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도 군정청 시정 개황을 2월 4일 공보부에서 발표했는데, 상무부의 무역 관계 시정에 관한 발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작년 중에 시작된 조선의 대외 무역에 관한 방침과 조직은 이제 비로소 완비되었다. 등록제와 면허제는 순조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며 대외 무역에 대한 전면적 이익도 점차 증가되고 있는 것이다. 금일까지의 무역은 그 대부분이 중국과의 그것인데 1946년 하반기에 있어서 지난 4개월 동안 매월 3000만 원의 수입과 1000만 원의 수출이다. 금년에는 조선의 상품이 세계 시장에 등장할 것이며 긴급히 필요한 물품이 조선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무역 업무가 1946년 중에 정비되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 전의 무역 활동은 밀무역일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간간이 밀무역선이 단속될 때 들여오는 품목이 술이나 사치품이라서 조선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어나곤 했었다. 무역 업무가 정비되면 무역 활동도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될 것을 사람들은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 초까지도 무역 활동의 제도적 기반은 잘 갖춰지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환율(당시 용어로 위체율)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물물 교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연초에 미국 방문 중인 유일한 조선상공회의소 회장의 발언에도 이 문제가 나타난다.
[샌프란시스코 2일발 AP합동] 당지에 도착한 조선상공회의소 회장 유일한은 신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약 15만 불 가격의 조선 물품이 근근 미국에 도착할 터인데 이 물품이야말로 장래 조미간의 통상 기초를 결정할 것이다. 조선은 장기간 일본의 기반 하에 있었고 또 전쟁으로 인한 통상 두절로 말미암아 현재 조미 간에는 정식 위체 환산율과 선박 운임이 결정되지 않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는 조선으로부터 텅스텐, 生絹, 흑연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필요한 기계, 화학품, 염료 등이 바터제로 교환된다면 용이하게 해결될 것이다. 하여간 조선 상태는 매우 염려할 바가 있으며 만약 생산이 촉진되지 않는다면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조선인은 차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인은 생산을 촉진시키면 능히 자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어업은 현재 어업을 장려시킬 설비가 없으므로 많은 지장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4일자)
2월 초에는 조선의 무역 분야에 관한 미국 각계의 견해가 AP 기사로 전해졌다.
"남조선 경제는 위태-외국 물자의 수입 초과로"
[워싱턴 4일발 AP합동] 미육군성과 협조하여 패전 일·독 양국의 무역을 육성시키고자 노력중인 미국상사회사는 조선 무역의 장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조선 경제의 육성 일책으로서 남조선 미 군정부의 중개로 수출되는 조선제 상품은 미 육군 당국의 합의를 얻어 당 회사가 미국 급 기타 각국에 매출케 될 터이며, 이로 인하여 획득한 외화는 조선이 필요로 하는 긴급 물자 수입 자금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의 수출 무역 진흥에 대하여 다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에 있어서는 아직 우리를 고무할 만한 전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 미육군성 민사국도 조선 경제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조선의 부자연한 정치적 분할, 원료 부족 급 숙련공 등의 결핍은 조선 수출 무역에 있어서 일대 장애가 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 경제의 현상은 수입 초과로 말미암아 위태에 빠지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맥아더 원수도 남조선 군정보고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파업 급 폭동은 남조선 경제 발전을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또 미국 중국 급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물품이 조선으로 수입되고 있는데 이 반면 조선으로부터 수출되고 있는 물품은 소량의 어류 급 흑연뿐이다."
한편, 목하 미국에 체재 중인 이승만도 조선 경제에 대한 남조선 미군정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미 점령군 당국이 조선인에 대하여 행동의 자유를 허용한다면 즉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양여할 때에는 남조선은 수출 무역에 있어서 많은 진전을 보일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5일자)
3월 8일 무역대책위원회가 한국무역협회를 통해 군정 당국에 몇 개 항의 건의를 제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12일자) 두 단체의 정확한 당시 위상은 파악하지 못했는데, 건의 중 제도에 관한 것으로 무역 대행 기관 설립, 무역업자의 자유로운 여행과 통신, 무역 금융 제도 등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3월 17일에 상무부 무역국장의 마카오 무역 개시 발표가 느닷없이 나왔다. 최만희 무역국장은 지난 1월에 무역 교섭을 위해 중국과 홍콩에 다녀왔는데,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1월 17일자) 당시에는 마카오와의 교섭 이야기가 없었다.
"조-마 간 무역로 개척!-인천에 긴급물자 500톤 입항"
17일 상무부 무역국장 최만희 발표에 의하면 조선의 대외 무역에 있어서 포도아 식민지 마카오와 개인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수일 전 마카오로부터 인천항에 4500톤이나 되는 대상선이 최초 무역선으로 입항하였는데 이 상선은 영국선 페리오드호로서 식염 2100톤, 생고무 45톤, 캐나다지(紙) 40톤과 기타 필수적인 긴급물자 500톤을 적재하고 왔으며 이 긴급 물자는 해외에서 다년간 무역에 종사하던 조선 실업가 수인이 조국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포도아령 마카오 정부로부터 정식 수출 허가를 받은 것이다. 외국에서 조선을 향하여 정식 수출 허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카오 정부는 정식 공문으로 군정청 상무부장 무역국장에게 조선과 마카오 간에 통상개시를 요청하였고 입항된 상선의 물물 교환에 대하여 최대의 편의와 협조의 제공을 의뢰하는 서한이 도착되었으며 여사히 조·마 간 무역로는 개척되었고 조선인 무역가는 개인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18일자)
부일장학회를 박정희에게 빼앗긴 일로 근래 다시 이름을 드러내고 있는 부산 실업가 김지태의 회고 중에 당시 마카오무역 실상의 한 모퉁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부산상공회의소 재건을 끝낸 이듬해 부산무역상조합을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마카오 무역선 하나가 부산에 입항하였다고 하니 1947년 봄의 일이다. 이 무역선이 "조-마 간 무역로 개척"의 계기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마카오의 물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와서 선을 보였기에 좋은 물건만 보면 "그것 마카오 제냐?"고 물을 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지는 몰라도, 일본이 어려운 전쟁을 치르느라고 실시했던 물자 통제 바람에 제대로 된 모직의 옷감 한 벌 구경도 하지 못했기에 농 밑에서 잠자던 옛것을 입고 다녀도 유달리 눈에 띄던 그런 시절이었으니 그랬겠지.
