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급기야 미군은 공병대를 동원해 도쿄 이화학연구소에 들이닥쳐 입자 가속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5일에 걸쳐 파괴된 입자 가속기는 도쿄 만에 버려졌다.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는 "이것은 내 10년의 삶, 그 자체"라며 울분을 토했다. 실제로 입자 가속기는 더 이상 위험한 연구 장비가 아니며 "농림업과 의학 치료 분야 등 새로운 연구를 통한 민생 안정"을 목적으로 쓸 수 있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분노를 표명해 워싱턴 군사 당국은 유감 성명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패전국의 과학자들이 입은 상처는 지워지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점령기가 끝나고 1950~60년대 일본 전역이 '원자력 르네상스'에 흠뻑 빠졌을 때, 많은 과학자들의 머릿속엔 미국과의 과학전에서 패배했다는 굴욕감과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설명이 무리도 아니다.
이 일화에서 핵으로 시작되고 유지된 미일 관계의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의 저자 존 다우어는 미국에 의해 적국 일본이 동맹국 일본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이보다 더 긴장감 있고 예측 불가능하며 애매모호할 뿐더러 혼란스러운 예를 찾기 힘들다"고 했는데, 그건 비단 패전 직후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침묵의 함대>는 극우 만화?
▲ <침묵의 함대>(전 32권, 가와구치 가이지 지음, 서울문화사 펴냄). ⓒ서울문화사 |
일본인(물론 본인들은 '야마토 인'이라고 주장하지만) 76명이 제멋대로 명령을 어기고 바다의 불안을 조장한다며 미국은 강도 높은 압박을 건다. 테이블 위에선 "일본 재점령 계획"을 꺼내며 바다에선 전략 핵잠수함을 동원해 격침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만화 속에서 야마토와 함장 가이에다는 신적인 존재기에 만고를 이겨내고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의 항으로 향한다.
핵잠수함을 탈취한 가이에다는 왜 '세계 평화'를 외치며 유엔 총회에 서고자 하는가? 그는 자신들의 목적이 일본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초국가적 핵잠함대를 만들어 세계를 하나로 묶는 데 있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다. 야마토를 비롯한 핵무기를 보유한 전 세계 전략 핵잠수함을 국가에서 독립시켜, 핵무기 미 보유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평등하게 핵 보복력을 제공함으로써 지상 전력으로 핵을 소유할 필요가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처음에는 "핵 테러리스트에게 세계를 맡길 수 없다"고 맞섰던 미국 대통령은, 결국 '세계 정부'와 '바다로부터의 침묵의 안전 보장'이라는 가이에다의 구상에 동의하게 된다. 마지막은 바로 세계에 이 두 안건을 묻는 유엔 총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유엔 총회에 출석해 장엄한 연설을 마친 가이에다는 테러리스트의 저격에 의해 뇌사 상태에 빠지지만, 그 심장 소리마저 '특종'으로 방송되는 메시아급 스타가 되어 전 32권의 무대를 내려온다. 그가 남긴 "독립하라"는 메시지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지며 이야기는 끝난다.
1988년 고단샤의 <모닝>을 통해 1996년까지 연재된 이 만화는, 엄청난 인기를 누린 동시에 최근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본인 함장이 미일이 공동 제작한 핵잠수함을 탈취해 '독립'을 선언하고, 붙인 이름이 하필이면 '야마토'였으며, 여기에 도발한 미국이 재점령 계획을 거론하는 전반부까지는 누구나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욕을 거론했다. 한 평론가가 작가 가와구치 가이지를 현대의 미시마 유키오라 빗댔다는 평가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 만화 팬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뒤로 갈수록 극우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주장은 모습을 감춘다. 대신 냉전 이후 전 세계가 핵 폐기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근대 국가 체제로 세계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열도 규모'를 뛰어 넘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만화를 둘러싼 일본 웹사이트상의 논쟁에서 한 팬은 "마지막의 세계 정부 구상은 냉전 종결에 의한 칸트적인 국제주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그 수준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가이에다, 미국 대통령을 사랑하다?
<침묵의 함대>를 읽는 동안 "그거 극우 만화 아냐?"라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야마토가 주장하는 게 결국엔 '민족 자결권' 같은 게 아니라 '국가 없는 세계'이니 그 질문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품을 읽는 데 방해가 된 건 작가의 정치적 주장이 아니라 약간의 지루함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성 등장인물이 한 명도 없는(한 명이 나오기는 한다….) '남자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고, 최강 잠수함들이 등장하는 전투 신에 혀를 내두를 수도 있겠다. (여기엔 잠수함의 전력이나 전투 신의 묘사가 비현실적이라는 논쟁도 존재한다.)
