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두 명이 함께 쓴, 정치학이 아니라 정치에 관한 <독재자의 핸드북>(브루스 브에노 데 메스키타·알라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마음에 쏙 와 닿은 구절이다. 이건 공소한 정치학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신랄한 지적이다. 현실 정치에 매몰된 정치 평론집에서 만나기 힘든 탁견이기도 하다.
20년도 더 전에 한국 정치를 지켜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몇 년 동안 여의도를 오가면서 느꼈던 것은 '정치란, 적어도 지금의 한국 정치란 상식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구나'란 것이었다.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하고, 개인적으로 만났을 땐 멀쩡한 소리를 하던 이도 정작 공개적인 자리에선 딴소리를 하며, 국민보다 보스를 먼저 생각하는 선량들의 행태는 교과서를 통해 배운 정치와는 영 딴판이었다.
▲ <독재자의 핸드북>(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알라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그러니 이 책을 펼쳐 든 것은 순전히 제목에 홀린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처럼 정치 지도자를 위해 지극히 현실적인 지침을 일러주거나 <권력의 법칙>처럼 리더십의 원칙을 정리한 책으로 보였다. 워낙 비뚤어진 것에 혹하는 성격이어서 통치술에 관한 반어법적 접근을 시도한 책이지 싶어 찾은 것이다.
읽어 보니 달랐다. 나름의 독특한 프레임을 바탕으로 지도자들이 권력의 획득, 유지하는 행태를 분석한 것이었다. 물론 제목처럼 고대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에서 중동의 카다피, 북한의 김정일까지 독재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이들의 악행을 고발하려는 것이 저자들의 의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는 물론 휴렛패커드 같은 기업,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축구연맹(FIFA) 같은 국제기구까지 폭넓게 거론한 데서 보듯 권력의 보편적 속성에 대한 해부가 이들의 목적으로 보인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 책의 탁월한 점은 독특한 분석 틀이다. 두 지은이는 정치 지형을 명목 선출인단, 실제 선출인단, 승리 연합으로 나눠 다양한 정치 체제를 분석하는데 이것이 현실 정치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해 보인다.
명목 선출인단은 지도자를 선출하는 데 법적인 발언권을 가진 모든 사람, 곧 전체 유권자를 가리킨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보통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정치적 관문에 발을 들여놓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다. 보다 중요한 역할은 실제 선출인단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원로 왕족들처럼 실제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지지를 얻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집단은 실제 선출인단의 일부로 구성되는 승리 연합이다.
지은이들은 대체 가능 집단, 유력 집단, 핵심 집단으로 명명한 이들 그룹의 크기와 역할로 민주 국가와 독재 국가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통치 지침을 제시한다.(그러니 이 책은 제목과 달리 '독재자'를 이해하는 데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이들에 따르면 독재란 대규모 대체 가능 집단에서 선발한 극소수의 핵심 집단과 비교적 적은 수의 유력 집단에 의존하는 정부이며 민주주의란 다수의 유력 집단과 대체 가능 집단을 토대로 삼은 통치를 의미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어떤 체제든 지도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통치 기본 원칙을 제시한다. 이는 핵심 집단을 최소 규모로 유지하라, 대체 가능 집단은 최대 규모로 유지하라, 수입의 흐름을 통제하라, 지지자들에게 충성심을 유지할 정도만 보상하라, 국민을 잘 살게 해주겠다고 지지자의 주머니를 털지 마라 다섯 가지이다. 이 지침이 독재자들에게만 쓸모 있다고 여길 일은 아니다.
1864년 재선에 나선 링컨 미국 대통령은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는 군인들을 위한 부재자 투표 제도를 도입해 대체 가능 집단을 확대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뉴욕에 큰 영향을 미쳐 인기가 높던 조지 매클러란 장군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지지자들에게 충성심을 유지할 정도로만 보상하라도 현실 정치에서 생명력을 발휘한다. 2011년 중동 민주화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집트 사태를 보자.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의 위력을 주요 성공요인으로 보지만 지은이들은 색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 이후 무바라크 정부를 지탱해온 미국의 원조가 끊기면서 청년 실업률이 20퍼센트가 넘는 등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쳤다. 이에 따라 핵심 집단에 대한 보상이 줄어들면서 군부가 등을 돌렸다. 정부에 충성하고 시민을 진압할 만한 인센티브가 없어지자 군부는 시민 혁명을 방치했다는 설명이다.
국민을 잘 살게 해주겠다고 지지자의 주머니를 털지 말라는 지침도 마찬가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퇴역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하고 시민의 부채를 약 25퍼센트 감면해주는 등 빈곤층을 지원하는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시민들은 열렬히 호응했지만 유력 집단과 핵심 집단의 복지에는 해로웠다. 결국 카이사르 암살에 나선 것은 이 두 집단이었다.
이런 것들이야 정치인들을 위한 역설적 교훈이라 하겠지만 유권자들이 유념할 대목도 적지 않다. "정치의 원동력은 통치자의 사적인 이해관계"란 구절은 어떤가. 4·11 총선을 앞두고 여야 지도부가 제 사람 심기에 골몰하는 행태는 이와 관련이 없을까.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정책을 제안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며, 앞으로 (공직에서 물러날 때) 경제적인 성과가 약화되더라도 더 활발히 내세우는 편이 유리하다" 역시 재원은 나 몰라라 한 채 앞 다투어 선심성 복지 정책을 내놓는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가 떠오른다. "핵심 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은 첫째가 충성, 둘째가 충성, 셋째가 충성"이라거나 "현대에도 정상에 오를 수 없는 사람을 가까운 고문으로 선택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효과적"이란 지적 또한 우리 정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책은 지은이들도 인정하듯이 지극히 냉소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에 염증을 내고 아예 투표장 가기를 거부할 것인가. 지은이들은 세 집단의 역학 관계를 이용해 새 판을 짜라고 제안한다. 지지 세력인 '연합'의 덩치를 키우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 위스콘신 주에 있는 미식 축구팀 그린 베이 패커스의 예를 든다. 11만 명이 넘는 이 팀의 주주 대부분은 지역 주민들이며 누구도 475만 주 중에서 20만 주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 게다가 이사회 주주는 43명에 달한다. 소수의 대주주가 개인적 보상을 얻을 목적으로 다수의 소액 주주들을 희생시키는 팀 운영을 하기 어려운 구조다. 여기서 대규모 연합에 의존하는 기업일수록(국가도 마찬가지다) 소유주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다는 교훈을 끌어낸다.
지은이들은 지도자가 맡은 임무(다시 말해 국민의 나라를 위한 최선의 일)를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계가 아니라 학계에 입문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세상을 추구한다면 이는 시간 낭비이며, 다수의 사람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어려운 임무를 포기하겠다는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은이들의 말처럼 차선의 대책이라도 모색하는 것이 옳다. 그 첫 걸음이 정치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책에 실린 쓴 소리를 귀담아 들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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