 회의에 그야말로 준비된 대표였다. 34세 때인 1919년 11월 유명한 '제국호텔 연설'로 일본인 사이에서까지 성망을 높인 것을 보면 그의 민족주의가 민족 내부에 묶여 있지 않은 거시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 40쪽에 이 연설의 일부가 발췌되어 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 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어느 집에서 새벽에 닭이 울면 이웃집 닭도 따라 울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닭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작된 것이 한국의 독립 운동이요, 결코 민족 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여운형은 1921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만난 구추백(瞿秋白) 등 중국 혁명가와의 교분이 그의 조-중 연대 추진 활동의 발판이 된 사실이 알려져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교분을 쌓은 것이 중국 혁명가들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1928년 복단(復旦)대학에서 일하다가 축구부를 인솔하고 마닐라에 갔을 때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아시아 모든 민족이 단결해 공동 투쟁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다가 현지 경찰에 체포된 일화도(<몽양 여운형 평전>, 50쪽) 피압박민족회의의 배경 위에서 이해할 일이다.

여운형이 1947년 3~4월에 뉴델리에 갔었다면! 역사학에는 'if'가 없다고 하지만, 한 가지 너무나 눈에 보이는 듯한 생각이 떠오른다. 얼마 후 인도의 유엔 대표 메논(K P S Menon, 1898~1982년)이 조선 관계 소위원회에서 맡을 역할이다.

인도 외교 정책의 기조로 보아 분단 건국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던 미국 제안의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안에 인도는 반대할 것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위원장 메논이 뜻밖에 이 안에 찬성하는 바람에 소위원회 결정이 찬성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메논이 회고록에서 이 일을 "일생일대의 유감사"라고 적은 사실이 이승만 측의 미인계 설과 겹쳐져 반향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그 관계 조사는 못했다. 유엔 소위원회를 다룰 때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미뤄둔다.

직업 외교관인 메논은 1948년 4월에 인도 초대 외무부장(Foreign Secretary. 외무장관(Minister of External Affairs, 당시 네루가 겸임) 밑의 자리이므로 '외무차관'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에 임명될 인물이었다. 여운형이 1947년 봄에 뉴델리에 갔더라면 메논이 네루의 '아시아 연대' 노선에 어긋나는 입장을 유엔 소위원회에서 취할 가능성은 없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뉴델리에 보내려 한 까닭이 2월 중순 서울을 방문한 미국 기자단에게 그가 매우 뛰어난 인상을 심어준 데 있었다고 정병준은 이해한다. 그리고 그가 뉴델리 행을 포기한 까닭은 폭탄 테러만이 아니라 근로인민당(근민당) 창당 준비에서 몸을 빼기 힘든 사정에도 있었다고 본다. (<몽양 여운형 평전>, 394~396쪽)

미 본토의 신문 기자들조차 탄성을 지르는 이런 광경을 목도한 미군정으로선 몽양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제안된 뉴델리 행은 당연히 미군정의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미끼였고, 미군정은 마치 군정 관리를 임명하는 듯 대표를 지명했지만, 몽양은 일단 응낙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서울의 사정은 달랐다. 개인적 이해 득실만을 따진다면 당연히 미군정의 요청에 응해야 했지만, 몽양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너무 많았다. 막 조직화 단계에 있던 신당에 참가하려던 사람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좌익 쪽에서는 거의 근거가 뿌리째 뽑힌 입장이던 이들을 팽개치고 뉴델리로 날아가는 것은 정치적 신의를 배신하는 일이었다. 개개인의 위상이 공중에 떠버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조직적으로도 신당 창당의 포기로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아가는 길에 적지 않은 장애가 조성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때마침 몽양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받아 집이 반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몽양은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가족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몽양이 뉴델리 행을 사양하자, 미군정은 발끈했다. 남한 대통령으로 직진하는 에스컬레이터를 거부한 몽양을 미군정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으로 난관에 처해 있고, 자신의 조직적 기반마저 여지없이 박탈당한 몽양이 도대체 무얼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도저히 그 속셈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몽양을 향한 미군정의 시선이 점차 예리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또 한 차례, 여운형이 뉴델리에 갔었다면! 그가 4개월 후에 죽음을 맞을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정병준은 <몽양 여운형 평전> 447~470쪽에서 여운형의 암살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의 책임을 떠올리는 많은 근거를 제시하였거니와, 이런 근거 제시가 없더라도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그야말로 '백주대로상'에서 그의 저격은 미군정의 최소한의 방지 노력이라도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과 외부 세계의 접촉이 극히 적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나고 있었다. 1947년 들어 2월에 대규모 미국 기자단의 방문이 있었고, 3월에는 뉴델리회의 참석이 있었다. 3월 16일에는 조선적십자사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3월 말에는 세계노련(WFTU, World Federation of Trade Unions) 조사단이 조선을 방문했다.

