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고 공화국'인가? 잠수함의 선실은 스릴러의 인기 무대다. 유사시에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은 비행기도 마찬가지지만, 잠수함은 더 폐쇄된 공간인데다가 거의 군사적 용도에만 쓰이기 때문에 위험한 느낌을 저절로 떠올려준다. 그런데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국의 핵잠수함이 인간의 작업장 가운데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통계 자료로 제시한다. 가장 위험하게 보이는 곳에 가장 사고가 적은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드러커는 핵잠수함의 운영 원칙에서 '사고'의 개념이 엄격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통상 사고라 하면 '인명이나 재산에 손실이 생긴 일'을 말하는 데 반해 핵잠수함에서는 '안전 규칙이 지켜지지 않은 모든 일'을 사고로 본다는 것이다. '사고 공화국' 국민으로서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는 지적이다. 사고의 대형화는 현대 문명의 어쩔 수 없는 추세다. 열차가 충돌하거나 비행기가 추락하면 한꺼번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고 열차와 비행기가 없던 옛날이 꼭 안전했던 것은 아니다. 맹수와 강도 등에게 위협받던 옛날 여행에 비하면 오늘날이 더 안전한 편이다. 다만 한 번 사고를 당하면 옴치고 뛸 여지가 없다. 타이타닉 호 사고는 아직 인간성이 그 속에서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비극'이었지만 이제는 '참극' 뿐이다. 본인의 잘못 없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길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현대인을 비참하게 만든다. 자동차 사고는 너무 일상화돼서 '달리는 흉기'라는 이름이 굳어져 있거니와 우리는 '날아다니는 흉기'에도 꽤 당해 왔고, 심지어 백화점, 교량까지도 흉기로 겪어봤다. 지하철 침수 사건은 천행으로 인명 피해가 없었지만 만일 당시 그 구간에 열차가 운행하고 있었다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버금가는 참화가 됐을 것이다. 10여 년 전의 홍수라면 고작 전답 유실이나 가옥 침수가 피해였지만 이제 걸핏하면 도시 기능이 위협받고 대규모 인명 피해까지 가능한 세상이 됐다. 물막이 시설이 불편하다고 멋대로 줄여놓은 것이 사고의 직접 원인이라 한다. 그런 무책임한 '설마'주의가 어찌 중랑천뿐이겠는가. 경제 사고도 마찬가지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회사 하나 넘어져도 예전과는 충격의 수준이 다른데, 나라 살림까지 설마설마 하면서 적당히 주무르다가 온 백성이 옴치고 뛸 길 없이 거덜을 내고 말았다. 드러커의 충고에 따라 매사에 핵잠수함 탄 것처럼 사고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겠다. (1998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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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에 '조그만' 사고가 났을 때 운영자들은 감추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도 핵발전소 운영 관계 법령은 선진국의 엄격한 기준을 베껴 왔기 때문에 실제로 별 것 아닌 조그만 이상이라 하더라도 엄중한 조치를 요구한다. 운영자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과도한 비용 발생을 막기 위해서도 사고를 감추거나 줄여서 보고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이 동기에 따라 사고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공작을 운영자들은 '보안' 조치라 한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핵발전소의 전체적 '안보'와 상치되기 쉽다는 모순이 있다. '보안'과 '안보'가 상치될 수 있는 것인가?
영어로는 보안이나 안보나 모두 'security'다. 그리고 이 단어가 보안 내지 안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내가 이용해 온 <브리태니커사전>(1987년 판)에 'security'는 '주식'이란 뜻으로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Wikipedia>를 찾아보면 "위험, 파괴, 손실 및 범죄로부터의 보호"라고 설명되어 있다.
오래 된 단어 'security'가 새로운 뜻으로 많이 쓰이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산업 사회에서 위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에너지 관리의 대형화와 기계 운용의 자동화로 인해 사고의 규모가 커지고 무고한 사람들의 피해 위험이 커졌다.
전통 시대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강도와 맹수 등의 위험에 대비할 책임이 일차적으로 여행자 본인에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행자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보험 드는 것뿐이다. 책임의 대부분을 항공사나 철도청 등 전문 관리자들이 맡는다. 관리자들은 안전 조치에 대해 전통 시대와 전혀 다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이 인식을 'security'란 말로 표현하게 되었다.
드러커가 소개하는 핵잠수함을 살펴보자. 승무원들은 핵잠수함에 적용되는 고급 기술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조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래서 설계자 등 전문 관리자들이 작성한 안전 수칙을 철저히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장 운영자의 재량 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핵잠수함의 안전 수칙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포괄적으로 작성된다. 그중에는 좀 어겨도 실제 문제가 없는 조항이 많다. 하지만 어느 조항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아는 승무원이라도 그 조항을 어기면 안 된다. 각자의 판단에 조금이라도 맡겼다가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래의 'safety' 개념을 넘어서는 이 자세를 표현하는 것이 'security'의 새로운 뜻이다. 안전 관리를 체계화한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security'의 현대적 의미 중에서도 '안보'가 '보안'에 비해 더 철저한 현대적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보가 전체 시스템의 안전을 목표로 하는 것임에 반해 보안은 특정한 대상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는 보안 의식이 충만한 반면 안보 의식은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안전 불감증'이란 말을 많이 해왔는데, '안보 불감증'으로 좁혀서 생각하는 편이 더 좋을 것도 같다. 여기서 '안보'란 국가의 군사적 안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안보, 환경 안보 등 사회의 안전을 지키려는 체계적 노력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다.
