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쥐를 '쥐'라고 부르지 못했던 그 때 그 시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쥐를 '쥐'라고 부르지 못했던 그 때 그 시절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태초에 검열이 있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겨울이 다시 오는 듯 싸늘한 봄비를 맞으며 최일구 앵커의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사상 초유의 지상파 3개 방송 동시 파업.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기시감. 20여 년 전 겨울, <경향신문> 기자이던 나는 건물 안에 머물러 있었고, 해직된 다섯 명의 선배들은 찬바람 몰아치는 거리에 있었다. 선배들이 나눠주는 유인물을 받아들고 신문사에 들어오면 국장은 그것을 낚아채 갔다. 신문사 망하는 꼴 보고 싶으냐, 너도 잘리고 싶으냐고 호통치는 국장. 고개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그저 유인물을 받으면 깊숙이 감추고 술타령이나 하는 것이 내가 했던 일의 전부였다.

1987년 시민 대항쟁 때 <경향신문>은 시위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관제 언론 화형식. 괴로워하던 선배들은 언론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 언론은 쟁취했지만, 경영이 문제였다. 권력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해서 갑자기 독자가 급증할 리도 없었고 기업들은 눈치를 보면서 광고를 주지 않았다. 신문사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고 위기에 빠진 신문사의 인수 협상에 나선 한 재벌은 핵심 인물의 해직을 인수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때 해직된 다섯 선배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 <프레시안> 발행인 박인규 씨이다). 권력도 하지 못한 일을 재벌은 별 힘 들이지 않고 해냈다. 내부 저항도 더 적었다. 저 '해직 5인'만 못 본 체하면, 우리 신문사는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실업자가 되지는 않을 수 있으리라는 심정이 지배적이었다. 그 이후 기자들은 그 재벌에 관련된 기사는 수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인수했던 재벌이 다시 <경향신문>에서 손을 뗀 뒤에, 어찌어찌 독립 <경향신문>이 굴러가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경향신문>을 떠나 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경향신문> 시절은 잊히지 않았다. 이후 검열 문제를 내 학문적 주제로 삼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는 필연적이었다. 특히 자본 검열과 권력 검열의 상관관계에 천착하는 논문은 <경향신문> 시절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선행 연구도 미비하고, 연구 자료도 부족한 상황에서(검열 관계 문서들은 대부분 비밀에 붙여져 있으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연구를 진행해왔다. 민주 언론을 위한 대열의 방관자였던 자로서 최소한의 죄 갚음이었다. <프레시안>에 검열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는 소회는 이렇게 복잡하다.

하지만 더 마음이 복잡한 것은, 20여 년 동안 악전고투로 진전해온 성과들이 다시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우리가 겪어내야 했던 무수한 언론 자유 위협의 징조들. 정연주 한국방송(KBS) 사장의 강제 퇴진, <PD수첩> 광우병 보도 사건, 미네르바 기소 사건, 김미화 씨 블랙리스트 사건, 병영 내 금서 지정 파문, '쥐 벽서' 사건……끝없이 국가 검열이 강화되는 이 시대착오의 사건들을 지켜보다보면, 기시감이 강력했다.

내가 직접 겪은 1980년대만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강제되었던 검열 수법들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어서이다. 식민화 직전 통감부에 의해 근대 검열이 시작된 지 100여년. 그동안 누가 어떻게 뭇사람의 입을 막으려 했고, 그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검열의 과거와 현재를 교직하는 일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겪는 일들을 좀더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 모자란 글이 파업에 나선 언론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란다. 당신들만 겪고 있는 고통은 아니다, 근대 이후로만 따져도 100년이 넘도록 지속된 싸움이며, 그때마다 누군가는 희생당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숨죽이면서 후일을 기약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종적인 승자는 여러분이 될 것이다.

오늘의 독립 언론 <경향신문>과 <프레시안>은 20여 년 전 누군가의 의지와 행동으로 시작되었다. 외롭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던 작은 시작이 큰 역사를 바꾼 셈 아닌가.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결정한 어떤 사람이 있었기에 地圖(지도)는 새로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결코 외롭지 않다. 훨씬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을 돌이키며 힘을 얻기 바란다.

끝으로 박인규 선배에게 20여 년 묵은 사과를 전한다.