내가 재미를 느낀 건 가이에다의 국가를 뛰어넘는 이상과 무관하게 곳곳에 엿보이는 '일본에게 미국은 무엇이었나'를 보여주는 대목에서다. 이 만화가 '미국' 그리고 '미국 주도로 돌아가는 세계 질서'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드러난다. 특히 야마토가 일본에 군사 동맹을 요구하며 도쿄 만에 입항하는 과정에서 무능한 일본 정치가 세계 평화란 공동 목표를 향해 들불처럼 타오르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명백히 에도 막부 말기 미국 흑선에 의한 개항을 떠올리게 한다. 야마토가 일본의 속국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이 되지 않음을 명백히 한 뒤에도 '미국을 대신해 세계의 경찰이 되려는' 혹은 '미국 주도의 질서를 재편성하려는' 목표는 사라지지 않는다. 야마토의 비전은 계속해서 미국의 비전과 조응되며, 가이에다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은 종교적인 사랑과 존경, 경외를 띠고 있다.
만화에서 주인공 가이에다의 가장 큰 상대역은 미국 대통령인 니콜라스 베네트이다. 베네트와 가이에다는 처음의 적대 관계에서 기묘한 우정 관계로 발달하며, 결말의 유엔 총회에선 베네트가 맞을 수도 있었을 저격수의 총알을 가이에다가 몸을 던져 방어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핵을 만들고, 핵이 가이에다를 만들었네. 그리고… 가이에다가 베네트를 만들었어"라는 대사처럼 미국 대통령의 성장물로 읽히는 대목도 있다.
따라서 다소 과장되긴 하지만 흥미로웠던 일본 독자의 반응 중 하나는 이 만화를 '미국에 대한 애증 관계'로 해석한 글이었다. 글쓴이는 "이 만화는 일본이 미국으로 보내는 스토커적인 러브레터일지도 모른다"며 "그렇지 않고선 미국과 싸우는 테러 군단을 그린 만화가 종국엔 '러브 앤 피스 만세' 따위의 히피식 감정을 노출하고 존 레논 찬가로 끝난다는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다"며 다소 과격하게 조롱했다. 거기다 <침묵의 함대>의 BL물(Boy's Love) 동인지가 대부분 '가이에다♡후카마치(가이에다와 해상 자위대 동기로 주요 조역 중 한 명이다)' 커플을 다루는 것에 빗대 이 만화의 진정한 커플은 '가이에다♡베네트'라고 적기도 했다.
사실 이 뭐라 할 수 없는, 미국에 대한 애정도 동경도 적대도 복수심도 아닌 복잡한 감정은 일본에서 지구, 우주 규모로 쏟아진 수많은 '대작'들의 공통 테마이기도 했다. 그것이 <침묵의 함대>에서는 단순히 일본인(혹은 일본에서 온 혁명가)이 미국인을 이기거나 파괴하고 싶은 욕망을 넘어, 미국이 주도한 세계 질서에 근본적인 진동을 일으켜 결국 그들을 지도하고 싶은 욕망으로 표출된 것이다. 과도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야마토가 이 세계에서 진정한 '평화주의'를 설파한 최초의 국가라는 자의식 속에서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경험을 '유일 피폭국 신화'로 치환시켰던 일본이 어른거린다. '이제 미국의 패권주의는 통하지 않아'라는 단순한 주장일 수도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복잡하게 보이는 걸까?
일본의 '반미 내셔널리즘'
'일본에 있어 미국은 무엇이었나'란 관점에서 <침묵의 함대>를 관찰하다 보면 상당히 긴 설명이 따르게 된다. 그 관계는 일단 "한쪽 발로는 태평양 한가운데를 다른 한쪽 발로는 중국 내륙을 딛고" 불가능한 망상에 도취되어 있던 일본이 히로시마의 버섯구름과 함께 모든 것을 잃는 데서 시작된다.
괴물처럼 아시아를 먹어 삼키던 일본은 1945년 8월 새롭게 시작된 '미국의 세기'로 진입했고, 손발이 묶인 채 그들이 지도하는 민주주의 혁명을 '배급' 받았다. 그야말로 "패배를 껴안고" 시작된 6년 8개월에 이르는 연합국(사실상 미국)의 점령은 이후의 일본 헌법, 외교, 사회, 정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일본을 넘어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는 요소다.
