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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로 밀려온 트루먼 독트린 쓰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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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로 밀려온 트루먼 독트린 쓰나미

[해방일기] 1947년 3월 19일

1947년 3월 19일

<동아일보>는 1947년 3월 12일에서 14일까지 3회에 걸쳐 "미 국무장관보 대 조선 정책 시사"란 제목으로 점령 구역 담당 국무차관보 힐드링의 디트로이트 연설 내용을 게재했다. (당시 조선 언론에서는 '장관보'로 직위를 표시했는데, 지금의 용례에 따라 '차관보'로 한다.)

원고지 40매 가까운 분량을 사흘간 제1면의 거의 절반을 할애해서 실은 것이 놀라운 일인데, "공보부 발표"란 표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정청에서 내용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기간 <조선일보>에도 게재된 것으로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표시되어 있다.)

이 연설이 디트로이트 경제구락부 초청 만찬회에서 행해진 것을 보면 미국 재계에도 조선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연설에서 힐드링은 조선의 역사까지 언급하며 조선 사정을 다방면으로 설명했는데, 당시 미국인의 표준적 관점을 가장 포괄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연설의 취지가 남조선 단독 정부 추진에 있었다는 일각의 해석이 있으므로 그런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뒷부분만 여기 옮겨놓는다.

수일 전 귀국한 하지 중장은 조선 통일을 위한 소련과의 현지 교섭은 절망이라고 발표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하 정세는 일반적으로 이상과 같다. 우리는 실망하였으나 그것으로 좌절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최후의 성과에 관하여서는 결정적인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소련과 자유 독립 조선 수립을 서약하였다.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도 국제 공약을 회피할 의사는 없으며 따라서 노력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성취될 때까지 계속하여 주둔할 것이다.

현재에 있어서는 우리는 단독으로 이것을 계속하여 나갈 수밖에 없으며 교섭 좌절로 인한 지연 때문에 통일될 때까지는 우리 지대에 있어서 독자적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은 여하한 의미로서나 모스크바 협정 위반으로 해석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전한 국가로서의 조선의 재건을 위하여 소련과 협력할 의사와 준비가 항상 있었고 또 있으므로 여하한 타 방법으로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고로 우리는 소련이 모스크바 협정의 각 조항 실천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협력할 것을 항상 희망하고 있다.

기간 조선인은 더 참을 수 없고 또 냉정을 유지할 수 없다. 금차 대전 중 종시 조선인은 연합군의 승리로 다년간의 일본인 통치를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연합군의 승리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현재 일인은 물러갔으나 조선인은 일 지배자 대신에 양자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또 더군다나 조선은 밀봉한 양 지대로 분할되었다. 다대수의 조선인들은 일정 시대보다 더 생활이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 여하한 경우에도 우리는 철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여야 할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임무를 완료할 때까지 주둔할 것이다. 이것은 곤란한 과제이며 비용도 걸릴 것이다. 현재까지의 조선과 같이 빈약한 국가를 재건할 시에는 식량 주택 학교 운수 기관 기타 각종 문제에 비용이 드나 우리의 투자가 안전하였다고 인식할 날이 올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혹은 10년 후에는 우리는 우리가 1947년에 가지고 있던 이상 즉 안정한 평화 아세아 극동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번영한 무역 급 미국의 약속 이행에 대한 전 국가의 존경 등이 달성되어 스스로 만족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의심의 장벽을 타파하여 조선인을 도와서 통일된 신조선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문명이 개화하고 자원이 풍부하고 정치적 자유를 가진 일 독립 국가로서 연합국의 일원이 되도록 할 때까지 조선에 주둔할 것이다. 이 사명 달성에는 사업에 대한 새로운 헌신적 노력과 미국의 신과도 조선 건설안이 필요하며 또 조선 국민의 인내심과 미소 간의 상호 이해의 근본점 발견도 필요하다.

이 계획 달성에는 물론 시일이 걸리겠으나 나는 원만한 해결을 위한 모든 요소가 곧 달성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만약 국무성에 있는 우리가 미국 국민의 다대한 관심과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면 우리는 해결의 일요소로 미국의 중대한 역할을 주저 없이 다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것은 곤란한 임무이지만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할 가치가 있는 일이며 또 당연히 할 임무이다.


이 연설의 취지가 남조선 단독 정부 추진에 있다고 보는 견해는 며칠 후 AP 주간 시사 전망에 소개되었다.

미국 국무장관보 힐드링은 디트로이트 시 경제구락부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일장의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조선 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 교섭이 정돈 상태에 빠져 있고 소련 측의 조력 획득은 현 단계에 있어서 불가능시되고 있으므로 미 측은 남조선에 있어서 과도기에 획한 방책으로 단독적 계획을 진행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부에서 미 측이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 노선을 취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편도 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18일자)

여기서 "일부의 추측"이라 한 데 해당되는 것이 한민당(한국민주당)의 반응일 것이다.

