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딱 1년이 됩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의 전환점으로 기록될지 모르는 후쿠시마 사고, 그 1년을 맞아서 '프레시안 books'는 특집호 '후쿠시마 그리고 1년'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후쿠시마 사고를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책과 함께 선보입니다. <편집자> |
후쿠시마 사고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면의 반핵 활동가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기후 변화나 온실 기체 감축을 너무 강조하면 결과적으론 핵 발전을 도와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얘기인즉슨 사람들이 핵 발전을 온실 기체 배출 없는 깨끗한 에너지라고 오인하고 있는데, 온실 기체 감축을 더 강조하면 '핵 마피아'들이 분명 그걸 악용하고 나설 것이라는 것이다. 기후 변화의 위협도 심각하지만 후쿠시마에서 보듯 핵 발전은 지금 당장의 문제이기 때문에 거기에 더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도전적인 문제제기였지만, 경쾌한 음악 뒤로 내리는 비에 사과를 씻어 한 입 베어 물던 원자력문화재단의 TV 광고가 불현듯 스치며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작년(2011년) 말 더반에서 있었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는 논평을 내자 지역의 반핵 활동가 한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마찬가지로 온실 기체 감축을 주장하는 것은 핵 발전이 확대되는 걸 돕는다는 취지였다.
"핵 발전에 명분을 주는 것은 이산화탄소입니다. 알 만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다면 핵 발전은 영원히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엔 당혹스럽다 못해 화가 났다. 메일 말미에 핵발전소도 화력 발전소만큼이나 많은 온실 기체를 배출하는 걸 강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주장했지만 내게 그 메일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 분들은 기후 변화와 핵 발전 문제를 완전히 이분화해 서로 부정적인 영향을 매개로 하는 관계로 단정 짓는 건 아니었는지.
게다가 탈핵에 집중할 것인지, 기후 변화 문제에 집중할 것인지 하는 짧은 시점의 문제를 두고 마치 근본 우선순위의 문제처럼 얘기하는 논지엔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오랜 기간 반핵 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이런 의견이라면 그간 한국 사회는 도대체 무얼 보고 무얼 반성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전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 문제가 핵 발전 확대에 일정 수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참사 이후 정체되어있던 핵 발전 산업이 기후 변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2000년대에 다시 스멀스멀 덩치를 키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핵 마피아들은 핵 발전이 마치 기후 변화의 구세주라도 되는 양 지구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핵 발전이 대안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댄다. 화석 연료는 기후 변화의 원인이며, 고갈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온실 기체가 없다는 핵 발전은 모르는 사람들에겐 달콤한 유혹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다. 사실이다. 그들이 기후 변화를 저렴하게 활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건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논리일 뿐이지 그로 인해 우리가 기후 변화라는 시대적 화두를 잊거나 부인한다면 그건 이미 지는 싸움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기후 변화의 대안으로 그들이 왜 핵 발전을 목 놓아 불러대고 있는가를 파헤치는 것이다.
단순히 발전 단계에서 온실 기체 배출이 없다는 때문에? 이건 반쪽짜리 사실이다. 핵 발전 역시 우라늄 채굴부터 폐로와 핵폐기물 저장, 관리까지의 전 과정을 평가해보면 만만치 않은 온실 기체가 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우라늄 역시 고갈 자원이고 재처리 기술은 불안정하다. 안전하기 때문에?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우리에게 '신화란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도저도 아니다. 도대체 왜 기후 변화에 대한 해답으로 핵 발전이 튀어나왔을까? 바로 '이익'때문이다.
나는 추위도 가시지 않은 봄부터 올 가을 유행 패션을 얘기하는 패션 산업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올 겨울 유행할 패션이라느니 청년층이 선호'할' 패션이라느니 운운하면서 점쟁이 역할을 자임하는 패션쇼는 적어도 내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병리 현상일 뿐이다. 사람들의 선호에 따라 옷이 생산되는 게 아니고, 디자이너들이 '유행할 패션'이라는 이름을 달아 내놓으면 그걸 연예인들이 입고, 그걸 다시 일반 시민들이 사서 입는 전형적인 역진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에너지 체계가 그렇다. 수요가 공급을 부르는 게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부른다. 가동을 멈출 수 없는 핵 발전 때문에 저녁과 겨울철 전력 수요가 증가했고, 수요가 증가하자 다시 핵발전소를 지으려 한다. 이런 구조를 고착화시킨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돈과 권력이다.
기후 변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시급한 당면 과제다. 핵 발전도 당면 과제다. 그런데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핵 발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부조리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일뿐 다른 의미가 없다. 이를 직시하지 못하고 동조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기후 변화를 일으킨 현대 사회 시스템과 핵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과도한 에너지 소비 시스템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
따라서 핵 발전을 대안으로 내세우려고 하는 건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은 기득권층(Ancien Régime)이 근저에 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과연 누가 기후 변화와 핵 발전, 그리고 우리의 지속 불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무한 반복하려고 하나 곱씹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 <기후 변화와 먹이 사슬>(베른하르트 푀터 지음, 정현경 옮김, 이후 펴냄). ⓒ이후 |
책을 읽으니 왜 기후 변화가 발생했는지, 그리고 왜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지 못하는가에 관한 사실들이 보다 선명해진다. 기후 변화의 가해자로 꼽히는 사람들은 핵 마피아와 경쟁자이자 동거인인 '석유 마피아'들이다.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지구와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런 과정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한 자들은 핵 마피아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력들이다.
그리고 탄소 시장을 만드는 사람들과 나무를 심으면 면죄부를 나눠주겠다는 사람들은 잘못된 해결책으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현대 에너지 시스템에서 이미 권력자 혹은 부유층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이란 점이다. 보수적인 정책으로 유명한 국제에너지기구(IEA)조차 2050년까지 온실 기체 감축 기여도 중 60퍼센트를 차지할 수단으로 에너지 효율화를 지목한 바 있다. (이에 반해 핵 발전은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의 과잉 소비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이 다른 수단들을 압도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에너지원만을 전환하려고 하는 건 분명 속내가 있다. 근본적인 반성은커녕 또 다른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그건 당연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먹이 사슬'과 '범죄'는 뒷전에 놓고 기후 변화와 핵 발전을 탈동조화(decoupling)시켜 생각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베른하르트 푀터는 이런 구조를 "범죄"로 규정한다. 우리가 분노는 그 지점으로 향해야 한다. 게다가 영국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은 기후 변화 경제 분석 보고서에서 기후 변화는 "세계가 목격한 가장 큰 시장 실패"라고 단언했다.
이제 두 분의 질문에 답하고 싶다. 기후 변화와 핵발전 문제 모두 중요한 문제다. 두 문제 모두 배경에는 생산력주의와 소비에서 이익이 나오는 경제 논리가 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문제를 분리하는 것에 휘둘리시면 안 된다. 2011년 3월의 후쿠시마 사고와 가을 방콕의 홍수는 뿌리가 같다.
이걸 외따로 두는 순간 우리는 아벨을 죽인 카인의 우화(愚話)를 반복해야 한다. 어쩌면 이건 두 분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기후 변화와 후쿠시마를 겪어야 하는 우리 세대에 대한 자조일지도 모르겠다. 분노하시라. 그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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