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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검열, 국민 바보 '영구'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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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검열, 국민 바보 '영구'와 닮았다?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현시적 검열, 은폐적 검열, '영구'적 검열

총독에게 천황에 대한 불경 혐의를 씌워버린, 전 호에 소개한 사례를 기억하는가. (☞관련 기사 : "암캐는 공작 부인!" 이것도 명예 훼손?) 그 이야기를 좀 이어서 해보자. 국가보안법의 모델이 된 치안유지법이 서슬 시퍼렇던 시절에, 총독을 불경죄로 고소하다니 대단한 배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배짱 때문만은 아니다. 잡지를 통째로 압수해버리면 잡지는 존립을 위협 받을 만큼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일부 삭제만 된다면, 그 대목만 지워버리거나 재 인쇄를 하면 되지만, 아예 통째로 압수되는 일이 반복되면 독자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이 문제라서 압수했는가. 왜 부분 압수가 아니라 전체 압수인가. 검열 행정이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다는 불만이 컸다. 검열 행정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도대체 어떻게 잡지를 내야 할지 막연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잡지를 운영할 수 없다, 언제까지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 문제 제기라도 속 시원하게 해보자, 뭐 이런 마음이었을 터이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1920년대 후반까지의 검열 행정은 엄격한 비밀주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검열의 기준 자체가 비밀이었다. 기준을 모르니까 언론들도 어떤 기사를 실어도 되고 실으면 안 되는지를 알 수 없었고 그저 '감'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감'을 잘못 잡아서 뒤늦게 검열에서 삭제 지시를 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 경우에는 먹칠이나 '○○', '××'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면에 반영해야 했다.

대표적인 보기는 벽돌 신문이다. 신문을 인쇄해서 배달해야 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고, 갑자기 기사가 압수되면 새 기사를 쓰고 채자(採字, 원고에 맞는 활자를 찾아 배열하는 작업)를 하고 조판(組版, 채자된 활자를 지면 크기에 맞춰 배열하는 작업)을 해서 다시 채워 넣을 시간은 도저히 없으니 그냥 활자를 뒤집어 놓고 인쇄하게 된다. 활자의 앞면에 쓰인 글자들은 사라지고, 뒷면이 지면에 그대로 찍히게 되는 것이다.

▲ '벽돌 신문'이 되어버린 <대한민보>. 검열에서 삭제 지시를 받은 부분의 활자를 뒤집어 놓고 인쇄하면 마치 벽돌을 쌓아놓은 듯한 지면이 나온다. 감옥을 '붉은 벽돌집'이라고 부르곤 하니까, 신문의 감옥인 셈이다. ⓒ한만수

이 벽돌 신문은 물론 언론 탄압의 상징처럼 굳어졌으니 독자들은 벽돌 신문을 보면 권력을 비판하면서 언론사를 옹호하게 된다. 1920년대 신문에는 '신문 정부'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동아·조선이 총독부에 맞서는, 국내에 자리 잡은 망명 정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는 뜻에서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동아·조선 양대 민간 신문은, 3.1운동 직후에 우후죽순처럼 발간되던 수많은 비합법적 언론들에 맞서, 합법적 영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해나가기도 했다. 총독부와 민간 신문 사이에 소위 '적대적 공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검열자는 멍청이가 아니다. 이런 부작용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합법적 언론이란 주지하다시피 1919년 기미 만세 운동의 무마책으로 갑작스럽게 허용된 것이었던 바, 그 합법 언론에 일정한 힘을 실어주는 것은 권력의 입장에서도 부정적인 일만도 아니었다. 비합법 언론들과의 담론 경쟁에서 그들이 승리하는 일은 언론 통제를 위해 오히려 바람직한 측면까지 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효과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거대 자본이 투여된 합법 영역의 언론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큰 어려움 없이 장악할 수 있을 노릇이었다.

게다가 3.1운동 직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벽돌 신문은 권력의 존재를 일상적으로 현시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내 힘이 이렇게 건재하니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으름장. 너희들이 '정부'라고까지 인식하는 신문도 내 힘 앞에서는 벽돌 신문의 활자처럼 손쉽게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는 무언의 협박.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과도기적이고 비정상적이었다. 행정 행위의 논리적 타당성이나 일관성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행정의 신뢰성과 효율성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만 보더라도, '감(感)'에 의존하는 검열 행정이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당장 일개 잡지 편집인이 총독을 고소하지 않았는가. 합리성의 영역에서 한번 논쟁해보자고 요구하지 않았는가.