한만수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 순천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문학 평론을 해오다가 검열 문제에 훨씬 더 큰 흥미를 느껴 그만두었다. '식민지 시대 출판 자본을 통한 문학 검열에 대하여' 등 검열 관련 논문 20여 편을 발표했으며, 현재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태초에 검열이 있었다

검열은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일이다. 권력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혀, 그 혀를 입 속에서 굳어져 버리게 만들려는 힘, 그리고 틀어막는 손을 뿌리치는 외침들이 그 단어 속에는 내장되어 있다.

젊은 세대들이라면 검열이란 이명박 정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병영 내 불온 서적 리스트 사건, 방송 출연 금지 블랙리스트에 이어, 국가보안법의 찬양 고무 죄 등 케케묵은 단어들이 강시처럼 부활한 것도 이 정부 들어서이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단어의 역사는 상당히 유구하다. 아니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그러니까 선사 시대부터 검열은 있었다.

바벨탑의 우화는 종교 검열의 상징일 터이며,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아마 세계 최대 규모의 검열 기록일 터이다. 요컨대 인류에게 언어가 생기고 권력이 생기자마자 검열은 탄생한 셈이다. 수식을 빌려 표현하자면 '언어+권력=검열'이니, '태초에 검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에는 종교 검열이 중심이었다면 근대에 들어서면 국가 검열로 이행했으며(교황청은 1966년에야 금서 목록 제도를 철폐하지만), 현대에는 점점 더 자본 검열이 문제가 되는 추세이다. 예컨대 신문과 방송은 광고주의 입김에서 점점 더 자유롭지 못하며, 트위터의 국가별 금기어 설정 방침 등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 검열은 국가 검열과 자본 검열이 중첩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이명박 정부는 또 한 가지 측면에서 한국을 퇴행시킨 셈이다. 자본 검열로 이행해가는 시대에 국가 검열의 '존재감'을 의연하게 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자본 검열이 국가 검열보다 견딜 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많은 현대 국가의 경우는 국가와 자본에 포위되는 최악의 양상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검열이 있으면 反(반) 검열도 있고, 검열 우회도 있다. 입을 틀어막는 힘 못지않게 필사적으로, 때론 불안해하고 때론 키득거리면서, 검열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자들은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쭉 존재해왔다. 금지된 것은 유혹이며 위반을 부른다.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러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야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러나 물론 죽고 싶지는 않으니 요리조리 검열의 망을 피해가면서, 해냈던 말들은 감동적이고 매력적이다.

발화 과정을 빼놓고 발화된 내용과 형식 자체로만 보더라도 그렇다. 오히려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때 나온 말들보다 더 매혹적인 경우도 많다. 금지를 뚫고서야 말할 수 있을 때, 금지자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야 할 때, 눈치 챈다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때, 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 바쳐 그 내용을 공교롭도록 꾸미게 마련일 테니까. 그렇게 획득된 형식이 내용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하니까.

우리의 혀는 왜, 음식 먹는 본연의 사명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기능을 발휘하다가 그 주인을 곤경으로 내몰곤 하는가. 누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금지하고자 했고, 누가 금지를 왜 어떻게 우회하여 말하고자 했던가. 10여 년 동안 검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오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이 글은 일종의 '뒷담화'이다. 뒷담화를 쓰는 일도 나에게는 검열의 위반이다.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고들 하니까. 소위 '잡글'을 쓰는 순간 '잡놈'처럼 취급받게 되니까. 하지만 논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뻔히 보이는 것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논문에서는 말하지 못한다. 증거가 없는 이유는 자료가 없기 때문인데, 검열 권력이란 자신의 행위를 어둠 속에서 이루기를 좋아하므로 대체로 자료가 부족하다.

인멸된 증거를 대라고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검열을 위반하고자 했던 다양한 사례들 또한 더없이 흥미롭지만, 논문은 그 사례들을 충분히 보고하기에 적절한 형식이 못된다. 무엇보다도 논문을 읽는 독자는 그야말로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이발사가 아니라도 '당나귀 귀'를 외치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마도 그래서이겠지만 읽는 이도 극소수에 불과한 논문들. 단지 대학 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그런 글에만 매진하는 일은 재미적은 일이다. 그런 뜻에서 '뒷담화'를 시작한다. 물론 논문 같은 체계를 갖춘 글이 아니라 횡설수설이 되겠지만 나는 그 횡설수설에 흥미를 느낀다.

친구와 나누는 수다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것도 없다. 수다를 떨 때 내 혀는 자유롭고 내 귀는 쫑긋거린다. 부디 내 횡설수설이 독자들에게 친구와의 수다처럼 귀 쫑긋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면 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