부산항에 배를 대고 상륙한 20명의 마카오 무역상과 우리 부산무역상조합과의 사이에서 상담이 벌어졌는데 내가 그들이 내놓은 선적 목록과 가격을 훑어보니 모직물이며 그 밖의 각종 직물을 비롯한 갖가지 잡화가 엄청나게 많기도 하였거니와 그 값이 또한 당시의 시가보다 훨씬 싼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네들과 주거니 받거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이 요구한 막대한 보증금을 나의 수표로 지불하고 매매를 성립시켰다. 그때의 그 보증금이 너무 많은 금액이어서 거래 은행에다 특별한 부탁을 해야만 나의 수표를 결제할 수 있었다.
(…) 물건을 우리한테 인도하기 위한 통관 절차를 밟으러 서울로 올라갔다가 수십일 뒤에 부산으로 내려온 그 마카오 무역상들은 부산에 닿은 그 길로 나의 상의 사무실로 찾아와서 내가 지불했던 보증금의 2배의 돈을 내 책상 위에다 놓으면서 앞서의 매매 계약을 해약한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약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울에서 물건 값을 놓아보았더니 나와 계약한 값의 3배 값을 치르겠다기에 서울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는 말이었다. 우리와의 약속을 어겼다고 하여 건네주었던 보증금의 배액을 가지고 와서 해약을 한다니 어찌 해 볼 도리도 없어 해약을 하게 되었다.
그 이튿날로 그 마카오 무역상들은 무역선을 인천으로 향해 돌렸거니와 정녕 놓치기 아까운 상품들이었다. 커다란 무역선을 마련하여 탐나는 물건들을 가득 싣고 부산항에 들어온 그 광경은 마치 쇄국시대의 첫 개항을 방불케 하는 일이라 부산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
그 사람들에게서 받은 그 많은 위약금은 그 중의 일부를 상공회의소의 회비에 충당하고 나머지를 무역상조합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합원들은 흥정 한 번 한 일도 없고 돈 한 푼 대는 일도 없이 적잖은 배당금을 받았던 터이라 자다가 횡재를 한 셈이었다. (<나의 이력서>(김지태 지음, 한국능률협회 펴냄, 1976년), 65-66쪽)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다. 상무국장은 식염, 생고무, 종이 등 '긴급 물자'를 상품 내역으로 발표했는데, 김지태의 회고에는 모직물이 대표로 나와 있다. 다른 배였다 하더라도 마카오 무역선이 사치품 아닌 '긴급 물자'만을 싣고 왔을 리는 없다.
마카오 무역상이 애초에 제시한 금액을 김지태가 그대로 받아들여 계약을 맺었는데, 서울에 가서 알아보니 그보다 3배 금액을 제시하는 바람에 위약금을 주고 취소했다고 한다. 조선의 물가가 마카오보다 3배 이상 비쌌다는 얘기다. 조선에는 물자는 없고 돈만 넘쳐났다는 것인가?
부산의 거물 사업가가 거래 은행에 특별히 부탁해서야 마련할 수 있었던 거액을 위약금으로 거저 받았다고 한다. 떡고물이 그 정도였다면 무역선 한 척에 얼마나 큰 이권이 걸려 있었던 것일까? 그 배 덕분에 누가 얼마나 큰 이익을 얻었을까?
당시의 정치 상황보다 경제 상황이 민생에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 큰 이권이 횡행하고 있었다면 그것이 정치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경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더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무렵 신문을 뒤지다가 '호남선 미군 강간 사건'(1947년 1월 9일자 일기)의 뒷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붙여 놓는다. 선고 내용의 "중역"이란 '징역'이 아니라 '중노동' 같다.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 범죄라도 드러난 것에 대해 이렇게 가볍게 넘어갔을 것 같지 않다.
"강간 안 되고 폭행만 성립-항간에 화제 일군 미군 능욕 사건"
한 때 전 민족의 분노를 사고 주목을 끄는 가운데 미군 당국에서 조사 심리 중이던 1월 7일 호남선 열차 안의 미군 강간 사건은 태산명동에 쥐 한 마리 잡은 격으로 증거불충분이란 이유로 의외에도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게 되었다.
재판은 서울심리원에서 10여 회에 걸쳐 피해자 김북향(29), 김금옥(30). 김월례(24)와 가해 미군 토미 R 크루스, 찰스 H 존스, 윌리엄 L 싱글턴 외 1명에 대한 사실 심리를 한 결과 미군사령부에서는 11일 다음과 같은 발표로써 판결을 선고하였다.
즉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고 다만 구타 폭행 등 죄로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어 미국 육군에서 단연 제명 처분을 받는 동시에 복역 중은 급료와 모든 수당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 즉 토미 R 크루스 중역 16개월, 찰스 H 존스와 윌리엄 L 싱글턴은 각각 중역 10개월이고 주니어 E 데이비슨은 무죄로 판결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12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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