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파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서중석의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53~554쪽에서 발췌해 옮겨 놓는다.
3월 22일의 파업은 예고는 물론 어떠한 조짐도 없이 돌연히 행해졌다. (…) 철도 노동자들은 '남조선 철도 해고 폭압 반대 투쟁 위원회'의 이름으로, "24시간 총파업에 노동자 사무원은 궐기하자"는 제목의 유인물과 삐라를 각 역과 직장, 거리에 살포하였다. 이러한 유인물과 격문, 삐라에는 감원과 실업의 반대, 테러와 폭압의 박멸 등을 요구하는 구호와 함께, 국립대학안 반대, 친일파 반역분자의 청소,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 취소, 전평 허성택 위원장 이하 간부와 노동운동자들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가 들어 있었고, 대개 "3상 결의의 즉시 실시",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으로 끝을 맺었다.
(…) 3·22 파업은 군정과 경찰 및 우익 정당에 대해 남로당이 언제든지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을 동원했는데도 비밀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은 남로당의 조직 규율이 잘 서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3·22 파업을 통하여 남로당은 전 조직 역량을 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반면 철도 파업의 경우가 특히 현저하였지만, 3·22 파업의 규모를 볼 때, 남로당과 그 외곽 단체의 조직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3·22 파업은 9월 총파업과는 큰 차이를 느끼게 하였으며, 좌익과 우익의 힘의 역전 관계를 잘 보여준 실례였다.
▲ 3·22 파업을 보도한 1947년 3월 25일자 <자유신문> 제2면. ⓒdb.history.go.kr |
9월 총파업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돌연하다는 점에서 3·22 파업은 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자유신문> 3월 25일자는 1면에 파업 관련 사설과 24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는 사고(社告)를 싣고(3월 23일은 일요일이었다.) 2면을 거의 완전히 파업 기사로 채웠다. 이런 제목들이 보인다. (특호 활자 제목은 밑줄로 표시함)
"1일 파업 일과 후 좌익 요인 총검거-남조선 정계의 미증유의 중대 사태"
"검거는 광범위-여, 허 양 씨는 체포령에서 제외"
"민전회관 파괴"
"민혁당을 점거"
"전평회관도 점거"
"점거는 불법-경무당국자 담"
"항의적인 평화 파업이다-남조선 해고폭압 반투에서 성명"
"서울에서는 시위 행진 등"
"대량 검거는 피하라-조 부장 지시"
"출로 파업으로 각 신문 1일간 휴간"
"계엄령 운운은 사무상 실수로 된 오보"
"각지 철도 복구"
"각지 24시간 파업 상황"
조병옥 경무부장의 대량 검거를 피하라는 지시가 이채롭다. 파업에 대한 대응으로 경찰이 좌익 총검거에 나선 데 비난 여론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일보>는 23일자만 휴간하고 24일자를 발행했는데, 파업을 비난하는 자세가 확연하다. 특호 활자로 뽑은 제목이 이랬다.
"남조선 파괴의 음모 발각"
"민전, 남로 등 5단체 간부를 작효(昨曉) 총검거"
"남조선에 파업 선풍-24시간 조건부로"
▲ 1947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 제2면. 24시간 시한부 파업을 놓고 "남조선 파괴 음모!"를 외치며 경찰의 좌익 탄압과 극우파의 테러에 나팔을 불어준 것이 당시의 <동아일보>였다. ⓒdb.history.go.kr |
5단체 간부 총검거 기사에는 "수도경찰청 특별 발표"가 붙어 있다.
금번 남조선 일대를 파괴 습격 기타 처참한 계획으로 암흑화시킬 음모가 발각되어 경찰은 시각을 지체치 않고 검거를 단행하였다. 이상 제종의 음모를 설계하여 실천에 옮긴 제 단체 소속 인물을 금효 5시를 기하여 일제 검거하고 관계 서류 급 기타 증거품을 다수 압수하였다. 검거된 단체의 명칭은 여좌하다. 인명은 체포되지 않는 자가 있는 고로 당분간 발표를 보류한다.
1) 남로당 간부 전원, 1) 조선민청 간부 전원, 1) 전평 간부 전원, 1) 민전 간부 전원, 1) 전농 간부 전원.
이상 지정한 단체는 주요한 범죄 단체로 인정하므로 경찰은 엄중 취조하여 법의 재단에 얹을 것이다.
1947년 3월 23일 수도관구경찰청장 장택상
이튿날 <동아일보>에는 당시 검거 상황이 보도되었다.
"파업 배후의 음모-김광수 씨 등 29명 검거"
22일을 기하여 남조선 각지에 파급된 전기회사를 비롯한 철도 일부 출판노조 등 종업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 수도관구 경찰청에서는 23일 새벽을 기하여 전평, 남노, 민청, 전농, 민전 등 각 좌익 단체 간부를 총검거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24일까지 검거된 좌익 단체 간부는 민전 간부 박문규, 안기성, 김광수, 김원봉, 조평재, 전영우와 민청 부위원장 오인호, 민혁당 관계자 윤모 등 29명이 검거당하였다. 그리고 외에도 다수 인물이 수배 중에 있는데 취조 결과는 매우 주목된다.