세계노련 조사단은 3월 30일 정오 경 서울에 도착해 러치 군정장관 초청의 만찬 참석 외에는 한밤중까지 전평 간부들의 보고를 받고 이야기를 나눴다. 31일 오후 8시 반 평양으로 떠날 때까지 서울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려 했다. 그런데 경성방직 시찰 중 문제가 생겨 시찰을 중단하고 러치 면담을 신청했다.

"시찰 중 사고-공장가 시찰 중지"

31일 조사단은 러치 장관으로부터 조사단이 원하는 공장 시찰을 허가 맡고 전평 간부 3명, 조사단 일행이 선정한 통역 3명 등과 먼저 영등포 경방 공장을 시찰하였다.

그런데 동 공장의 기숙사를 시찰하려고 일행이 2층으로 올라갈 즈음 동 공장 경비원과 공장장은 전평 간부와 통역을 못 들어가게 하고 시찰단도 공장장의 안내개소 외에는 시찰 못한다고 무엇 때문인지 시찰의 범위를 좁히므로 일동은 시찰을 중지하고 말았다 한다.

그런데 일행이 공장 문을 돌아 나올 즈음 젼평 위원 이영선 김득원 이근호 3씨가 조사단 일행을 환영한다는 삐라를 뿌리다가 마침 동 공장의 경비원들에게 발각되어 구타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동 단장 루이 싸이안 씨와 이하 일동은 마침 이곳에 온 영등포서원 10여 명에게 구타당한 3씨를 우리들이 책임질 터이니 맡겨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하나 불응하는 등 사태가 벌어져 일행은 시찰 예정인 종방 용산공장 등의 시찰을 중지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 조사단 서기장 발트 벅 씨는 신문 기자단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영등포 경성방직 공장을 시찰하려고 하다가 거부당하고 기타 노동단체원을 구타하는 중대한 사태를 목격하였으므로 곧 러치 군정장관에게 회견을 요청하여서 남조선 노동 운동에 대하여 회견하기로 되었는데 회견하기 전에는 아무 말도 못하겠다." (<자유신문> 1947년 4월 1일자>)


오후 2시에 러치를 만났는데, 대한노총의 전진한 위원장 등 7인이 조사단을 호텔로 찾아간 것은 사태를 해명하라는 러치의 종용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 자리에서 오간 얘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노총) 전평이 조사단 여러분을 안내하여 영등포 경방을 시찰하였다는데 경성 종업원 전부가 노총 산하에 있다는 것을 아는가?
(조사단) 전평 산하라는 말을 들었다. 경방에 가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어찌된 사실인가?
(노총) 그것은 조사단 여러분이 종업원이 절대 반대하는 전평을 인도자로 하여 공장 측의 안내도 없이 무단 입장하였을 뿐더러 전평원이 종업원 선동삐라를 공장에 살포한 고로 경관이 제지한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4월 4일)

조사단이 3월 31일 밤 평양으로 갔다가 4월 2일 밤에 서울로 돌아오고 3일 아침에 도쿄로 떠난 경위는 4월 4일자 <자유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4월 5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북조선 생활은 빈곤-남조선의 상태는 낙원"

[서울 AP특파원 로버트 제공 합동] 조선의 노동 상태를 시찰하고 3일 동경으로 출발한 세계노련 극동 조사단 일행은 출발 전 왕방한 기자에게 여좌히 말하였다.

◊ 동단 대변인 루이 샤이양(파리 세련 서기국장)
나의 시찰한 바에 의하면 노동 기구 조직에 있어서는 남조선보다 북조선이 더욱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나는 일반적 개념을 말하기는 원치 않으나 내가 접촉한 남조선 노동자 언명을 종합하여 보면 남조선의 노동 상태는 불만족한 것이다.

◊ 윌나트 톰슨(시카고 CIO 간부)
우리는 평양호텔에서 노동 대표자와 회견하고 또 2개의 공장을 시찰하였는데 여기에는 소련 군 당국이 수행하였다. 여하간 북조선의 생활 상태는 극히 빈곤하였다.

◊ 어네스트 벨(영국노동조합회의 서기)
남조선은 북조선에 비하여 낙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평양같이 도처에 기관총이 있는 살풍경한 곳은 본 적이 없다.

조사단원 중 한 사람은 남쪽 형편이 나쁘다고 말했고 다른 두 명은 반대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 기사의 바이라인이 좀 색다르다. 그렇다. 찾아보니 2월 15일자 일기에서 [재 서울 AP특파원 로버트 제공 15일 합동]이란 바이라인의 기사 하나를 인용한 것이 있었다.

역시 <동아일보> 기사였고, 평양의 소련군 소령 하나가 남조선에 혼란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남로당 위원장이자 민전 공동의장인 허헌에게 보냈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었다. 로버트인지 로버츠인지 동아일보사에서 월급 타는 특파원이었던 모양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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