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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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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books] 이주동의 <카프카 평전>

솔직함을 서평의 한 가지 미덕으로 꼽아준다면, 고백하겠다.

총 872쪽에 달하는 <카프카 평전>(이주동 지음, 소나무 펴냄)을 읽는 동안 처음에는 무척이나 괴로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래 평전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지만, 이건 카프카가 아닌가. 카프카의 인생이라면 읽어볼 만할 거야, 명색이 카프카 팬인데 평전 한 권쯤은 독파해야지, 하는 얄팍한 계산으로 책을 펼쳐 든 나는, 곧 그것이 섣부른 실수였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40년 넘게 카프카 연구에 전념해 온 저자 이주동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카프카의 미발표 작품과 편지, 일기, 직장 기록 등을 두루 검토하여 충실한 자료와 해설이 겸비된 결과물을 완성했다. 작가의 삶과 문학 창작 과정을 연대기 순서로 탐색하면서, 지금까지 카프카 연구서에서 종종 논란이 되어 왔던 여러 이슈들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도 잊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에는 별 문제가 없다. 아니, 사실은 꽤 훌륭하게 직조된 평전이다.

▲ <카프카 평전>(이주동 지음, 소나무 펴냄). ⓒ소나무
웬만한 백과사전보다 두툼한 이 책은 말 그대로 카프카의 일생을 모조리 수록한 사전인 양, 삶의 단면들을 시기별, 항목별로 세세히 다루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독일 소년초등학교 시절, 오스트리아 왕립 김나지움 시절, 법학 대학 시절을 거쳐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입사한 이후의 직장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갔으며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주위의 평가는 어땠는지. 말 그대로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카프카가 누구인지를 전형적인 평전의 시선으로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평전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면 할수록, 작가의 일대기를 훑는 시선의 간격이 촘촘하면 할수록, 나는 그 시선에 편입되기가 힘겨웠다. 그러니까 나의 독서를 괴롭게 만든 것은, 평전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약혼녀 이름이 그동안 펠리체 파우어로 표기되어 왔는데 사실은 벨기에식 이름이므로 펠리스 바우어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나, 펠리스와 갈등이 있던 시기에 중재자로 등장한 그레테 블로흐라는 여성에게 카프카의 마음이 기울었는가 아닌가 하는 논의는, 카프카의 첫 성경험을 기술한 구절만큼이나 지겨웠다. 전혀 궁금하지 않은 대목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문호의 일생을 시간 순으로 훑어보는 일이란 꽤나 고리타분할 수 있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에 떡밥을 던져줄 만한 이야기들을 평전에서 빼버린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일 것이다. 평생의 후원자이자 대변인, 동료이자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와의 우정 어린 일화들도 그런 범주에 속할지 모른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막스 브로트는 원고를 모두 불살라 달라는 카프카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뒤 유고를 출판해 결과적으로 카프카를 역사에 남게 한 장본인이다.

편지 형식의 소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었던 독자라면, 카프카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애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부모의 강압적인 교육과 무관심, 그리고 잦은 반유대 시위로 불안했던 체코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카프카는 혼자 그림책을 보거나 우표를 모으는 소심한 아이로 자랐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철학 공부는 굶어죽기 딱 알맞은 미친 짓"이라는 아버지의 격한 반대에 부딪쳐 법학을 공부해야 했다. "거인인 아버지, 최종 심급인 아버지"는 카프카의 뇌리 속에 '계층의 권위자'로 치환되었으며 학교 선생님들, 사회, 국가, 모든 권력자의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에게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대목 사이사이마다 등장하는 카프카의 언행이 언제나 결국 '글쓰기'로 수렴되었음을 이 평전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기와 편지, 짧은 산문 등에 남아 있는 카프카의 고백 중 현저히 잦은 빈도로 등장하는 것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구절인 것이다.

"신은 내가 글 쓰는 것을 원치 않아. 그러나 내가 원해. 그러니 써야만 해."
"망원경으로 혜성을 살피듯이 자신을 향해 매일 적어도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 한다."
"글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문학과의 관계를 종교와의 관계보다는 엄정한 거리감 속에서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너무 오글거려 못 견딜 수도 있을 문장들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애처럼 반복되는 문학에의 열망과 고뇌, 그리고 문학적 삶과 소시민적 일상 사이에서 죽을 때까지 떨치지 못했던 양가적 감정의 진술 앞에서, 카프카를 최고의 작가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나조차도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할 지경이었으니. 이래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작가로 온전히 남겨두려면 작품 외의 모든 것에 눈도 감고 귀도 닫아야 한다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일생에 걸쳐 천착했던 글쓰기의 영역은, 우리가 흔히 '중2병'이라는 이름에 빗대어 부르는 문학소년 감성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카프카는 낮에는 "빵을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글을 쓰면서 삶의 긴장을 유지했다. 이 이중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그가 글쓰기를 순수 문학의 내적 탐미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문학적 삶을 윤리적 도덕적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의미심장한 단초를 제공한다.