하도 포괄적인 검거령이라 25일자 <자유신문>을 보면 여운형과 허헌이 제외된 사실이 뉴스거리가 될 지경이다. 지방 사정은 어땠을까? 29일자 <조선일보>에 광주 상황을 전한 기사가 있다.
22일 광주 일대의 파업이 있은 후 그 후 동향을 보면 경찰서에서는 23일을 기하여 전 시에 걸쳐 삼엄한 수사망을 펴고 혐의자를 속속 검거 중인데, 25일까지 판명된 것만도 민전 남로 전평 전농 간부를 비롯하여 각 관공청 관리 중등학교 교원 회사원 노동자 등 백수십 명을 검거하였으며 25일 하오 4시경에는 트럭에 편승한 정체불명의 테러단이 민전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파괴하고 서류와 간판을 절취하여 갔는데 이러한 백주 테러는 광주에서 처음인 만큼 인심은 극도로 흉흉한 상태에 있다.
백주에 시내에서 트럭을 동원한 테러가 있었는데 테러단은 "정체불명"이다. 지방 도시의 테러 현장에 기자의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면 경찰의 은폐로 볼 일이다. 기자가 정체를 파악한 경우에도 "모 단체"로 표시하는 일이 우익 테러 보도의 관례가 되어가고 있었다. 권력에 대한 저항이 '이적 행위'로 몰리는 대한민국 전통이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경찰의 폭압과 테러의 위협에 몰리고 있었다. 1946년 11월 24일 시천교당에서 열린 남로당 결성 대회 폐회 직후 기자석에 폭탄이 던져져 기자 두 명이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정황으로 보아 기자석을 겨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제1경무총감부 기자회에서 결의문을 작성해 장택상 총감에게 제출했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26일자)
1947년 2월 3일에는 경무부 간부의 독직 사건을 보도한 두 명의 기자를 경무부 수사국에서 소환해 2시간 반에 걸쳐 취조한 일이 있었다. 군정청 기자단의 항의에 대해 조병옥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7일자) 그러나 바로 다음 달 장택상 수도청장은 3·1절 발포 사태에 대한 자기 발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수도청 출입을 금지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좌익 신문사에 대한 테러는 다반사가 되었다.
3·22 파업은 기습적 돌입에 성공해서 사회에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너무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일으키는 쪽에도 부담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24시간 시한부로 시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빌미로 주요 좌익 단체를 모두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총검거에 나섰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중도적 입장을 대표하는 합작위 선전부에서 3월 27일 내놓은 담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금차 파업 사건은 극히 불행한 일의 하나이며 비록 시간부라도 파업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업 행위를 某某人들의 선동으로 해석하고 과분한 탄압 정책을 단행하여 다수한 동포를 처벌 구금하여 일반으로 하여금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함은 더욱 유감되는 일이다. 조속히 구금 동포를 석방하고 화평방법으로 일체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서울신문> 1947년 3월 27일자)
중도파의 이런 촉구나 조병옥의 "대량 검거는 피하라" 언명에도 불구하고 대대적 검거가 이뤄졌다. 3월 30일자 <자유신문> 보도에 따르면 29일까지 2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좌익인 2076명-29일 현재"
지난 22일 남조선 일대에 24시간 파업이 있은 다음 경찰 당국에서는 각 좌익 단체 책임자를 계속 구금하여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일반은 불안과 궁금에 사로잡혀 있는데 29일 현재까지 경무부에 보고된 남조선 피검자 총수는 도합 2076명이라고 하는데 각 지방 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59명, 경기도 185명, 강원도 219명, 충남 234명, 충북 5명, 경북 108명, 전북 628명, 경남 42명, 전남 366명, 제주 230명.
그리고 수도청에 피검된 59명은 민전 8명, 남로당 19명, 민혁당 4명, 민청 7명, 전평 15명, 학통 4명, 기타 2명이라고 발표하였다.
3월 29일자 <조선일보>에도 "28일 경무부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서울 시내에서 검거된 좌익 인사가 56명이라고 보도하고 "민전 8, 전평 15, 민혁 4, 남로 19, 민청 7 기타 3,"으로 내역까지 밝혀놓았다. 그런데 장택상은 3월 31일 기자들에게 "이번 파업에 관련된 혐의자 검거는 현재 수도관구만 19명뿐으로 이외에는 앞으로 절대 검거하지 않을 것을 언명"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1일자)
강원도와 제주도에 어떤 파업 사태가 벌어졌기에 검거자가 200여 명씩에 달했을까? 파업 직후의 "수도경찰청 특별 발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민전, 남로당, 민청, 전평, 전농 등 좌익 단체들을 원천적으로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실제 행위와 관계없이 모든 간부를 체포한다는 것이 수도청만의 방침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운형과 허헌이 검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뉴스거리인 상황이었다.
남로당은 아직까지 합법 정당이었다. 그러나 박헌영 등 주요 지도자들이 남로당 결성 몇 달 전부터 수배 상태였고, 수배 범위는 날이 갈수록 넓혀지고 있었다. 남로당은 박헌영이 제창한 투쟁적 '신전술'로 더욱더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박헌영 일당은 존재 의미 확인과 실력 과시를 위해 파업 지도 등 항쟁 영도력을 수시로 증명해 보여야 했고, 경찰과 극우파는 그런 일에서 '좌익 말살'의 핑계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현장의 좌익 운동가들이 희생당하고 활동공간을 잃어갔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한 단면이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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