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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군'의 허실을 보여준 그리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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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군'의 허실을 보여준 그리스 내전

[해방일기] 1947년 3월 12일

1947년 3월 12일

65년 전 오늘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미국 대외 정책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했다.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의 승인을 요청하는 연설이었는데, 이 연설이 제시한 노선에 '트루먼 독트린'이란 이름이 붙고 미-소 간 냉전의 출발점으로 알려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유럽 열강에 뒤처진 2류 국가였던 미국과 소련(러시아)이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양대 슈퍼 파워가 되었다. 두 나라는 연합국을 이끌고 추축국과 싸우는 동안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공동의 적이 없어진 상황에서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적대 관계로의 전환점이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의회 연설에서 트루먼이 "이제부터 소련을 적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보호하는 데 미국의 국력을 쓰겠다고 한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무장 소수 집단이나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 인민을 보호한다고 트루먼은 말했다. 그리스와 터키와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소수 집단"이고 소련이 이끄는 공산 진영이 "외부의 압력"이었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고립주의(isolationism)는 강력한 전통이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강대국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거부하기 위해 19세기 내내 고립주의를 제창해 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1류 열강으로 발돋움하면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에 눈떴지만, 외부로부터의 간섭도 외부에 대한 간섭도 최소화한다는 고립주의 전통은 제2차 세계 대전 후까지도 많은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의 1차적 의미는 고립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에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을 직접 촉발한 그리스-터키 사태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제부터 펼쳐질 냉전의 기본 구도를 이 사태의 성격에서 많이 알아볼 수 있다. 터키 사태에 관해서는 많이 조사하지 못했고, 그리스 사태의 성격을 정리해 본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의 재고 화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다 폭발해 버리지 않았다. 민족 간 갈등이 풀리지 않고 있는 위에 공산주의의 대두가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 지역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한 한 가지 이유는 공산 혁명을 통해 민족 간 갈등을 극복할 희망에 있었다. 이 희망을 대표한 사람의 하나가 티토였고,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체제를 만든 것은 발칸 지역 전체를 하나의 공산주의 연방으로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발칸 여러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자국 민족주의자들에게 '매국노'로 지탄받은 것이 이 발칸 연방의 희망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리스 공산당은 마케도니아 소수 민족에게 독립에 준하는 자치권 부여를 주장함으로써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이 분노를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더 심화, 확대시킨 것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전쟁 정책이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은 코민테른 회원들에게 추축국에 협력할 것을 권고(또는 지시)했다. 그리스 공산당은 1940년 10월 이탈리아군 침공에 임해 민족의 입장에 서서 자기네를 탄압해 온 메탁사스 군사 정권의 항전에 협조했다.

그러나 이 시기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문서 중 추축국과의 협력을 명시한 것이 있어서(일부는 반공 정권이 조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전쟁 후 공산당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1941년 6월 소련과 독일의 개전 때까지 추축국과의 협력 여부를 놓고 발칸 지역 공산주의자들이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독-소 간 전쟁이 시작되자 발칸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추축국에 대한 전면적 항쟁에 들어갔고, 여러 나라에서 항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다. 티토의 공산 게릴라는 우익 항쟁 세력인 체트니크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노선을 취했다.

하나는 피해를 무릅쓰고 적극 항쟁에 나선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세르비아인만이 아니라 여러 민족의 연합 전선을 편다는 것이었다. 티토의 노선이 전쟁 수행에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미워하는 처칠도 그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도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EAM)과 그리스인민해방군(ELAS)이 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EAM과 ELAS는 국내에서 민족주의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영국은 카이로에 망명한 우익 정권을 지원하며 그리스 안에서도 ELAS와 경쟁하는 우익 항쟁 세력을 키워주는 데 주력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공산 세력을 지원한 반면 그리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짐작컨대, 지중해 제해권 유지에 필요한 그리스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독일군은 1941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대 소련 개전은 발칸 점령 작전이 예상 외로 힘들었기 때문에 원래 생각보다 몇 주일 늦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의 저항이 제2차 세계 대전 전개 방향에 매우 큰 작용을 한 셈이다. 그 작용이 크든 작든 발칸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쟁 후 스탈린의 정책에 발칸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티토가 1948년 스탈린과 결별한 배경에도 이 배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은 티토보다도 더 처절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독일군이 발칸 반도에서 철수하고 있던 1944년 9월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처칠과 소-영의 영향권 구획에 합의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의 업적과 세력이 큰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인정했는데, 이것은 루마니아처럼 공산당 세력이 약한 곳을 위성 국가로 만드는 데 대한 반대급부로 이해된다. 공산 세력이 약한 루마니아의 공산화와 공산 세력이 강한 그리스의 반공국가화가 소련의 이해관계에 맞춰 교환된 것이다.

