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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가 모셨던 파시스트 장택상을 아십니까?

[해방일기] 1947년 3월 21일

1947년 3월 21일

이 일기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을 대상으로 간간이 '인물 스케치'를 그려보려 한다. 어떤 사람인지 넓은 시각에서 파악하면 당시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제일 먼저 다룬다.

출입 기자단에게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가 도리어 출입 거부를 당한 장택상,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경찰 간부로서 언론을 그렇게 대할 수 있었을까?(1947년 3월 1일자 일기) 짤막한 글로 그의 사람됨을 빠짐없이 그려내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이 되는 모습을 그려보겠다.

우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장택상' 기사를 옮겨놓는다.

1893(고종 30)∼1969년. 정치가. 호는 창랑(滄浪). 경상북도 칠곡 출신. 경상도관찰사 승원(承遠)의 아들이다. 16세에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 유학하였다가 중퇴하고 귀국, 청구회(靑丘會) 회장을 지냈다.

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제1관구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치안 유지에 공을 세웠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그해 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

1950∼1951년 유엔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195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원내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장을 지냈으며,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그 뒤 제6대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에게 패하였으며, 한일협정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고 신민당고문을 지내기도 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외무장관, 국회부의장, 국무총리를 지내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아래 야당을 이끈 인물이다. 그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청년 김영삼이 대통령으로까지 자라나게 한 배경이 되었다. 액면으로만 보면 대한민국 정치계의 '거목'으로 손색이 없다. '창랑'이란 아호는 또 얼마나 멋있는가!

그런데 <해방일기>에 나타나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모습에는 몰상식하고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측면이 크다. 아무리 좋게 봐도 매우 특이한 인간형이다. 나쁘게 보면 전형적인 파시스트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장병혜·장병초 엮음,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펴냄. <자서전>)를 뒤져보았다. 자신의 기록, 그리고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그에 대한 인간적 이해를 얻기 위해서였다.

"추모의 글"로 김준연, 이범석, 이재학, 김영삼, 김수한의 글과 그의 서거 때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신아일보>의 무기명 칼럼과 사설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가지 좋은 얘기가 담겨 있는데, 그의 정치적 업적을 기린 것은 '반공'뿐이다. 그가 섭렵한 요란한 관직들을 염두에 두고 보면 내놓을 만한 업적이 이처럼 빈약하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다. 1952년 국무총리를 지낼 때의 업적이라면 발췌 개헌안을 추진한 악명뿐이다. 김영삼은 "다정다감한 정치가"란 추모 글에서 그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국무총리 시절 창랑 선생은 발췌 개헌안을 밀고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상세한 내막은 알 길 없으나 당시 그분으로선 그 길밖에 없어 보였다. 그 무렵 국회의원들이 군 계엄사령부에 연행되는 정경을 목격하고 눈물지으며,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총리고 뭐고 다 집어치워야겠다." 하고 한숨짓던 일이 어제만 같다. (<자서전>, 326~327쪽)

발췌 개헌 관철에 앞장선 인물이 눈물짓고 한숨짓는 장면이 잘 상상이 되지도 않거니와, 그런 눈물과 한숨을 "다정다감"이라 하는 것도 참 기묘하다. 이재학의 추모 글은 "청빈한 애국자"란 제목이다. "청빈"이란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

괄괄하고 성급함 때문에 때로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어제까지의 정적을 금방 동지로 받아들이던 넓은 도량이 새삼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시고 없는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큰 유산은 청빈과 그리고 애국심입니다. 요새는 정치를 하면 치부를 한다고들 하는데 창랑은 정치를 하면서도 서울 수표동 집을 팔고 영등포 대방동 조그만 집에 유가족을 남기시지 않았습니까. (<자서전>, 324~325쪽)

재산 관리 잘 못하는 것을 "청빈"이라 하던가? 그는 자서전 도처에서 자신의 사치스러운 습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그의 "도량"은 경찰 내에서 평판이 높았던 모양이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경찰로 근무한 1916년 생 홍순복의 회고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조병옥, 장택상 같은 분들도 사상적으로 박해받던 사람들이었는데도 자기네를 핍박했던 경찰들을 다시 채용했던 거예요. 그 사람들 아량은 보통이 아닙니다.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235쪽)

함께 "아량"을 칭송받던 조병옥과의 관계를 장택상은 이렇게 스스로 적었다.

수도청장으로 있을 동안 나는 미 군정청 경무부장 유석 조병옥 씨와 하루에도 몇 번씩 접촉을 가지면서 경찰 행정, 정부 수립에 관하여 수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는 매사에 의견이 일치되었다. 항간에서는 유석과 내가 좋지 못한 사이라는 풍문도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그 때 좌익과 맞서 일선에서 싸우던 우리의 의견이 맞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건국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겠는가. (<자서전>, 75쪽)

그런데 본인이 부정하는 "풍문"이 20년 후 그가 죽을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서전> 337~338쪽에 수록된 "극적인 일생"이란 제목의 1969년 8월 2일자 <중앙일보> '분수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유석과의 사이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좋질 않았다. 하루는 이 박사를 찾아가서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전 선생님(이 박사)을 40년 가까이 모셔 오지만 한 번도 사사로운 부탁을 드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꼭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내무부 장관(유석)을 갈아 주십시오, 조 군은 의리도 없는 친구입니다."