안보 불감증은 종속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몽골 간섭기에 고려의 국가 질서가 엉망으로 무너진 일이 생각난다. 정권의 안보가 원나라의 지지에 전적으로 걸려 있었기 때문에 사회 경제적 변화에 맞춘 국내 질서 확보 노력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그래서 토지 공개념 도입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왕조까지 바뀌게 되었다.
근대화의 기간 대부분을 통해 한국 사회는 정치적 종속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시대는 물론이고, 후반의 냉전기에도 독립국 행세를 제대로 못했다. 생각해 보면 100년 넘게 외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 몽골 간섭기 이후 처음이다.
장기간의 정치적 종속 상태는 경제, 문화, 기술 등 모든 분야에 종속성을 가져온다. 주한 미군 철수할까봐 벌벌 떨고, 성장 위주 경제 체제에 적응하는 데 몸과 마음 다 바치고, 미국 학문과 문화 수용에 절제가 없었던 것이 모두 절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크기의 국가 중에 그만큼 종속성이 강한 나라가 지금 세상에 많지 않다. 상대가 꼭 미국이라서가 아니라, 종속성 자체가 사회의 건강 기준으로 형편없는 수준이다. 경제적 안보도 문화적 안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회다.
고리 발전소 사고 은폐도 기술적 종속성으로 인한 안보 불감증의 한 사례다. 한국 핵 산업계가 기술적 주체성을 갖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내 기술로 발전소를 운영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면 아무리 조그만 사고라도 사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텐데, 미국 기술진의 청부업자로 자신을 여기기 때문에 눈치 봐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에도 인재(人災)의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례적 규모의 지진과 해일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천재(天災)의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단순히 인재의 요소만으로도 그 못지않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도의 체계적 노력이 필요한 현대 사회에 적응할 준비가 너무나 안 되어 있는 사회다.
핵발전소 사고 은폐는 몇몇 개인의 범죄 이전에 이 사회의 종속성과 안보 불감증을 고발하는 사건이다. 우리 사회에서 크게 잘못되는 일 중에는 당사자의 개인적 능력이나 도덕성보다 종속성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대마불사"를 외치며 무리한 사세 확장에 일로매진하는 풍조가 무엇에 바탕을 두었던가? 합리적 시장 원리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시장 외부 요소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민의를 총칼로 억누르는 쿠데타를 감히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어떤 믿음 때문인가? 민의의 뒷받침이 없어도 미국의 뒷받침만 얻으면 정권이 성립된다는 믿음이다.
"관습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헌법 '해석'이라는 임무를 벗어나 헌법 '제정'에 나선 헌법재판관들은 무엇을 믿었던 것인가? 이 나라 질서가 헌법이 아니라 금력과 권력 위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해 스스로 감당 못할 도발을 떡먹듯이 하는 정권은 무얼 믿고 그렇게 까부는 것인가? 북한 관계 안보의 책임과 권한이 모두 미국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역할은 '냉전 청부업자'에 그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 구조를 불안하게 만드는 부자-대기업 옹호 정책을 온갖 경고음을 무시하며 미련스럽게 밀어붙이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 나라의 질서가 무너져도 의지할 만한 외부 질서가 따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진 자들에게는.
어느 발전소의 사고 은폐 사건 하나를 갖고 너무 침소봉대한다고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현실 감각이 대한민국 사회의 종속 의식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 점검해 보기 바란다. 핵발전소처럼 엄청나게 위험한 물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어떤 변을 당할 수 있는지 강 건너 불로라도 구경하지 않았는가.
무력, 권력이나 재산, 신분 같은 '힘'을 가진 자들이 위에 열거한 것 같은 자세로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면서 어떤 피해가 쌓이고 있는지 힘없는 사람들이 충분히 파악하기 힘들다. 국가와 사회의 질서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문제든 힘 가진 사람들이 앞장서서 파악하고 해결하려 애쓸 때 그 집단을 '엘리트'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힘 가진 사람들 중 엘리트 노릇 제대로 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 그래서 어쩌다 안철수 같은 사람 보이면 모두 감동하는 것이다. 엘리트 노릇 제대로 못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이 사회에 팽배한 종속 의식에 있다. 권리와 함께 책임도 생각하는 '주인 의식'이 있다면 핵발전소 사고 같은 것을 감출 생각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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