3.1운동의 사회적 에너지가 다 해가고 문화 통치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자, 검열 당국은 전략을 바꾸었다. 과도기적이었던 자기 현시적 검열을 버리고, 자기 은폐적 검열, 즉 검열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검열로 나아갔다. 이 시기의 검열은 검열의 흔적까지를 지우도록 요구하는 검열이었다. ○○, ×× 등의 방식으로 복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벽돌 신문도 물론 불가능했다. 분명 검열은 지속되었지만 신문 지면에는 검열의 흔적이 사라졌다. 마치 검열이 없는 것처럼, '표현 자유의 무덤' 위에 '언론의 자유'라는 깃발이 나부끼게 되는 것. 검열은 자신의 존재를 은폐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알아서 기게' (그러고 보니 '기자'란 그 앞에 '알아서'라는 말이 생략된 단어라는 블랙유머도 있다)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검열 기준은 명확해져야 했고 공개되어야 했다. 세세하게 체계화된 검열 기준들이 공개되고 지속적으로 정비되었으며, 간담회라는 형식으로 언론 관계자들을 수시로 모아놓고 검열 지침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참 '친절해진 검열씨'다. 1920년대 말 일간지 편집국장의 책상에는 한 권의 검열 기준이 놓여있어서, 사내 검열의 바이블 구실을 했다. 이즈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주요한은 "편집국장의 주요한 책무는 사내 검열관의 노릇에 불과했노라"고 자조 섞인 회고를 남기고 있다.

검열의 흔적을 남긴 지면을 배포할 수 없으니, 삭제 지시를 받으면 재 인쇄를 하거나 아예 그날 신문을 발송치 못하게 된다. 손실이 막대해졌다. 현시적 검열의 시기에는 삭제 지시를 받아도 신문사의 손실은 거의 없었지만, 이제 은폐적 검열의 시기에는 손해가 막심해진다. 점차 신문사 편집국의 분위기도 반전되었다. "압수를 당하면 만세를 부르고, 사나흘만 압수가 없으면 요즘 기자들이 기개가 없어 큰일이라고 걱정하던" 1920년대의 분위기는 사라졌다. 예컨대 안재홍의 사설이 비교적 자주 삭제 지시를 받았던 바, "그 양반은 요령 있는 글쓰기를 할 줄 몰라 문제"라고 내부에서부터 비판이 들끓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제 검열자는 총독부에 있는 게 아니라 신문사 내부에 존재했다. 신문사 내부의 위계 관계는 이 내부적 검열을 효율화했다.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신문 경영에 타격을 줄 기사는 써서는 안 되게 되었다. 쓰더라도 위에서 알아서 걸러버리고 다시 총독부에서 재 검열할 터이니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검열당국은 세련되어졌고 합리성이라는 무기를 획득했다. 합리성이 뭔가. 근대의 주인 아닌가. 이젠 법적 근거가 명확치 않다고 시비를 걸거나, 통째로 압수하면 천황칙어까지 압수한 셈 아니냐는 식으로 총독을 제소하는 식의 사법적 다툼도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서 검열자는 기자 자신이 되어버린다. 내 내면에서 나를 검열하는 검열자. 검열의 내면화는 검열제도의 완성을 의미했다.

▲ 검열이 명백히 존재하지만 '검열 없다'고 말하는 이명박 정부의 언론 검열은 '영구'와 닮아 있다. ⓒnaver.com
그러나 그 검열의 내면화에 저항하는 기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에 일장기 말소 사건이 있었다면 1970년대에는 동아·조선 기자들의 언론투위 활동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해직 언론인을 중심으로 <한겨레>가 만들어졌고 1990년대에는 독립 언론 <경향신문>과 <프레시안> 등이 태어났다. 검열 제도가 아무리 엄혹하더라도, 나의 내면까지 점령당하지만 않는다면, 그 검열을 뚫을 수 있는 힘은 언젠가는 생겨남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언론 검열은 현시적일까 은폐적일까. 내 놓고 하는 도둑질인가 몰래 하는 도둑질인가. 대체로 은폐적 검열에 가깝겠지만, 세련성과 합리성은 영 떨어져 보이니 적절한 이름이 없다. 일단 '영구'적 검열이라 불러두기로 한다. '영구' 심형래 씨는 자기 눈을 가린 채로 '영구 없다'고 외친다. 심복들을 각 언론사 사장으로 보내 언론 장악을 기도했음을 천하가 다 알고 있는데도, 혼자서 "검열 없다"고 우기고 있으니 이렇게 부름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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