한국민주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14일 기자단정례회견 석상에서 지난 14일 미국무장관보 힐드링의 연설을 부연하여 남조선에 조선인에 의한 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UN의 일원이 되어 그 정부가 조선 문제를 UN에 호소하여 남북 통일의 주동체가 될 것을 고대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3월 15일자)

힐드링이 명시해서 말할 것은 미군이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조선에 남아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용도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단독 정부 이야기는 없는데도 그런 취지를 넘겨짚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병준은 조선의 일부 언론이 의도적 편향 보도를 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승만이 국무부 민정 담당 차관보 힐드링을 만난 후, 국내 언론은 힐드링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는 밀약설을 퍼뜨렸다.* 이승만의 공보 고문 올리버조차 이승만이 사실을 왜곡했고, "그 유일한 목적이 한국 내의 자기 정치적 위치에 영향을 주는 데 있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힐드링은 1947년 3월 10일 미국은 한국 정부 수립까지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지만, 국내 언론은 이것을 단독 정부 수립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639쪽)


극우 세력의 의도적 곡해만이 아니라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고 있던 당시 상황이 그런 해석을 부추긴 면도 작지 않았을 것 같다. 3월 12일 트루먼의 의회 연설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4억 달러 원조의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돈의 힘으로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조선에 대한 원조 계획도 의논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틀의 해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전부터 복구를 위한 원조를 담당한 국제기구가 운라(UNRRA)였다. (1946년 8월 22일자, 12월 14일자 일기) 1943년 창설 때부터 1947년 유엔으로 업무를 넘길 때까지 운라가 모금해서 집행한 자금이 37억 달러였고 그중 27억 달러가 미국 출연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그 동안 별도로 140억 달러를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차관과 원조로 제공하고 있었고, 1948~1951년간에는 유럽에만 130억 달러를 마셜 플랜으로 집행할 참이었다. 이 시기 미국의 돈의 힘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단독 정부 방안을 기정사실화하기에 바빴다.

[워싱턴 22일발 AP합동] 30일 내지 60일내에 남조선 임시 독립 정부는 수립될 것이다. 그리고 미 문관 고등판무관이 군정장관에 대치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무성 대변인은 이승만 씨 언명은 단지 장차에 대한 이 씨 개인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3월 23일, 1947년 4월 15일자)

그리스, 터키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돈으로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미 정부 방침은 3월 25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차관의 발언으로 확인되었다.

[워싱턴 25일발 AP합동] 미 국무 장관 대리 애치슨을 트루만 미 대통령의 대 희, 토 원조안을 심의 중인 상원 외교문제위원회 석상에서 대남 조선 원조 계획에 관하여 여좌히 말하였다 한다.

조선을 통일시키려는 미 측의 모든 노력에 대하여 소 측은 비협조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만치 남조선을 경제적으로 건전한 지반 위에 세우기 위하여 미 측은 원조 자금을 부여하여야 할 것이다. 남조선 경제 재건에 대한 원조 자금의 부여 계획은 현재 국무·육·해군성 3성에 의하여 심의 중인데 이것은 조선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배려되고 있는 것이다. 미 측은 조선 통일을 위하여 소련과 합의를 얻고자 1년 유여나 노력하였으나 현재까지 이것은 실패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에 관해서는 중대한 문제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조선에 대한 필요한 원조 액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국 육 해 3성이 얼마한 액수이든 결정하는 대로 미 국회에 대하여 이의 승인을 요청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원 외교 문제 위원장 벤드벅은 남조선에 대한 원조 자금은 미의 대 희·토 원조와 동일한 성질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애치슨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고, 또 조선 원조안은 3년에 긍하여 6억 불 지출설이 떠돌고 있는데 금액 사용 용도 등에 관해서는 근근 의회에서 심의케 될 것이나 어쨌든 대 조선 원조안도 북반을 소군이 점령하고 남반을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조선이 공산주의 하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와 같은 신 대외 정책은 제3차 전쟁을 초래하자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유지하자는 견지에서 나온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7년 3월 26일자)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 미국에서도 조선에서도 널리 예측되었다. 이 전환은 조선인들에게 기대감도 주고 의구심도 주었다. 원조 제공과 민정으로의 전환 등 점령국으로서 책임을 철저히 하리라는 기대감이었고, 조선의 장래를 미국의 정책에 묶어놓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가장 큰 의구심을 모은 문제가 분단 정부 수립 여부였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정책 전환의 이유가 소련의 비협조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모스크바 3상 결정은 물 건너갔다는 말인가? 이제부터 미국이 소련과 의논 없이 남조선 발전을 도와주겠다는 것인데, 그 발전 중에 분단 정부를 향한 정치적 발전도 들어가는 것인가? 분단을 싫어하는 조선 민심을 알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미국 관리나 미군정 관계자들은 분단 정부 얘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러치 군정장관이 3월 27일 정례 기자회견 중 혀를 잘못 놀렸다. 통일 자주 독립 정부 수립이 미군정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러치의 말에 한 기자가 다른 자리에서 "남조선 대통령 선거"를 언급한 그의 발언과 차이를 지적하자 이렇게 말했다.

"통일 정부 수립을 의도하는 것과 남조선에서 민의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거하는 것과는 조금도 모순됨이 없다. 현재의 사태로서는 북조선까지는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고 남조선의 조선인과 미군이 협조하여 어떠한 정부의 형태를 갖추고 내용에 있어서도 그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행정면에 있어서 미인은 점차 후퇴하고 조선인이 대치되어야 하며 민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도 해야 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위선 남조선에만이라도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한 경제 재건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의 근본 목적은 물론 자주적 통일 정부 수립에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 협정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때 또는 해결될 희망이 없는 현하의 정세로는 부득이 다른 방법을 취해야 될 것이다. 즉 남조선만이라도 어떠한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여 조선 사정을 UN에 상정하도록 하여 남북을 통일하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8일자)


러치는 이틀 후 성명서를 발표해 이 발언을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 보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준비한 기록 없이 즉석에서 문답을 나누다가 오해가 생겼다는 것이다. 성명서 끝에 이렇게 강조했다.

"자주 독립 조선 건설을 위한 소련과의 협정의 효력은 아직도 유효이다. 우리는 국제적 의무를 회피할 의도는 조금도 없으며 우리는 자주 독립 통일된 조선 건설의 서약을 실행할 의도뿐이다. 요컨대 이것은 모스크바 협정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또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3월 30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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