그리고 현재를 보자. 패전으로부터 66년이 지난 지난해 3월 11일 일본에 '두 번째 전후'라 불리는 시기를 맞게 한 거대한 재앙이 닥쳤다. 즉시 미군은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친구 작전'을 펼쳤고 핵 전문가를 대거 파견하는 등 전 방위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이 모습은 어느 일본 언론인의 표현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패전 부흥을 주도한 미 진주군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지난달 말 일본의 제1야당인 자민당이 개헌론을 들고 나왔다. 개정안엔 현재 단순한 '국가 상징'인 천황을 '실질적인 국가 원수'로, 자위대를 자위군으로 바꾸자는 내용이 포함됐다. 최근 폭발적인 지지를 얻는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는 전쟁 포기를 명시한 '헌법 9조'를 국민의 의사를 물어 폐기하자는 좀 더 센 개헌론을 내놨다.
천황이 국가 원수에서 상징적 존재로 남은 것, 그리고 '전쟁 포기'를 국가의 최고 법으로 명시한 것은1946년 11월 3일 공포된 현행 헌법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패전 후 어떤 전력도 보유할 수 없었던 일본에서 후에 자위대가 되는 '경찰 예비대'가 창설된 것은, 냉전 속 사회 안정이 시급했던 미국의 결정이었다.
요컨대 위의 개헌론들이 미국의 점령 속에서 이루어진 전후 헌법, 전후 민주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언뜻 후쿠시마 위기 상황 이후 갑자기 부활한 내셔널리즘인 것 같지만 사실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잊을 만하면 있어 왔던 몸부림이다.
한국 '극우'의 이미지는 비교적 뚜렷하다. 인공기를 찢고 성조기를 흔들면 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성조기를 별로 소중히 하지 않는 이들의 입장은 대부분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우리의 핵을 갖자'는 움직임이나 헌법 9조 폐기, 군대 보유 등의 주장으로 이어져 오히려 주변국의 긴장을 더욱 높이는 불안 요소가 되어 왔다. 물론 3년 전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아시아 중시 노선을 걷느라 미국과 마찰을 일으켰을 때 국민적인 불안 증세를 보인 데서 알 수 있듯, 여전히 일본의 다수는 점령기부터 이어진 미국 주도의 안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인듯 보인다. 어쨌든 그대로 두는 것도 껄끄럽고 바꾸는 건 더 껄끄러운 일본 정치외교의 난맥상이 드러난다.
문제는 오로지 미국, 미일 관계다. 오죽하면 일본 외무성의 위상은 미국 국무부 도쿄 사무실이란 이야기까지 나오겠는가. 이런 사정은 일본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도 결부되어 있어서,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마저 태평양 전쟁의 성격 중 하나가 "미국 등 열강에 맞선" 일본의 "항쟁"이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반미 내셔널리즘이라는 전쟁관이 일본인의 관심을 미일 관계라는 협소한 영역으로 제한시킴으로써, 결국 아시아와의 관련성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풍요로움 대신 긍지를 잃었다?
패배와 점령기라는 선물이자 굴욕을 거쳐 너무나 미국적인 비전 속에서 세계 정치의 '조역'에 만족해야 했던 일본은 부단히 그 역할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해 왔다. 그러나 결국 군사력으로 짜이는 질서의 원칙 속에서 그 유혹의 끝은 더 위험한 핵 야욕과 반미 내셔널리즘으로 치달았다. <침묵의 함대>가 세계 평화라는 이상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주인공들의 얼굴이 편치 않아 보이는 것은 아마 그런 역사 때문일 것이다.
작가 가와구치 가이지는 1948년생으로 점령기에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선장으로 있는 소형 유조선에 탑승해 세토 내해를 항해했다고 한다. 쌍둥이 형제와 함께 전투기나 군함, 탱크 모델을 만들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런 그에게 <침묵의 함대>는 잠수함을 맘껏 그리는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학 시절엔 많은 학생들이 뛰어들었던 안보 투쟁엔 관심을 갖지 않았고, 만화 연구회 활동에 열중했다.
