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역시, 멀쩡해보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미쳐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 '정권 교체'니 '야권 연대'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체 그게 뭐야?"라고 눈을 치켜뜨다가 "그건 바로 탈핵 연대"라고 하면 아연한 표정이 된다.
틀림없이 '한가한 소리하고 자빠졌다'며 노골적으로 비웃는 이도 있을 테다. "탈핵도 물론 중요하긴 한데 일단 선거에서 이겨야…"라고 말하며 고개를 모로 꼬는 이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진지하게, 또렷한 정신으로, 한 번 더 명확히 이야기한다. 정권 교체, 야권 연대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게 탈핵 연대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후쿠시마 사고를 느끼는 정도는 개인마다 다를 테지만, 확실한 건 이 사고가 단지 일본이라는 한 국가의 재난을 넘어선 문명사적 위급 사태라는 점이다. 체르노빌의 재앙을 능가한다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에게 끼친 전체 피해는 아득한 산출불가능의 영역에 있다.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지역은 아직도 불모의 땅이며, 지금도 매년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피해 복구의 명목으로 그 땅에 뿌려지고 있다. 그린피스가 체르노빌 참사 20주기를 맞아 유럽의 보건의료 전문가 그룹이 참가한 대규모 건강 피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이 70년간 지속되어 벨로루스에서만 21만420명, 기타 국가들에서 71만660명이 사망하여 모두 93만80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됐다. 또 갑상선암은 2056년까지 모두 13만7천 건, 유방암 등 고형 암(solid cancer)은 12만3000건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
후쿠시마가 앞으로 만들어낼 피해의 규모는 그 이상일 것이다. 2011년의 인류는 "원자력 에너지는 값 싸고 깨끗한 에너지"라는 미사여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를 실시간으로, 그것도 수많은 생명을 제물로 바치면서 지켜보고 있다. 재일 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은 핵발전소 사고 직후 <후쿠시마를 걸어서>라는 NHK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 가장 가까운 미나미소바로 갔다.
거기서 그는 폐허로 변한 성장 지상주의의 욕망과, 재앙마저 전체주의화하려는 국가의 폭력을 본다. 미나미소바 해안의 거대하고 고요한 쓰레기더미 앞에서 그는 끝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소모해온 우리의 안락한 생활이 사실은 '초현실'이었으며 엄청난 방사선이 유출되며 죽음의 공간이 된 후쿠시마의 기괴한 풍경이야말로 리얼한 '현실'이라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지금 한국인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일본의 사고를 웃으며 입에 올리거나 혀를 차며 동정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가당찮은 일이다. 한국은 핵발전소를 21기나 떠안고 있는 나라다. 핵발전소 사고 위험이 상존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의 핵발전소 운영 실태에 심각한 우려를 보여 왔고, 한국이 핵발전소 사고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입이 닳도록 강조해왔다.
최근 지질학계는 "울산 앞바다와 백령도 근처, 속리산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5 이상의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홍태경, 대한지질학회 지진포럼)"고 발표했다. 지진 방재가 일본에 비해 훨씬 취약한 한국에서 핵발전소 근처의 대규모 지진이 어떤 결과를 발생시킬지는 명약관화하다. 글자 그대로 '파국'이 덮쳐올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피해 상황을 제대로 모니터할 역량이 되는지, 그리고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려 할지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이 한반도에 유입될 수 있다는 국립환경과학원의 실험 결과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환경부는 "방사성 물질이 저농도이지만 한반도에 날아오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국정원이 대외비를 요청해서 결과를 폐기했다"고 밝혔다. 핵발전소라는 문제 앞에서 한국이란 사회는 보면 볼수록 최악의 위험 사회이다. 핵발전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서구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후쿠시마 사고는 강 건너 불이기는커녕 지금 우리 발목까지 지글지글 태우고 있는 '발등의 불'이다.
'핵 마피아와의 전쟁' 당장 시작해야
핵 발전은 위험하고 더럽고 비싸기까지 하다. 심지어 "태양광 발전보다 핵 발전이 비싸지기 시작했다." (☞관련 기사 : "한국의 원자력 마피아 그 실체를 파헤친다") 그런데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에도 왜 한국이란 나라는 탈핵은 고사하고 핵발전소를 더 짓겠다고 저리 나서는가.
제 이해관계가 걸린 세력이 기세 등등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원자력 마피아', '핵 마피아'라 불리는 자들이다. 지식경제부, 한국수력원자력, 원자력문화재단, 현대건설 등 정부, 공기업, 싱크탱크, 건설 업체 등 요소요소에 '깨알같이' 포진해 있는데, 다른 누구보다도 지금 대통령으로 있는 이명박이 바로 핵 마피아다.