창랑은 끝내 그의 언질을 받으려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 박사는 "치프 장은 고집이 세어서…" 하고 웃어 버렸다는 것이다.

장택상은 내 편과 네 편을 엄하게 가르고 자신의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태도로 대했던 모양이다. <자서전> 120~122쪽 "임정 인사의 고자세"란 꼭지에서 자신이 김구를 적대하고 이승만을 지지한 까닭을 밝혔는데, 임정 환국 직후(1945년 11월 하순) 추운 날씨에(영하 15~16도나 되었다고 그는 썼다.) 세 시간 이상 한데서 기다린 것이 무척 마음 아팠던 모양이다.

이 때 허정 씨의 불평불만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가진 나로서도 이때만큼은 꾹 참고서 도리어 허정 씨를 달래는 데 죽을힘을 다하였다. 김(석황)이 들어간 지 약 30분이 지나서야 웬 중국 옷 입은 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우리들을 옥내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자를 따라서 일본식으로 된 최창학 씨 집 2층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석 김구 씨는 좌석에 앉은 채로 요지부동, 우리 여섯 사람(김성수, 조병옥, 백관수, 김준연, 허정, 장택상)의 큰절을 차례로 받았다.

우리들은 '임정'이 귀국한 인사말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시영 씨를 찾았다. 그분은 참으로 신사적이었다. 우리들의 인사를 따뜻하게 받고서는 "일인들의 가혹한 통치 밑에서 국내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느냐?"고 도리어 우리에게 위로의 말까지 하여 주었다. 이것이 국내에서 정치에 마음을 두었던 우리들의 임정 인사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나는 인상이 나빴다. 그리고 나의 임정 인사에 대한 그 나쁜 인상은 미군정 3년간을 통하여 일관되었다.

이에 반하여 이승만 박사가 귀국한 후 우리들에게 준 인상이란 딴판이었다. 물론 그분은 구미에서 반생을 넘도록 생활한 분인 까닭에 대인 접촉하는 방식이 친절하고도 의미심장하였겠지만, 특히 이분은 당시 경찰권을 쥐고 있던 유석과 나에게, 또 우리를 통하여 경찰에게 가장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경찰 회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회의에 참석한 경찰 간부 전원을 초대하여 만찬을 같이 하고 노고를 치하하였으며 은근히 경찰의 호감을 사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임정 인사는 입국 초부터 경찰을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좌익이 백주에 살인, 방화 등 범죄를 감행할 적에 이의 저지에 나선 경찰관을 마치 민족 반역자처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미군정이 한국 통치를 종말하고 정권을 우리들에게 넘겨줄 때 임정이 계승을 하지 못하고 개인 이 박사에게 통치권이 넘어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승만이 친일 경찰을 회유하느라고 애를 쓴 사실을 장택상은 이렇게 버젓이 기록했다.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모양이다.

<자서전> 114~120쪽의 "아쉬운 재상도(宰相道)"를 보면 장면이 매우 유치찬란한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의 유치찬란한 모습을 장면에게 뒤집어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네 그것 알지, 응"

노기충천한 그 당시 재상이었으며 한때는 국가의 제2인자였던 모 씨는 한 외무부 중견 간부에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이 외무부 관리는 당황한 어조로 변명과 사과말을 겸해 올렸다. "저야 꾸중을 듣고 있습니다마는 어찌된 영문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빛은 새하얘졌다.

"아니 자네 외삼촌이 한 일을 자네가 모른대서야 말이 돼? 천만에. 자네 외삼촌이 내 총리 자리를 떼어먹었단 말이야! 그래도 몰라?" 재상은 흥분하여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쳤다. 그런데 이 외무부 중견 간부의 외삼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재상의 자리를 떼어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의 자리를 굳혀주는 역할을 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자기 상사의 자리를 노리다가 그것이 발각되자 자리를 비켜놓게 된 것이다.

(…) 허정 씨는 "장면 씨가 국회의원 김모, 김모와 몇 사람을 통하여 간접 선거에 자기가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것을 논의하였고, 또 파리 체류 중에도 연락부절로 끊임없는 모의를 하였다."고 저간의 소식을 전하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허정 씨로부터 듣고서 아연하였다. 나는 장면 총리와 파리에서 한 호텔에 있으면서도 좀 이상스러운 눈치는 보았었지만 그가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줄은 전연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나도 석두(石頭)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장면 씨가 총리를 퇴직한 후에는 의당 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현직으로 있으면서 자기 상사의 앉은 자리를 파헤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일국의 재상으로서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면 총리는 1951년 11월부터 파리 유엔총회 참석 등을 위해 출국했다가 이듬해 4월에 귀국 후 바로 해임되었다. 그의 출국 중에는 허정이 서리를 맡았다. 장택상은 함께 출국했다가 몇 주일 앞서 귀국했다. 그래서 장택상이 이승만에게 고자질을 해서 장면이 떨려난 것이라고 소문이 났던 모양인데, 이에 대한 변명이라고 쓴 것이 위 내용이다.