독일군 철수 당시의 그리스 상황을 <Wikipedia> "Greek Civil War" 조에서 옮겨놓는다.

1944년 여름까지는 독일군이 곧 그리스에서 철수하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 저명한 자유주의자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망명 정부는 본국 귀환에 대비해 이탈리아의 카세르타로 옮겨왔다. 1944년 9월의 카세르타 협약에 따라 그리스의 모든 저항 세력은 영국 장군 로널드 스코비의 지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10월에 연합군이 그리스에 진주할 때 독일군은 철수에 바빴고, 국토의 대부분은 빨치산의 손으로 해방되어 있었다. 10월 13일에 아직도 독일군 점령 하에 있던 유일한 지역인 아테네에 연합군이 입성했고 6일 후에 파판드레우 정부가 돌아왔다. 국왕은 카이로에 남아 있었다. 왕정의 존속 여부를 국민 투표에 붙일 것이라고 파판드레우가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빨치산 세력이 국토를 장악하는 데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다. 독일군 철수에 따라 빨치산은 시골만이 아니라 도시들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정권을 세우려 하지 않은 것은 공산당 지도부가 소련으로부터 받은 지령 때문이었다. 연합국의 협력 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스탈린의 거시적 전후 목표를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그리스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파판드레우 정부와의 충돌을 극력 회피했다.

이 협력 관계 위에서 공산당원 여섯 명이 파판드레우 중심의 '거국 내각' 각료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 정부의 ELAS 해산 명령으로 인해 공산당원 각료들이 퇴진하고 충돌이 시작되었다.

ELAS 전투 병력은 종전 당시 10만 명이 넘었고, 우익 저항 세력은 2만 명이 안 되었다. 공산당 측은 양쪽 군대를 동시에 해산하자고 제안했지만 스코비 장군은 ELAS만의 해산을 고집했다. 10일 내에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을 스코비가 발표한 직후인 12월 3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경찰의 발포로 28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아테네 시가지에서 37일간의 전투상태가 시작되었다. 이 '데켐브리아나(12월 사태)' 동안 다른 지역의 ELAS 병력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영국에 적대하지 말라는 스탈린의 지시 때문에 민족 해방 전선 지도부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사태는 1945년 1월 15일까지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다음 달 여러 그리스 정당과 연합국이 맺은 바르키사 조약에 공산당도 참여했다. 모든 군사 조직의 해산, 정치범 사면, 왕정 존속 여부의 국민 투표와 총선거의 실시 등을 규정한 조약이었다. 공산당은 평화로운 수단에 의한 '인민 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바르키사 조약의 실행 방법이 불공평했다. 1년 동안 공산주의자 등 1000여 명이 백색 테러에 목숨을 잃었고 ELAS 출신 등 약 4만 명이 투옥되었다. 빨치산 활동 중 일반범죄에 해당되는 것이 있어서 '정치범' 사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공산당은 1946년 2월에 무장 투쟁의 재개를 선언하고 다음 달의 총선거를 거부했다. 총선거에서는 당연히 반공 정권이 탄생했고, 반년 후의 국민 투표로 왕정도 회복되었다.

그리스 공산당의 투쟁 노선은 소련과 서방 사이의 관계 악화 되에야 나올 수 있었다. 소련군의 이란 철수 문제로 긴장이 일어나고 처칠이 "철의 장막"이란 말을 꺼낼 때였다. 국내의 항쟁 세력은 1년간의 탄압으로 괴멸되어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등 이웃나라에 피신해 있던 약 5000명의 빨치산 병력이 재개된 항쟁의 주축이 되었다.

3년간 계속된 '그리스 내전'에는 스탈린과 티토의 입장 등 더 살필 것이 많이 있는데, 오늘은 내전의 배경을 살피는 데 그치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다만 우선 밝혀둘 것은 1947년 초까지 8700만 파운드를 그리스 지원에 투입한 영국이 더 이상의 재정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미국의 역할 승계를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3월 12일 트루먼의 의회 연설은 이 요청에 응한 것이었고, 의회는 4억 달러의 원조를 승인했다. 마셜 플랜의 제안보다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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