투쟁에 가담하지 않은 '오타쿠'라곤 해도 점령기에 태어나 20대 초 격동의 학생 운동을 목격하며 자랐을 '단카이' 세대로서, 어떤 세대적 정체성이 묻어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와 관련된 작가의 세계관은 일본의 최신 이지스 함이 기동 훈련 중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로 돌아간다는 설정의 대작 <지팡구> 등 다른 작품들을 함께 봐야 언급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이제까지 본 작가의 두 작품 <침묵의 함대>와 <메두사>만을 두고 보자면, 점령기에 미군정 사령부(GHQ)와 결탁해 성장한 구 정치 세력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만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 그가 <지팡구>와 관련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 한편 전전(戰前)의 해군인 소카는 (…) '패전과 무조건 항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자부심 강한 나라'인 '지팡구'를 만들고자 획책합니다. 그가 풍요롭기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 현재의 일본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후의 일본인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라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패전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기에 일단 먹고 살기 위해서 희생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고나 할까요."
- 그럼 희생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전후의 일본인은, 풍요로움 대신 '긍지'를 잃었다고 생각해요. "사무라이는 굶어도 느긋이 잇새를 후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먹지 못하더라도 긍지를 가지고 이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죠." (2006년 5월 18일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 중)
아토믹 선샤인
가와구치가 말한 '풍요로움'과 '긍지'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것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전후 점령 프로그램으로 배급된 민주주의와 그 이후의 경제 부흥이 '풍요로움'이라면, '긍지'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침묵의 함대>를 한 번 더 경유하여,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사실 그 풍요로움과 긍지는 한 몸이 아닐까?
"우리는 원자력이 내뿜는 햇볕 속에서 해바라기를 즐기고 있다."
1946년 당시 연합국 민정국장을 지내던 코트니 휘트니 준장은 요시다 시게루 등 일본의 고관들 앞에서 후에 '아토믹 선샤인(atomic sunshine)'이라 불리는 위와 같은 유명한 발언을 한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전후 헌법' 그러니까 천황 지위 격하와 일본 군사력의 봉인을 담은 헌법 개정 관련 메모를 일본 정부쪽에 전달하며 뱉은 말이라고 한다. 일본 측에게 이 말은 미국이 다시 핵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는 '협박'으로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전후 일본 사회의 '번영'을 예측한 셈이 되었다. "하나는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아토믹 선샤인, 또 하나는 핵발전소라는 아토믹 선샤인. 이 두 개의 아토믹 선샤인이 전후 일본의 '번영'을 지탱했다." (☞관련 기사 : 아톰의 볼모 고질라의 공포(권혁태)) 미소 핵전쟁의 격화 속에서 일본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기치 아래 원전 대국으로 거듭났고, 안보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히로시마의 실제 '아토믹 선샤인'에서 시작된 전후 일분은 가장 역설적인 수동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풍요로움 속에서 긍지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있어 왔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신화와 등허리를 맞대고 있는 핵무기가 아니었을까. 일본의 56~57대 총리 기시 노부스케가 "평화적 이용이라도 그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저절로 높아진다. 일본은 핵무기는 갖지 않지만, 잠재적인 보유 능력을 높이는 것으로 (…) 국제 사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힘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의 핵 발전 기술은 늘, 어떤 위험한 가능성을 향해 진보해 왔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많은 학자들이 "히로시마와 후쿠시마는 한 몸이다"라고 지적해 왔는데, 그건 비단 핵무기와 핵발전소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같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전쟁 종결 스위치였던 핵이 냉전 구도 속에서 '평화'로 위세를 떨치다가, 결국 같은 장소에서 사람들을 덮치게 된 스토리가 거짓말처럼 극적이다.
마지막으로 <침묵의 함대> 보다는 그 무대가 작지만, 마찬가지로 평화와 번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같은 작가의 만화, <메두사>의 마지막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과격파 테러리스트 야마지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 요코를 인질로 잡고 들어간 곳이 핵발전소다. 그는 일본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겠다며 냉각 파이프에 폭탄을 설치하고 비상 노심 냉각 장치를 해제한다.
단순히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의도로 핵발전소를 그렸겠지만 2012년에 읽는 이 장면은 다분히 예언적이다. 최강의 미·소 핵잠수함을 격침시키는 <침묵의 함대>의 야마토보다 핵발전소에서 벌어지는 야마지의 총질이 더 큰 공포로 와 닿는 시대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이자 일본의 총리인 다쓰오는 이 사고로 사랑하는 요코를 떠나보내고, 가족과 함께 동남아시아 어디쯤으로 보이는 곳으로 이주해 수풀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그리게 된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말이지만 후쿠시마 이후 터져 나온 생태 담론이나 문명 비판적인 관점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적어두고 싶은 것은 이렇게 서구-일본 문명에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자연'이 아닌 이상, 작가의 눈은 단 한 번도 '아시아'로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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