장면을 욕하기 위해 "상사"를 배신한 것처럼 그리다니,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관계에 대해 자기가 어떤 관념을 가진 사람인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냈다. 장면을 이어 총리가 된 그가 발췌 개헌에서 맡은 역할도 그의 이런 관념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 전부터 장면 측에서도 장택상을 탐탁지 않게 여긴 사실을 장면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선우종원의 회고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 해 11월 5일 결국 장면 총리는 장택상 국회부의장, 조병옥 씨,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시인 모윤숙 씨 등과 함께 빠리로 떠났고, 총리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사실 이때 장 총리는 장택상 씨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었다. 그 이유는 장택상 씨는 외국에만 나가면 골동품에만 관심이 있고,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을 미리 파악한 창랑 장택상 씨가 이 박사에게 가서 보내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장 총리도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게 되었던 것이다. (<선우종원 회고록 격랑 80년>(인물연구소 펴냄), 147쪽)


장택상이 해외출장 때 일에 별로 열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자기 글에도 드러나 있다. <자서전> 62~64쪽의 "카페에서 사귄 불란서 여자"에 스위스 로잔느에서 한 여자를 만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915년의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뒤이어 65~67쪽 "다시 간 추억의 산책길"에는 1957년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사에 파견되었을 때의 하루 일과가 적혀 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정 군은 자가용차를 몰고 내가 유숙하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었다. 그때 마침 최(규남) 유(진오) 양 대표는 외출하고 없었고 나만이 혼자 호텔에 남아있었다. 나는 정 군을 만나자 정 군 자신보다도 그가 타고 온 자가용차에 마음이 쏠려 문득 옛날 로잔느에서 지내던 추억이 내 머리에 감돌았다.

그래서 나는 정 군에게 "오늘 다른 약속이 없느냐?"고 의사를 타진하고 나와 같이 몇 시간 로잔느에 가서 놀다 오자고 제의하였다. 제네바와 로잔느 사이는 자동차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 물론 나도 40년 전의 일이라 그녀가 그 집에서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추억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는 이 같은 광태를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침 10시에 집 찾기를 시작하여 하오 2시가 넘도록 정 군을 뒤에 두고 거리를 헤매었으므로 이 이상 찾는다는 것은 내 체면에도 좀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여 발걸음을 다시 대학 근처로 돌리고 빵집에서 차를 사 마시며 시간을 보낸 후 하오 4시가 넘어 제네바로 회정하였다.

"정 군"은 정일영 대사를 가리킨다. 정 대사가 당시에는 제네바 대학에서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었다고는 하지만, 현직 공무원을 하루 종일 자기 추억 찾기에 동원하다니, 장택상의 공직 윤리 의식 수준을 알 만하다. 이런 "광태(狂態)"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늘어놓는 것이 로맨티스트로서 자기 면모를 내세우려는 뜻일 텐데, 참 민망하다.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으로 있는 동안 좌익뿐 아니라 중도 우파 인사들에게도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받았다. 그런데 그는 그 편향성을 자랑스럽게 스스로 기록했다.

해방 후 조병옥 박사와 나는 함께 경찰에 투신하여 공산주의와 생사를 결한 투쟁을 했으며, 공적으로 때로는 대립도 있었으나 사적으로는 언제나 금석지우였다. 특히 미군정이 김규식 박사를 밀로 이승만 박사를 배척하려는 때, 조병옥 박사와 나는 결연히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 일조를 했다. (<자서전>, 53쪽)

이승만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커다란 공훈처럼 내세우는 자세가 지나칠 때는 기록 내용의 진실성을 믿기 어려운 이야기까지 나온다.

어느 날 하지 중장의 통역관 이묘묵 씨가 수도청으로 전화를 걸어 하지 중장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니 곧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사령관실에 들어서니 하지 중장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내가 자리에 앉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 오늘 장 총감을 불렀소. 다름 아니라 앞으로의 정책을 의논하자는 것이오. 지금까지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좌우 합작을 위하여 중립적인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기로 바꾸었습니다. 장 총감도 앞으로는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주기 바라오."

이러한 그의 말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지체 높은 사령관의 말을 제가 감히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말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 하셨습니다. 잘 알았소." 하고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는 "이게 무어요?" 하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나는 "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봉투 속에 있는 것이 사표임을 알자 그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언성을 높여, "당신이나 조 부장이나 다 나쁜 사람이오" 하며 심한 욕설까지 했다.

그는 아마 나와 유석이 사전에 협의라도 하여 그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한 것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한 일이었다. 하지의 방을 나와서 유석을 만나보았더니 그도 하지의 그 같은 제의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하지는 두 번 다시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서전>, 76~77쪽)

이승만 대신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하지가 경찰 총수들에게 "제의"를 했다? 미군 장교들은 마음속에는 어떤 편파성이 있어도 겉으로는 경찰의 중립성을 표방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라, 김규식을 지지하라는 것을 경찰 "정책"으로 거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택상이 "제 눈의 안경" 식으로 지어낸 소설 같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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