그는 현대건설 사장 출신으로 한국에 존재하는 핵발전소 21기 중 12기를 건설하는 데 관여했을 뿐 아니라, 후쿠시마 사고 직후에 '일본이 주춤할 테니 한국이 핵발전소를 다른 나라에 더 팔아야한다'는 식의 발언을 태연히 뱉었던 화려한 전력만 보더라도 핵 마피아의 '수괴급'이라 할 만 하다.
앉아서 이명박 욕을 하긴 쉽다. 편한 말로 '개나 소나' 이명박 욕을 하고 다니는 요즘이 아닌가. 마치 그게 진보인 양 '완장질'하고 다니는 인사들은 바가지로 퍼도 모자랄 정도로 차고 넘친다. 문제는 이명박이 물러나고 정권 교체가 된다하더라도 핵 마피아는 일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이건 사람 몇몇 교체하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재생산구조이기 때문이다. 돈 코레오네를 감옥에 보내도 장남이, 차남이, 조카가, 손자가 라는 식으로 그를 대체할 마피아는 끝없이 나오게 되어 있다. 뿌리를 잘라내려면 핵 마피아가 뜯어먹고 싶어도 뜯어먹을 게 없도록 한국 사회의 에너지 소비 구조를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적어도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모범적인 탈핵 노선을 실천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독일처럼, 일정 기간을 두고 핵발전소 가동을 하나씩 중단하면서 대안 에너지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로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국민들도 어느 정도 부담을 져야 한다. 일본에너지경제연구소는 현재 일본에 있는 54기의 핵발전소를 화력 발전으로 대체할 경우 한 달 평균 전기 요금이 18퍼센트 남짓 늘어난다고 예측한다.
21기의 핵발전소를 가진 한국 역시 핵발전소의존도가 일본과 유사한 수준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전기 요금 인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기업에 비정상적으로 싸게 전력을 공급하고 그 부담을 가정에 지우는 형태인 지금까지의 전력 수급 정책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당장의 부담에 대해서는 시민적 합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핵 마피아와의 전쟁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다. 어디가 '전선'인지를 명확히 그어야 한다. 피아식별이 안되면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안전한 핵에너지는 없다'는 대전제를 공유해야 한다. 이 대전제에 있어서만큼은 '절충'과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잘 관리하면' '안전 기준을 강화하면' '좀 더 첨단의 시스템을 갖추면'이라는 식의 모든 타협들이 지금껏 핵 발전이 걸어온 길이었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다. 지난 수십 년의 재앙과 비극을 통해 이러한 '점진적 합리성'에 단호하게 맞서는 것 외에 그 어떤 대안도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소위 진보 또는 개혁이라 불리는 현실 정치 세력이 힘을 합쳐 '탈핵 연대'를 구성해야 원자력 마피아를 뿌리 뽑을 수 있다.
만약 2012년 선거 국면에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한 탈핵 연대가 결성되고 실제로 탈핵 프로세스를 밟아나가게 된다면, 단언컨대 오늘의 정치가 미래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주의해야하는 건 '이명박이 핵 마피아니까 정권교체하자'는 식의 선동이다. 이런 선동으로 재미 볼 세력은 정해져있다. 그런 선동으론 100년이 지나도 탈핵은 불가능하다.
▲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과연 '탈핵 연대'의 의지가 있는가? ⓒ뉴시스 |
그런데 불길한 '징조'가 언뜻 보였다. 3월 10일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소위 '야권 연대' 정책 합의문 얘기다. 아무리 살펴봐도 '탈핵'이 빠져 있다. 부속 문서에 "핵발전소 추가 건설을 중단하며 핵발전소정책을 전면 재검토한다"는 딱 한 문장이 들어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론 "관성적인 야권 연대"라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앞서 녹색당과 진보신당은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핵발전소를 폐쇄해야 한다는 정책을 발표했고, 통합진보당 역시 2040년까지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한다는 공약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은 야권 연대라는 미명 하에 손바닥 뒤집듯 탈핵의 원칙을 후퇴시켜버렸다. 핵발전소 정책 전면 재검토라니, 그 정도는 새누리당도 할 수 있다. '검토'를 누가 못하나.
아직 늦지 않았다. 모든 야권 세력은 탈핵 연대의 깃발 아래 모여야 한다. 당신들이 늘 떠들어대는 '새로운 정치'가 바로 이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번 선거에서 유일한 '새로운 정치의제'일지도 모른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가장 첨예한 전선들이 지금 밀양, 영덕, 삼척에 있다. 핵 발전을 둘러싼 갈등과 적대가 본격적으로 발발한 지역이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 칼럼은 <프레시안> 게재 후, 최근에 시작한 팀 블로그 '리트머스'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바로 가기 : 리트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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