카프카. 누구나 그 이름을 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흉측한 벌레가 되어 있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황당무계한 소설 <변신> 역시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가 명쾌하게 해명된 적은 별로 없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상황 자체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저마다 다르지만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대부분 사건이 전개되기도 전에 갈등이 예고되어 있다. 아니, 소설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은 이미 파국적 결말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파국에는 인과관계가 아예 없기도 하다. 대부분 매우 고통스러운 이야기지만, 그 고통의 정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체포되어 개처럼 처형되는 사나이의 이야기인 <소송>, 인간 사회의 관습과 그 굴레에서 헤매는 개인의 불행을 그린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거대한 자본주의 산업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이 투영된 <실종자>, 인간성이 말살당한 시대의 병적인 풍경을 고통스럽게 묘사한 <유형지에서> 등 카프카의 작품은, 시대의 불행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현대 인간의 다양한 풍경들이다. 이러한 시대의 부조리성과 끔찍한 실존의 문제를 직면하고 극한까지 밀고 나가 표현하는 것이 동시대 작가의 소명이자 임무라고 여긴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예술이기에 앞서 골방에서의 지독한 투쟁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사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이 평전의 부제가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라는 점이다.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카프카'라든가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한 작가 카프카'가 아니라. 결국 방점은 '카프카'에 찍혀 있지 않고 그 작가의 '글쓰기'에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은 연구서가 아니라 평전이지만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무엇이었는가, 카프카의 문학관과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사실은 평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한 작가의 인생이 들려주는 내밀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작품의 배경 지식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 당연하면서도 '저자의 죽음'이 대두된 이후 인정받지 못했던 그 사실을 말이다.

사실 카프카의 소설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바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상이 사실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상 속에 숨겨진 이 엄청난 비밀을 카프카는 어린 시절의 아주 평범한 사건으로부터 발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잠깐 낮잠을 자다 눈을 떴는데, 어머니가 발코니에서 아래층을 향해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뭐하세요?"하고 묻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어떤 여자가 "정원에서 간식을 들고 있어요." 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어린 카프카는 반수면 상태에서 그처럼 약속된 자연스러움과 자동화된 질서가 대부분의 생을 이끌어 나간다는 사실에 관해 놀라움을 느꼈다.

세계에 대한 이 낯선 감각을 학습을 통해 배울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가끔 자신도 모르게 체감할 때가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도마. 도마. 혹은 장갑. 장갑. 천천히 발음해보다가 문득, 이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왜 이것인지, 언어의 이물감에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그것보다 조금 덜 바보스럽고 훨씬 더 비극적인 예도 있다. 매일 저녁 TV에서 접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의 법칙들, 그리고 규격화된 삶의 시스템 속에서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순간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별 생각 없이 날씨 얘기를 던지는 편의점 주인에게 갑작스러운 살의를 느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영화 속의 살인마는 총을 꺼내 들지만, 현실 속의 소설가는 펜을 든다. 카프카는 진정한 글쓰기란 이 고착화된 세계에 반기를 드는 "투쟁의 기록"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만일 우리가 읽은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에게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야.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서른다섯 살 여름 처음으로 각혈을 한 후, 카프카는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점차 건강이 악화되면서 글쓰기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심화되었다.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언어로 형상화하지 않는 한, 글쓰기가 "살인자의 대열로부터 뛰쳐나가는 '행위 관찰'"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카프카에게 있어서 언어에 대한 회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그의 소설이 쫓는 목표는 글을 쓰는 방식과도 직접적인 관련을 갖게 되었다. 카프카는 결정적 의도나 체계적인 흐름을 고려하지 않고 장별로 혹은 단락별로,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는 편이었는데, 이런 병렬적 글쓰기 스타일은 의식과 언어의 해체 속에서 우연적인 조합과 아이러니의 발생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실존의 방식'이라고까지 표현한 카프카였지만 작품 속에서는 결국 저자가 아니라 언어가 행위한다고 말한 롤랑 바르트와도 닿아 있는 작가였다. 그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의미의 부재, 상징의 몰락 등의 특징은 카프카를 해독하기 어려운 난해한 작가로 만들었지만, 대신 비할 데 없는 인지의 충격과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남겨 주었다.

스페인, 남아메리카 같은 먼 나라에 가서 일자리를 구했으면 하는 꿈을 꾸면서도 단 한 번도 "저주스러운 프라하"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카프카. 두 번의 약혼과 두 번의 파혼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과정, 거기에 더해진 병마와의 싸움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사십 평생을 고독한 글쓰기의 세계 속에 갇혀 보낸 셈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그들은 집 안에서, 탄탄한 침대에서, 탄탄한 지붕 밑에서, 매트리스 위로 몸을 쭉 뻗치거나 오그린 채 시트 속에서 이불을 덮고 잠자고 있다. …… 그런데 너는 깨어 있다. 너는 파수꾼의 하나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만 한다." ('밤에')

모두가 잠든 적막의 밤에 고집스런 파수꾼처럼 홀로 깨어 글을 쓰던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세상을 떠나 프라하 교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를 보면, 자신이 일상의 굴레에서 겪는 끔찍한 억압과 고통이 개인의 고통일 뿐 아니라 전 유럽인, 전 인류가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겪게 될 고통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카프카가 전 생애를 통해 던진 질문, 평전의 저자가 카프카의 입을 통해 다시금 던진 질문을, 평전을 덮으며 곱씹는다. 지금 우리에게 쓴다는 것은, 그리고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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